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기원을 찾아서
이제 우리는 '감정'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즉 '감정'의 기원을 밝힐 수 있어요.
지각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가능적 행동과 그에 따라 역으로 사물이 우리에게 취하는 가능적 행동의 크기를 나타낸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먼저 '지각'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지각'은 특정한 사물(칼)을 포착해서 그에 합당한 여러 가능적 행동(요리·위협·도망)을 마련하는 것이잖아요. 쉽게 말해 ‘지각=대상의 포착+가능적 행동’인 거죠. 이는 “사물(칼)에 대한 우리의 행동(요리)”뿐만 아니라 “역으로 사물(칼)이 우리에게 취하는 가능적 행동(위협)”도 있기 때문이에요. 칼에 대한 지각은 날카로움의 포착인 동시에 그것에 대한 가능적 행동하는 거죠. 이는 우리가 사물(칼)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물(칼) 역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우리의 신체와 지각된 대상을 가르는 거리는 진정으로 위험의 임박성이 더 큰지 작은지, 약속의 기한이 더 먼지 가까운지를 나타낸다. … 그 대상과 우리 신체 사이의 거리가 점차 감소할수록, 달리 말해 위험이 더 다급해지고 약속이 더 직접적이 될수록, 잠재적 행동은 실재 행동으로 변형되려는 경향을 가진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이제 신체와 지각된 대상(칼)의 거리와 기한에 대해서 생각해 봐요. 칼을 든 상대가 10km 떨어져 있다가 점점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해 봐요. 혹은 칼을 든 상대가 10일 뒤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했다고 해 봐요. 그때 “위험의 임박성”은 점점 커지겠죠? 또 “약속의 기한”이 점점 가까워지겠죠? 이때 우리의 마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맞서 싸워야 하나?’ ‘살려달라고 빌어야 하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도망가야 하나?’ 등등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들겠죠. 즉, 여러 잠재적(가능적) 행동들이 마련되겠죠.
그런데 이제 칼을 든 사람이 지금 바로 눈 바로 앞까지 왔다면 어떻게 될까요? 싸우거나, 빌거나, 도움을 요청하거나, 도망을 가거나 등등의 여러 잠재적 행동들 가운데 하나를 당장 선택해야만 하잖아요. 베르그손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상과 우리 신체 사이의 거리가 점차 감소할수록, 달리 말해 위험이 더 다급해지고 약속이 더 직접적이 될수록, 잠재적 행동은 실재 행동으로 변형되려는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감정은 특수한 지각이다.
이제 한계까지 이르러 거리가 없어졌다고, 즉 지각할 대상이 우리 신체와 일치한다고, 즉 우리 자신의 신체가 지각할 대상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때 매우 특수한 지각이 표현할 것은 더 이상 잠재적인 행동이 아니라 실재 행동이다. 정념은 바로 거기서 출현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칼을 든 사람이 점점 가까워져 “이제 한계까지 가서 거리가 없어졌다”고 해 봐요. “지각할 대상(칼 든 사람)이 우리의 신체와 일치”한 상황이 된 거잖아요. 이는 대상과 신체의 거리가 0이 된 상태잖아요. 이때 우리의 마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때 매우 특수한 지각”이 출현하게 돼요. 그 특수한 지각은 “잠재적인 행동”을 “실재 행동”으로 전환 시키는 지각이죠. “감정(정념)은 바로 거기서 출현”하게 되는 거예요.
칼을 든 사람이 멀리 있을 때는 여러 생각(싸움·읍소·도움·요청…)을 하다가 상대와 거리가 0이 되었을 때 도망을 쳤다고 해봐요. 왜 도망쳤나요? 달리 말해, 왜 여러 “잠재적 행동”들 중 하나의 “실재 행동”을 선택하게 되었나요? 그것은 공포라는 감정 때문이죠. 감정은 지각과 별개의 정신 작용이 아니에요. 감정은 지각의 한 형태에요. 일반적 지각이 강도를 더해가다가 어떤 임계치를 넘어가는 순간, 특수한 형태로 질적 전환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특수한 지각이 바로 감정인 거예요.
‘이해’와 ‘사랑’을 생각해 볼까요?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지각이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그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이해’하는 것은 지각이잖아요. 하지만 그 지각이 점점 강도를 더해간다고 해봐요. 그 사람과 거리를 점점 좁혀 점점 더 ‘이해’하게 된다고 해봐요. 즉, ‘이해의 임박성’이 점점 커진다고 해봐요. 그렇게 그 사람과의 육체·정서적 거리가 0이 되는 순간, ‘이해’는 ‘사랑’으로 질적 전환을 맞이하게 되잖아요. ‘이해(지각)’의 극한치가 바로 ‘사랑(감정)’인 셈인 거죠.
이성적인 사람과 감정적인 사람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 않아요. 이성적인 이들은 세계를 잘 지각하는 사람이죠. 진정으로 이성적인 이들은 결국 감정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어요. 무엇인가를 진짜로 지각(이해)하는 사람은 결국 감정(사랑)에 가닿게 돼요.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된다”는 건 그런 말이죠. ‘위험의 임박성’이 점점 커져서 ‘도망’가게 되는 것처럼, ‘이해의 임박성’이 점점 커지면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감정은 주변 대상들에 의한 몸의 변화다.
순수한 상태에서 우리의 지각은 진정으로 사물의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고유한 의미에서의 기분은 … 우리 각자가 자신의 몸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상이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상들 가운데서 겪는 필요한 변화들과 일치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지각은 외부 대상(사물)의 부분이에요. 한 사람을 지각한다는 건, 그 사람 전체는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부분에 대해서 지각하는 거잖아요. 이때 기분(감정)은 무엇일까요? 한 사람이라는 ‘상’을 지각할 때, 그것이 우리의 몸이라는 ‘상’에 특정한 영향을 미치게 되죠. 한 사람이 화가 나 있다(여유있다)고 지각할 때, 우리의 몸은 위축(이완)되잖아요. 감정이라는 건 바로 이런 몸의 변화 양상들인 거죠. 몸의 위축이 긴장·우울·짜증이라는 감정이고, 몸의 이완은 여유·유쾌·기쁨이라는 감정인 거죠.
즉, 외부 대상(상)을 지각하며 우리의 몸에 필요한 변화들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감정인 거예요. 세상 모든 존재들은 다 진동이죠. ‘너’도 진동이고, ‘나’도 진동이죠. 이때 감정(기분)이라는 것은 ‘너’라는 진동과 ‘나’라는 진동이 만나 만들어내는 내 몸의 진동인 거예요. 감정을 바꾸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 안에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외부 대상을 만나야 해요. 그 마주침이 불운하게 슬픈 기분의 파형(진동)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운이 좋다면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쁜 기분의 파형(진동)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감정’적으로 산다는 건, ‘너’를 지각하며 산다는 것
정념의 필요성은 지각 자체의 존재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감정(정념)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그 필요성은 지각 자체의 존재로부터 흘러나온다고 말해요. 감정은 우리에게 필요하죠. 이는 단순히 삶을 말랑말랑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지각이 곧 감정이 되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다종다양한 세계를 지각하며 살아야 하잖아요. 세계를 지각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죠. 그런데 그 지각은 결국 감정이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이는 우리네 삶에서 매우 중요한 통찰이에요.
‘지각’이 ‘생각’이라면, ‘감정’은 ‘행동’이에요. 많은 이들이 ‘생각’은 많고 ‘행동’은 적죠.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걸까요? 의지 부족일까요? 바보 같은 소리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무엇인가를 느낄 때 행동하게 돼요. 공포를 느낄 때 도망가게 되는 것처럼, 사랑을 느낄 때 노력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세계를 진정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결국 세계를 느낀다는 말과 같은 거예요. 세계를 느낄 때라야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행동들을 하게 돼요.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감정(행동!)’적으로 산다는 말일 거예요.
사랑, 명예, 호의, 환희, 희망, 신뢰, 증오, 절망, 공포, 질투 등등 우리 마음 안에는 수없이 많은 감정이 있죠. 이 감정들을 긍정해야 돼요. 감정을 긍정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가장 먼저, 감정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해하는 거예요. 즉, 감정이 곧 행동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거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정은 우리를 행동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해요. 그리고 그 “정념(감정)의 필요성이 지각 자체의 존재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사실” 역시 분명히 이해해야 해요.
'감정'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지만, 그 촉발은 결국 지각된 외부 대상으로부터 올 수밖에 없잖아요. ‘너’가 없다면 사랑, 명예, 호의, 환희, 희망, 신뢰, 증오, 절망, 공포, 질투도 모두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결국 우리는 ‘나(자신)’가 아니라 ‘너(타자)’에 관심을 두며 살아야 하는 거예요. '지각'과 '감정'은 모두 ‘나’가 아닌 ‘너’로부터 촉발되는 것이니까요. 진정으로 ‘감정’적으로 산다는 건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며 사는 게 아니에요. 이는 ‘나’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줄이고, ‘너’를 '지각'하며 산다는 의미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