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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진화, 인간의 성숙

나의 지각, 세계의 지각

 베르그손의 논점은 ‘내부(나)’와 ‘외부(세계)’의 분리는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는 거죠. 만약 베르그손의 논의가 옳다면, 우리는 이제 하나의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나’와 ‘세계’가 분리되지 않는다면, ‘나’는 ‘세계’를 지각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잖아요. ‘주체’와 ‘대상’의 분리가 없다면, ‘주체’가 ‘대상’을 ‘지각’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할 테니까요. 하지만 실제로는 누구나 ‘세계’를 지각할 수 있잖아요. ‘나-세계’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어떻게 ‘세계’는 ‘지각’하게 되는 걸까요?

     

 사실 나는 물질계 일반 속에서 단번에 자리 잡으며내 몸이라 불릴 그 행동의 중심을 점진적으로 제한하고 그렇게 하여 그것을 모든 다른 것들과 구별하는데 말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세계가 모두 연장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나’와 ‘세계’를 명백하게 구별할 수 있죠. 누군가 사과를 ‘지각’한다는 건, ‘나’와 ‘사과(세계)’가 구별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잖아요. (실제로는 연결된) ‘나-세계’의 구별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요? “나는 물질계 속에서 단번에 자리 잡으며, 내 몸이라 불릴 행동의 중심을 점진적으로 제한”하면서 외부 대상들과 구별되는 거죠.      


 생물학적으로 이야기해 볼게요. ‘나’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수정체로부터 만들어졌죠. 그런데 그 수정체를 이루는 정자와 난자는 자연(세계) 밖에서 왔나요? 그렇지 않죠. 그것은 모두 자연(세계) 안에서 왔죠. 정자와 난자는 세계의 일부고 그것이 모여 수정체가 되고 자궁에 자리를 잡는 거죠. 그렇게 수정체, 즉 “내 몸이라 불릴 그 행동의 중심”이 탄생하게 되는 거죠.     



‘지각’은 ‘분리’가 아닌 ‘구별’로 가능하다.

    

 그런데 이 수정체는 무규정·무제한으로 자라나요? 그렇지 않죠. 그것은 다시 자연(유전자·섭취 양분·양육 환경…) 안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제한되며 특정한 형태의 ‘나’가 되죠. 이런 과정을 통해 ‘나-세계’는 (‘분리’가 아닌!) ‘구별’되는 거예요. 바로 이 ‘구별’이 ‘나’가 ‘세계’를 ‘지각’하게 되는 시작점인 거예요. ‘나’가 ‘세계’를 ‘지각’하는 것은 (‘내부’에서 ‘외부’를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 안 있는 수많은 “다른 것들과 구별”되기 때문인 거죠.     


 이제 우리는 ‘나’에 대한 ‘지각’과 ‘세계’에 대한 ‘지각’이 어떻게 이뤄지는 답할 수 있어요. 세계(자연)를 온갖 색감으로 수놓아진 ‘그림’이라고 가정해 봐요. 그때 ‘나’는 그 ‘그림’ 밖에서 그 ‘그림’을 보는 게 아니에요. ‘나’는 그 ‘그림’ 속 하나의 색인 거죠. 그 ‘그림’ 속 ‘나’와 다른 색을 가진 ‘너’를 보게 되었을 때(너는 이런 사람이구나!) 비로소 ‘나’를 ‘지각’하게 되는 거죠(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그렇게 ‘나’를 지각하게 만드는 ‘너’를 더 많이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세계’를 ‘지각’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죠.      


 우리네 삶을 있는 그대로 돌아봐요. ‘너(부모·친구·연인…)’와 분리된 ‘나’가 먼저 있고, 그 ‘나’가 ‘너’를 ‘지각’한 건가요? 바보 같은 소리죠. ‘나’와 ‘너’의 ‘지각’은 동시적이죠. 어린 시절, 능숙하게 젓가락질하는 부모를 보며 ‘나는 숟가락을 쓰는구나’를 ‘지각’하게 되잖아요. 학창 시절,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를 보며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구나’를 ‘지각’하게 되었잖아요.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죠. 항상 미소 짓는 연인을 보며 ‘나는 세계를 부정적으로 보는구나’를 깨닫게 되잖아요. 이처럼 ‘나’는 (‘나’와 ‘너’가 연결된) 가정, 학교, 사랑이라는 “물질계 일반 속에서 단번에 자리 잡고” 그 속에서 다른 모든 ‘너’들과 구별됨으로써 ‘나’와 ‘세계’를 지각하게 되는 거죠. ‘나’와 ‘너’와 ‘세계’의 ‘지각’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거예요.      



‘펼쳐짐’, 지각의 역사

 

 지각의 역사는 내적이며 비연장적인 상태들이 펼쳐지고 밖으로 투사되는 역사가 될 것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이제 베르그손의 ‘펼쳐짐Extension’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베르그손의 논의는 ‘세계=연장(연결), 지각=비연장(분절)’ 이렇게 도식화할 수 있죠. 이때 ‘펼쳐짐Extension’은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거예요. 즉 ‘펼쳐짐’은 ‘세계(연장)’와 ‘지각(비연장)’ 사이에 존재하는 거예요. ‘펼쳐진다’라는 단어를 생각해 봅시다. 수없이 접혀 있는 종이가 있어요. 접혀 있는 그 형태는 ‘비연장(분절)’ 상태죠. 이때 접힌 것을 하나 펼치면 그만큼 ‘연장’된 거잖아요. 접힌 종이를 하나씩 펼치면, 펼친 만큼 ‘연장’되는 거죠.     

 

 이처럼, ‘펼쳐짐Extension’이라는 개념은 비연장성(지각)에서 연장성(세계)으로 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거죠. 즉, ‘펼쳐짐’은 ‘지각’의 과정인 거예요. 수없이 접혀 있어서 마치 분절(비연장)된 것처럼 보이는 (하지만 사실은 연장된) 세계를 하나씩 펼쳐서 이어나가는 거죠. 그것이 바로 ‘지각’의 과정, 즉 ‘지각’의 역사인 거죠. ‘지각’의 역사는 세계라는 “내적이며 비연장적인 상태들이 펼쳐지고 밖으로 투사되는 역사”인 거예요. 외적으로 분절된 것처럼 보이는 세계를 내적으로 연결된 세계로 펼쳐 나가는 것. 바로 이것이 ‘지각’의 역사인 거예요.

      

 이 ‘지각’의 역사는 인간 지성의 역사이기도 하죠. 과학의 발전을 생각해 봐요. 천동설 시절에는 지구와 태양은 서로 상관없이 분리되었다고 생각했죠. 지구가 중심이고 그 주위를 태양이 돌고 있으니 사실상 태양은 지구와 상관없는 존재였죠, 하지만 지동설이 등장하면서 지구와 태양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즉, 태양계라는 연결된 세계에 대해 지각하게 된 거죠. 이는 비연장(분절)된 것처럼 보이는 세계가 인간 지성(과학)이 발전하면서 점점 더 연장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죠.      


 사실, ‘지각’의 역사는 우리들의 일상 역사이기도 해요. 어렸을 때 어른들이 매운 음식을 먹거나 뜨거운 물 속에서 들어가면서 “시원하다~”라고 말하는지 이해를 못 했잖아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잖아요. 그건 우리의 ‘지각’이 넓어지면 접혔던 부분이 펼쳐졌기 때문이에요. 아이의 세계가 어른들의 세계와 연결(연장)되는 거죠. 이것이 ‘지각’을 펼치는 과정이고, 우리의 ‘지각’의 역사잖아요.        


  

생명의 진화, 인간의 성숙


 ‘지각’은 분명 제한적이에요. 무한히 접힌 종이(무한히 연결되어 출렁이는 세계)를 다 펼쳐져서 볼 수 있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죠. 어떤 생명체든 세계를 어느 정도 제한적으로 ‘지각’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모든 생명체가 접힌 상태로 종이를 볼 수밖에 없다(제한적 지각)고 하더라도, 그 종이를 얼마나 ‘펼쳐서’ 보는지는 생명체마다 분명히 다르죠. 어떤 생명체(아메바)는 단 한 번도 펼치지 못한 채로 세계를 ‘지각’할 수도 있고, 어떤 생명체(개)는 수십 번을, 또 어떤 생명체(인간)는 수천 번을 펼쳐서 세계를 ‘지각’하기도 할 테니까요. 이처럼 ‘지각’의 역사는 생명의 진화 역사이기도 하죠. 생명이 진화한다는 것은 결국 더 많은 것들을 ‘지각’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지각’의 역사는 한 인간의 진화(성숙) 역사이기도 해요. ‘지각’의 역사는 ‘삶의 왜곡(분리된 세계)’으로부터 ‘삶의 진실(연결된 세계)’을 조금씩 펼치는 과정이잖아요.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삶의 왜곡(분리된 세계)을 유지하며 살죠. 즉 (모든 것이 연결된) 세계가 각자 분리되었다고 ‘지각’하잖아요.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처럼 ‘지각’을 충분히 펼치지 못한 이들은 항상 ‘너’와 ‘나’를 분리하죠.      


 세상 사람들은 ‘너’를 ‘나’와 상관없는 존재로 ‘지각’하잖아요. 이는 ‘지각’이 협소한 거죠. 자연을 파괴하는 이들이 대표적으로 그렇죠. 그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연을 파괴할 수 있는 건, 자연(산·바다·나무·모래·바람·비·꽃…)은 ‘나’와 분리되었기에 ‘나’와 상관없는 존재로 ‘지각’하기 때문이죠. 그들이 만약 자연을 자신과 직접 관계한 ‘너’라고 여긴다면 그런 무분별한 파괴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자신이 끔찍이 아끼는 ‘너’를 파괴하려는 이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모든 이가 이렇게 협소한 ‘지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죠.     

 

 어떤 이는 원생동물(아메바)이 다세포 동물(인간)로 진화하듯, 한 인간으로 성숙해지는 진화를 하죠. 이들은 제한적 ‘지각’을 조금씩 펼쳐서 접혀 있던 ‘삶의 진실(연장된 세계)’을 조금씩 펼쳐 나가는 거예요. “너는 나고, 나는 너구나.” ‘지각’이 충분히 넓은 이들이 자연을 아끼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죠. 그들은 자연이 ‘나’와 분리된 ‘너’가 아니라 ‘나’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너’라는 삶의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생명체의 진화도, 인간의 지성도, 한 사람의 성숙도 모두 ‘지각’의 역사를 통해서 가능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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