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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과거와 어떻게 결별하는가?

기억은 지각에 섞인다.

 이제 ‘지각’과 ‘기억’에 대한 논의를 해봅시다. ‘지각’과 ‘기억’은 다르죠. 우리가 지금 펜을 ‘지각’하고, 다음 날이 되면 그 펜을 ‘기억’하는 거잖아요. 이처럼 ‘지각’은 파악(현재)이고, ‘기억’은 회상(과거)이죠. 그렇다면 ‘지각’과 ‘기억’은 우리의 정신에서 각자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아요. ‘지각’된 것은 ‘기억’되지만 동시에 ‘기억’이 ‘지각’에 영향을 미쳐요.      


 우선 기억즉 과거 상들의 존속을 놓으면 그 상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현재 지각에 섞일 것이며 심지어는 그것을 대체할 것이라고 말하자왜냐하면 그것들은 유용해지기 위해서만 보존되기 때문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의 말처럼, ‘기억’은 현재 ‘지각’에 섞이게 돼요. 이는 전혀 낯선 말이 아니에요. 대학생 시절, 한 친구가 자기 여자 친구를 소개해 줬는데, 굉장히 난감했어요. 내가 보기엔 별로 예쁘지 않은데, 자꾸만 ‘손예진’ 닮았다고 하는 거예요. ‘손예진 닮지 않았냐?’고 계속 물어보길래 귀가 닮은 거 같다고 말해줬어요. 그런데 그 친구 눈에는 눈, 코, 입 모두 다 ‘손예진’처럼 보이는 거예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그 친구의 (여자 친구와 함께) 행복했던 ‘기억’이 여자 친구를 ‘손예진’으로 ‘지각’하게 만든 거예요. 반대로 제게는 그런 ‘기억’이 없으니 여자 친구가 평범해 보였던 것이고요. 이처럼 ‘지각’과 ‘기억’은 우리의 인식 체계 안에서 별도로 구분되지만, 동시에 이 둘은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미쳐요. ‘기억’ 때문에 ‘지각’이 영향을 받기도 하고, ‘지각’ 때문에 ‘기억’이 영향을 받아요. 둘은 사실 뒤엉켜 있는 거예요.      



‘기억’은 유용성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가 같은 대상을 본다고 해서 다 똑같이 보는 게 아니에요. 각자가 갖고 있는 ‘기억’이 현재 ‘지각’에 섞이기도 하고, 심지어 ‘기억’이 ‘지각’을 대체하기도 하죠. 그렇다면 왜 ‘기억’은 ‘지각’에 섞이게 되는 걸까요? 혹은 왜 ‘기억’은 ‘지각’을 대체하게 되는 걸까요? ‘기억’은 우리네 삶에 유용성을 더하기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빨갛게 익은 탐스러운 사과가 하나 있다고 해봐요. 그 사과는 먹음직스럽게(먹고 싶게!) ‘지각’되죠. 왜 그럴까요? 과거 ‘기억’(사과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그 ‘지각’에 섞였기 때문이에요. 반대로 사과를 그저 빨갛고 둥근 어떤 것이라고 ‘지각’하는 이들은 그런 기억이 없기 때문이겠죠. 이처럼 “과거의 상들이 존속(기억)”되는 이유도, 또 그 ‘기억’이 우리의 ‘지각’에 섞이는 이유도 우리네 삶의 유용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인 거예요. 사과가 맛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다음에 또 사과를 찾아서 먹을 수 있잖아요. 또한 그 ‘기억’이 지금 사과의 ‘지각’에 섞여 사과가 먹음직스럽게 보여야 사과를 구할 더 큰 동력을 얻게 되잖아요.    

 

  ‘기억’이 ‘지각’을 대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사과가 맛있었다는 ‘기억’이 강하면 강할수록 사과 아닌 것(책상· 책·연필·노트…)들은 ‘지각’되지 않을 수도 있겠죠. 이는 ‘있음’을 ‘없음’으로 ‘지각’이 대체되는 거죠. 또 사과와 비슷하게 생긴 것들을 사과로 ‘지각’하게 될 수도 있죠. 전자는 ‘있음’이 ‘없음’으로 ‘지각’이 대체되는 경우이고, 후자는 사과 아닌 것이 사과로 ‘지각’이 대체되는 경우죠. 여자 친구를 손예진으로 ‘지각’한 친구도 마찬가지예요. 그 친구는 여자 친구에 대한 ‘지각’을 대체(평범한 외모→손예진)한 거죠. 이는 여자 친구와 ‘기억’이 유용(행복)하기 때문이죠. 이처럼 ‘기억’은 언제나 우리네 삶의 유용성과 관계되어 있어요.      



‘지각+유용성=기억’ ‘기억+유용성=지각’

 지각한다는 것이 결국 기억하기 위한 하나의 기회에 불과하다는 것우리는 실재성의 정도를 거의 실용성의 정도로 측정한다는 것사실상 실재성 자체와 일치하는 이 직접적 직관들을 실재적인 것의 단순한 기호들로 삼는 데 전적으로 관심을 둔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지각한다는 것”은 뭘까요? 우리는 수많은 대상을 ‘지각’하며 살죠. 이는 “기억하기 위한 하나의 기회에 불과”한 거예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지각’한다고 해서 다 ‘기억’하지 않잖아요. 우리는 어떤 것을 ‘기억’할까요? 우리에게 유용한 것만 ‘기억’해요. 지난 일주일을 ‘기억’해 봐요. 맛있는 음식을 먹었던 일과 교통사고가 날 뻔했던 일밖에 ‘기억’ 나지 않을 수 있어요. 왜 그럴까요? 맛집과 교통사고를 ‘기억’하는 것이 유용하기 때문이에요.      


 지난 일주일 동안 수없이 많은 ‘실재’적인 일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기억’ 나지 않는 이유는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실용’적이기 않기 때문이에요. 이처럼 우리는 삶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의 “실재성의 정도를 거의 실용성의 정도로 측정”하게 돼요. ‘지각’하는 것이 ‘기억’되는 게 아니라, ‘지각’된 것들 중 ‘유용’한 것들만 ‘기억’되는 거예요. 또한 동시에 ‘기억’된 것들 중 ‘유용’한 것들만 다시 ‘지각’되는 거예요.      


 도식화하자면, ‘기억=지각’이 아니라 ‘지각+유용성=기억’인 동시에 ‘기억+유용성=지각’인 거죠. 우리는 유용한 것(맛집·교통사고)만 ‘지각’하고, 그렇게 ‘지각’된 것들만 ‘기억’해요(지각+유용성=기억). 왜냐하면 그것(유용한 것)들 ‘기억’해야 다음에 다시 맛있는 것을 ‘지각’할 수 있고, 다시 일어날지 모를 교통사고를 피할 수 있는 ‘지각’이 가능하니까요(기억+유용성=지각).      



현재는 관념-운동적이다.

      

 우리 지각의 현재성(actualité)은 그 활동성(activité), 즉 지각을 따르는 운동에서 성립하는 것이지그것의 더 큰 강도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지각의 현재성”은 뭘까요? ‘지각’은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에요. 지금 우리가 연인을 보고 있다고 해봐요. 이것이 “지각의 현재성”이에요. 흔히 이 “지각의 현재성”이 우리의 정신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죠. 지금 연인을 ‘지각’하는 것이 우리 정신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 하잖아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지각의 현재성”은 우리의 “활동성”에서 성립하는 거예요. 달리 말해, “지각을 따르는 운동”에서 “지각의 현재성”이 성립되는 거예요.     


 현재 연인을 ‘지각’한다는 것이 뭘까요? 영화를 보듯이 혹은 옆집 아줌마를 보듯이 ‘지각’하는 건가요? 그렇지 않죠. 지금 연인을 ‘지각’한다는 건, 연인을 만나서 하는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하는) 활동인 거예요. ‘지각’과 ‘활동’은 동시적 사건이에요. 흔히 ‘지각’을 아무런 활동도 없는 명상 같은 순수한 정신작용 같은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대표적 삶의 오해죠. 지금 무엇인가를 ‘지각’한다는 것(지각의 현재성)은 그와 관련된 운동(활동성)을 한다는 거예요. 즉, “지각의 현재성은 그 활동성”인 거예요.

     

과거는 관념에 불과하며현재는 관념-운동적(idéo-moteur)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과거가 뭘까요? 그것은 관념이에요. 어제 연인을 만났던 사실(과거)은 아무런 활동성을 갖지 않는 우리의 정신 속에 있는 순수한 관념이죠. 서구 중세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기억’ ‘현재=지각’, ‘미래=기대’라고 시간을 정의했어요. 쉽게 말해, 과거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이고, 현재는 우리가 지각하는 것들이고, 미래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이라는 거죠. 아우구스티누스와 베르그손은 과거를 바라보는 관점은 같아요. 과거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관념, 즉 기억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현재는 어떨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재를 ‘지각’이라고 말했죠. 즉,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연인을 ‘지각’하는 것이 현재라는 것이죠. 정말 그럴까요? 이는 반쪽짜리 답변이에요. 베르그손은 현재를 “관념-운동적”이라고 정의해요. 아우구스티누스가 현재를 단순한(순수한) 지각이라고 보았다면, 베르그손은 기억(관념)에 따른 지각(운동)이라고 보고 있어요. 이는 분명한 삶의 진실이죠.      


 우리가 지금 연인을 보고(손잡고 안고 키스하고) 있을 때, 연인을 순수하게 ‘지각’(운동)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죠. 과거 연인과 함께했던 수많은 ‘기억’(관념)이 녹아든 채로 ‘지각’(운동)하는 것 아닌가요? 그 ‘기억’이 녹아든 ‘지각’이 곧 운동(손잡기·포옹·키스)이잖아요. 이처럼 현재는 ‘기억’(관념)도 아니고 ‘지각’(운동)도 아니죠. 그것은 ‘기억’이 녹아든 ‘지각’, 즉 “관념-운동적”인 것이죠.  


    

‘지각’과 ‘기억’은 구분 불가능하다.

      

 이제부터 지각과 기억 사이의 모든 차이는 붕괴되어 버린다과거는 본질적으로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것(ce qui n'agit plus)이다과거의 이런 성격을 무시함으로써 그것을 현재즉 작용하는 것(l’agissant)과 실제로 구별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지각과 기억 사이의 모든 차이는 붕괴”된다고 말해요. 이는 ‘지각’과 ‘기억’은 사실상 구분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요. 과거는 (이미 지난 일이기에) 분명 우리에게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것”이죠. 하지만 현재를 생각할 때, 이러한 과거의 성격(더 이상 작용하지 않음)은 무시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현재는 순수한 ‘지각’이 아니라 과거가 녹아든 상태로 ‘지각’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즉, 현재(작용하는 것)는 과거(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것)를 기반으로 성립되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 우리네 삶에서 ‘지각’과 ‘기억’은 명백히 구분되지 않는 거예요.      


 지금 매혹적인 한 사람을 만났다고 해봐요. 그것은 분명 “작용하는 것” 즉, 현재죠. 하지만 그것이 정말 현재이기만 한가요? 그렇지 않죠. 그 사람이 지금 매혹적인 것은, 과거 열렬히 사랑했던 한 사람과 어떤 속성이 닮았기 때문 아닌가요? 즉,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것(과거)”이 “작용하는 것(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 아닌가요? 그래서 실제 우리네 삶에서 ‘지각’과 ‘기억’은 구별할 수가 없는 거예요. 현재 ‘지각’은 이미 과거 ‘기억’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니까요.     



과거는 결코 지나가지 않는다.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잊어” 저는 이 말 진짜 싫어해요. 누군가를 애절하게 사랑했던 과거, 누군가에게 지독하게 상처받았던 과거가 있죠. 그런 과거가 정말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것”이 되나요? 달리 말해, 그 과거를 정말 잊을 수 있나요? 터무니없는 말이죠. 그것이 어떻게 잊혀요? 과거를 잊으라고 쉽게 말하는 이들은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해 본 적도, 제대로 상처받아 본 적도 없는 이들이거나 아니면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 이들일 거예요. 과거는 결코 지나가지도 사라지지도 않아요.     


 실질적으로 지각과 분리할 수 없는 기억은 현재에 과거를 끼워 넣고 … 그리하여 권리상으로는 물질을 그 자체 속에서 지각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으로는 우리 속에서 지각하게 된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의 말처럼, “기억은 현재에 끊임없이 과거를 끼워 넣고” 있어요. 그래서 권리상으로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상황)을 지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우리는 우리 속, 즉 ‘기억’ 속에서 ‘지각’하게 될 수밖에 없어요. ‘지각’과 ‘기억’을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믿지만, 우리 실제 삶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워요. ‘지각’(매혹적인 사람) 안에 이미 ‘기억’(첫사랑)이 들어와 있고, 또 ‘기억’(첫사랑)이 ‘지각’(매혹적인 사람)을 왜곡하죠.     


 과거는 분명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것”이죠. 하지만 이는 과거-현재-미래로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과거를 분절시킬 때만 가능한 논의죠. 실제 우리네 삶, 즉 시간이 끊임없이 흐르는 우리네 삶 속에서 과거는 “작용하는 것”이에요. 과거가 내포되지 않은 현재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에요. 현재는 항상 “관념(과거)-운동적”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불행한 과거를 넘어서는 법

   

 이제 우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던 삶의 문제 하나를 해결할 수 있어요. 지워지지 않는 과거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불행했던 과거(가난·이별·해고…)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잖아요. 그러니 불행이라는 특정한 과거에 매여 사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어떻게 불행했던 과거의 상처를 넘어 행복한 삶에 이를 수 있을까요? 현재를 살면 돼요. 현재 안에는 ‘관념’(과거)도 있지만 ‘운동’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요.     


 이 ‘운동’에 사활을 걸어야 해요. 불행한 과거 있다면, 악착같이 행복해지려고 노력(운동)해야 돼요. 불행한 과거가 우리의 ‘운동’을 불행 쪽으로 몰고 가려고 하더라도, 악착같이 행복해지는 쪽으로 ‘운동’하려고 애를 써야 돼요. 억울하게 직장에서 해고된 과거가 있는 사람을 알고 있어요. 그는 매일 술 마시고 세상을 향해 울분을 토하고 신세 한탄을 하면서 지내었어요. 이는 당연한 일이죠. 그의 과거(부당한 해고)가 현재(술)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다면 그는 영원히 그렇게 술에 빠져 살 수밖에 없을까요? 그렇지 않죠. “이제 좀 제대로 살고 싶어요.” 그가 술에 절은 채로 제게 찾아와 절박하게 말했어요. “1년간 매일 한 시간씩 뛰어요.” 제가 해준 말이었어요. 술을 끊고 건강을 되찾으라고 했던 말이 아니었어요. 긴 시간 쌓여왔던 어두운 ‘기억’들 너머 매일 조금씩 밝은 ‘기억’을 쌓아가길 바랐던 거예요. 과거(기억)는 사라지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어떤 행동(운동)을 하느냐에 따라 매 순간 과거는 새롭게 재편되는 거예요.      


 불행은 불행한 과거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니에요. 불행한 과거를 쌓아가고 있는 현재 때문에 발생하는 거예요. 어두운 과거를 지우려고(잊으려고) 해서는 안 돼요. 헛된 욕심이에요. 불행한 현재를 한 방에 해결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건 없어요. 지금 한 걸음씩 걸어가며 밝은 과거(기억)를 하나씩 쌓아나가야 해요. 그분은 지금 다른 직장을 구해서 나름 잘살고 있어요. 그건 1년 동안 달리면서 매일 조금씩 밝은 과거(기억)를 쌓아갔기 때문일 거예요. 그 1년 동안의 ‘운동’이 쌓여 “나 이제 뭔가 다른 일을 시작해 볼 수 있겠구나”라는 “지각의 현재성”이 생긴 걸 거예요.     


 “현재는 관념-운동적”인 거예요. 이 말은 우리의 현재가 ‘관념’(과거)의 지배를 받지만, 동시에 우리가 현재 어떤 ‘운동’을 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과거(관념)를 생성할 수도 있다는 의미에요. 불행한 과거에 매여 있다면, 바로 지금 ‘운동’을 시작해야 돼요. 불행한 과거와 결별할 수 있는 새로운 과거를 만들 수 있는 ‘운동’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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