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지각은 무엇인가?
‘지각’과 ‘기억’은 뒤엉켜 있어요. 우리의 ‘지각’에는 언제나 ‘기억’이 섞여 있어요. 이는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지각’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하죠. 한 사람이 가진 ‘기억’에 의해 ‘지각’은 변형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부모에게 단 한 번도 맞아본 ‘기억’이 없는 아이와 매일 맞고 자란 ‘기억’을 가진 아이가 있다고 해봅시다. 이 두 아이가 부모(혹은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은 현저히 다를 수밖에 없겠죠.
그렇다면 이제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죠. (기억이 개입되지 않은) ‘세계(부모) 그 자체’는 뭐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볼 수(지각) 있지?
지각의 진정한 성격을 회복시켜 보자. … 그런 지각은 기억과 근본적으로 구별될 것이다. 사물의 실재성은 더 이상 구성되거나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만져지고, 침투되고, 체험될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세계 그 자체’를 지각하기 위해 “지각의 진정한 성격을 회복시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해요. 여기서 말하는 “지각의 진정한 성격”이라는 건, ‘기억’에 영향을 받지 않는 ‘지각’을 의미하겠죠, “그런 지각은 기억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지각’이겠죠. 그런 ‘지각’이 가능하다면, 우리가 실재 ‘세계(부모)’라고 ‘지각’하는 대상(“사물의 실재성”)은 “더 이상 구성되거나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만져지고 (우리 속으로) 침투되고 (세계 그 자체로) 체험”되겠죠.
순수 지각은 무엇인가?
여기서 베르그손의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인 ‘순수 지각’과 ‘순수 기억’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순수 지각’은 ‘기억’에 영향을 받지 않는 ‘지각’이에요. 이는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외부 대상과 직접 접촉하며 ‘지각’하게 되는 것이죠. 예를 들면,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구두를 처음 보는 거예요. 이 첫 번째 지각을 ‘순수 지각’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때 우리는 어떤 ‘기억’도 갖지 않은 상태로 구두를 ‘지각’하는 것일 테니까요.
지금 우리는 ‘순수 지각’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매우 어렵겠죠. 우리는 이미 수없이 많은 ‘기억’을 갖고 있잖아요. 그러니 구두를 순수하게 ‘지각’할 수 없을 거예요. 구두에 관한 수 없는 ‘기억’들이 뒤엉킨 채로 구두를 ‘지각’하게 될 테니까요. 구두만 그럴까요? 한 사람 역시 마찬가지잖아요.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어요. 우리는 저마다의 ‘기억’을 갖고 한 사람을 ‘지각’하죠. 흔히 그것을 편견이나 선입견이라고 부르죠.
‘기억’은 일종의 필터에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지각’할 때 끼어 있는 필터.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필터(기억)가 있겠어요?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을 보려면 그 필터들을 다 제거하고 봐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죠. 우리의 ‘지각’을 왜곡하는 수없는 필터, 즉 ‘기억’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중 가장 강력한 필터(기억)가 콤플렉스나 피해의식 같은 ‘기억’일 테죠.
콤플렉스나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은 한 사람을 순수하게 ‘지각’할 수 없죠. 그 ‘기억’(콤플렉스·피해의식)이 ‘지각’을 왜곡시켜 세계(타자)를 제대로 ‘지각’할 수 없게 만드니까요. 콤플렉스나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을 살펴봐요. 그들은 누군가 호의로 한 행동을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오해하기도 하죠. 또 누군가 자신에게 모욕을 주었는데, 좋은 얘기 해줬다고 착각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잖아요. 극심한 콤플렉스나 피해의식 같은 ‘기억’이 없더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우리는 모두 ‘순수 지각’이 불가능한 상태예요.
순수 기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순수 기억’은 무엇일까요? ‘순수 기억’은 ‘지각’에 영향을 받지 않는 기억이에요. 이는 아무것도 ‘지각’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기억’이에요. 프로이트·라캉식으로 말하자면 ‘무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무엇인가 ‘지각’해야 ‘기억’이 떠오르잖아요. 예를 들면, 남자 친구를 ‘지각’해야, 그와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르잖아요. 이런 기억은 ‘순수 기억’이 아니에요. ‘지각’으로부터 촉발된 ‘기억’이죠. 즉, ‘지각’이 섞인 ‘기억’이에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지각’이 전혀 섞이지 않은 ‘기억’도 있어요. 어떤 ‘지각’도 없는 상태에서도 마음속 깊은 곳(무의식)에 담겨 있는 ‘기억’들이 있죠. 의식적으로 다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무의식 속에 쌓인 수없이 많은 ‘기억’들이 있잖아요. 그 기억들이 바로 ‘지각’에 영향을 받지 않은 ‘기억’, 즉 ‘순수 기억’인 거죠.
‘순수 지각’은 ‘기억’과 근본적으로 구별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기억’ 없이) 순수하게 ‘지각’할 수 있다면, 그 “사물의 실재성은 더 이상 구성되거나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만져지고, 침투되고, 체험”될 거예요. 맛있는 케이크가 눈앞에 있다고 해봅시다. 그것을 먹을지 말지 종종 망설이곤 하죠.
왜 망설이나요? 온갖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잖아요. ‘다이어트해야 되는데…’ ‘소개팅에서 살쪘다고 퇴짜맞았는데…’ ‘살쪄서 바지도 못 사 입었는데…’ ‘백화점에서 뚱뚱하다고 무시당했는데…’ 이런 온갖 ‘기억’들이 들어오잖아요. 그래서 맛있는 케이크를 앞에 두고 주저하게 되잖아요. 이건 케이크에 대한 ‘순수 지각’이 아니죠. ‘기억’이 뒤엉킨 ‘지각’이죠.
3~5살 즈음 되는 아이들은 케이크 앞에서 망설이지 않아요. 그냥 먹고 싶은 대로 먹어요. 그 아이에게 “사물의 실재성”, 즉 케이크의 실재성은 더 이상 구성되거나 재구성되지 않아요. 아이는 그저 케이크를 만지고, 그 케이크는 아이의 위 안으로 침투되는 과정에서 케이크 그 자체를 체험하게 되겠죠. 이는 아이에게는 살이 쪄서 상처받았던 기억이 적거나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기억의 지분 제거
그렇다면 이미 온갖 ‘기억’에 사로잡힌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지각’) 방법은 없는 걸까요? 우선 ‘기억’과 ‘물질’은 다르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구두 혹은 한 사람(물질)이 있고, 우리가 그것을 ‘기억’한다고 해 봐요. ‘그 사람은 정말 무례한 사람이었어’ ‘그 구두는 진짜 섹시했어’ 이 ‘기억’은 지극히 주관적인 성격을 갖죠. 즉, 그 ‘기억’은 실재 ‘물질’(사람·구두)과 아무런 상관이 없죠. 이는 그 사람의 주관적인 ‘기억’에 의해 ‘지각’된 것일 뿐이잖아요. 즉,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본다는 건, ‘기억’이 아닌 ‘물질’을 본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물질’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기억의 문제의 핵심적 중요성이 나온다. 기억이 특히 지각에 주관적 성격을 전한다면, 물질에 관한 철학이 우선 목표로 해야 할 것은 기억의 지분을 제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이 덧붙일 것이다. 순수 지각은 우리에게 물질의 전체 또는 적어도 물질의 본질적인 것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리고 나머지는 기억으로부터 와서 물질에 첨가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억은 원리적으로 물질과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힘이 되어야만 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있는 그대로의 ‘물질’을 보려면 ‘순수 지각’이 필요하죠. 달리 말해, “기억의 지분을 제거”해야 해요. “물질에 관한 철학” 즉,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있는 그대로의 구두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 싶다면, “우선 목표로 해야 할 것은 기억의 지분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기억’은 ‘물질’(사람·구두)에 첨가되어 그 ‘물질’을 왜곡된 채로 ‘지각’하게 만드니까요. 오직 ‘순수 지각’만이 우리에게 “물질(사람·구두)의 전체 또는 적어도 물질의 본질적인 것을 제공”합니다.
편견 없이 세상을 보는 법
‘지각’이라는 과정을 통해 ‘기억’과 ‘물질’은 섞이죠. 그래서 ‘물질’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물질’과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힘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쉽게 말해,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사실 그 사람과 아무 상관이 없고, 그 구두에 대한 ‘기억’은 실재 그 구두와 아무 상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에요.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요.
“기억의 지분을 제거한다.” 이 말을 실재 그 사람 혹은 구두에 관련된 기억을 지운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돼요. ‘기억’과 ‘물질’이 원리적으로 서로 독립된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의미인 거죠, 사과가 먹음직스럽게 ‘지각’된다고 해서, 사과가 누군가에게 먹히기 위해 존재하는 ‘물질’인 것은 아니죠. 사과가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내가 사과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사과(물질)에 첨가되어 ‘지각’되었기 때문일 뿐이잖아요.
어떻게 있는 그대로의 사과를 ‘지각’할 수 있을까요? ‘기억(맛있는 사과)’이 ‘물질’(사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됩니다. 그럴 수 있다면, 먹음직스러운(혹은 알러즈를 유발하는) 사과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과, 즉 새로운 식물이 될 씨앗을 품은 열매라는 사실을 ‘지각’할 수 있게 되겠죠.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한 사람을 오해하거나 편견을 갖는 이유가 뭔가요? ‘기억’이 곧 ‘물질(그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 아닌가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그 사람은 무례해’ ‘그 사람은 친절해’라고 판단하는 것 아닌가요?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물질)은 무례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은 사람이에요. 특정한 상황과 조건 아래서 그 사람(물질)을 만났기(접촉했기) 때문에 그렇게 친절 혹은 무례하게 ‘지각’되는 것일 뿐이죠.
삶의 진실이 그렇잖아요. 똑같은 사람도 직장에서 만나면 지독히 이기적이고 무례한 사람이지만, 가정이나 동호회에서 만나면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일 수 있잖아요. 우리의 ‘기억’이 그 사람(물질)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 때, 조금씩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을 볼 수 있게 될 거예요.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자유롭고 싶다면, ‘기억’과 ‘물질’이 서로 독립된 힘이라는 사실을 늘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