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억’하는 걸까?
이 책 제목이 『물질과 기억』이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물질’과 ‘기억’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겠죠. 앞서 논의한 ‘지각’이나 ‘감정’에 대한 논의는 ‘물질’과 관련되어 있어요. 우리는 특정한 ‘물질’, 즉 사물에 대해 ‘지각’하고 그에 따라 특정한 ‘감정’을 느끼게 되잖아요. 그렇다면 ‘기억’이라는 것은 어떤 기능을 하며 우리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기억’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수행해야 할 행위의 비결정성은 순전한 변덕과 혼동되지 않기 위해 지각된 상들의 보존을 요청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이 말하는 “지각된 상들의 보존”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기억’이에요.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지각’을 하게 될 때가 있죠. 이렇게 지각된 대상은 하나의 ‘상image’로서 우리에게 들어오잖아요. 그 ‘상image’이 보존되는 게 바로 ‘기억’이잖아요. 그렇다면 이는 왜 필요한 걸까요? 우리는 왜 ‘기억’ 즉, “지각된 상들을 보존”하는 걸까요?
먼저 질문을 하나 해 볼게요. 우리가 어떤 행위(선택)를 할 때 그 행위는 이미 다 결정되어 있는 걸까요? 아니면 결정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 걸까요? 우리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잖아요. 사람마다 살아온 삶의 맥락에 따라 자유 의지의 크기 차이는 있겠지만, 자유 의지가 없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각자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할 때 반드시 미리 결정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선택)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다고 했을 때, 그 행동의 밀도가 10일 수도 있고, 100일 수도 있잖아요. 그 사이에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역시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잖아요. 즉, 우리가 “수행해야 할 행위에는 반드시 비결정성”이 포함되어 있는 거죠.
다이어트 중인데, 밤늦게 집에 갔는데 치킨이 있어요. 이때 그 치킨을 먹을지 말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죠. 물론 긴 시간 야식을 먹었던 이는 치킨을 먹게 될 확률이 높고, 야식을 먹지 않았던 이는 치킨을 먹지 않게 될 확률이 높겠죠. 하지만 아무리 긴 시간 야식을 먹는 삶을 살아왔더라도, 독하게 마음(자유 의지)먹고 그날 치킨 먹는 것을 참을 수 있잖아요(밀도 100인 행동). 설사 치킨을 먹고 싶은 마음을 완전히 참지 못하더라도 치킨 대신 샐러드를 먹고 잘 수도 있잖아요(밀도 10인 행동).
자유와 변덕의 차이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죠. “수행해야 할 행위의 비결정성은 순수한 변덕”인 것 아닌가? “수행해야 할 행위의 비결정성”은 자유를 의미하잖아요. 오늘 밤에 치킨을 먹을 것인지 안 먹을 것인지는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에 비결정되어 있죠. 그런데 이런 비결정성은 ‘자유’라고도 볼 수 있지만, “순수한 변덕”처럼 보이기도 하잖아요. 즉 내가 수행해야 할 어떤 행위가 비결정적이라면(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런 경향성도 없는 순전한 변덕이라고 볼 수도 있잖아요. 쉽게 말해, 다이어트 중이기 때문에 치킨을 먹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냥 변덕 때문에 먹지 않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베르그손은 자유의지와 변덕을 구분 하려는 거에요. 내가 어떤 행위를 하거나 혹은 하지 않거나, 그리고 한다면 얼마나 열심히 할지, 얼마나 독하게 마음 먹고 할지 등은 자유 의지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비결정적이죠. 하지만 이런 비결정성은 “단순한 변덕”과는 분명 다르죠. 그렇다면 이 둘, 즉 “수행해야 할 행위의 비결정성”과 “순전한 변덕”은 어떻게 다른 걸까요? 이 둘을 구분해 주는 기준이 바로 “지각된 상들의 보존” 즉, ‘기억’이에요. 즉, 내가 어떤 ‘기억’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거예요.
밤에 치킨을 먹는 사람과 안 먹는 사람의 차이는 뭐겠어요? 밤에 치킨을 먹지 않아서 살을 뺀 ‘기억’의 유무 차이일 거예요. 밤에 치킨을 먹지 않아서 살을 뺀 ‘기억’이 있는 이들은 밤에 치킨을 먹지 않는 행위를 할 가능성이 더 크고, 살을 뺀 ‘기억’이 없는 이들은 밤에 치킨을 먹는 행위를 할 가능성이 더 클 거예요. 베르그손은 우리가 “수행해야 할 행위의 비결정성”이 과거 ‘기억’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반대로 “순수한 변덕”이라는 것은 그 ‘기억’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인 거죠. 야식을 먹지 않아서 살을 뺀 ‘기억’이 충분히 있는 이들도 밤에 치킨을 먹을 수 있죠. 반대로 야식을 먹지 않아서 살을 뺀 ‘기억’이 없는 이들 역시 밤에 치킨을 먹지 않을 수도 있죠. 이것이 “순수한 변덕”인 거예요. 즉, “수행해야 할 행위의 비결정성”은 (기억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경향성을 갖고, “순수한 변덕”은 (기억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일정한 경향성을 갖지 않는 행위인 셈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