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선생보다 훌륭한 학생을 만나다.

한입씩 떠먹는 생활철학, 후기

류승완 감독을 좋아한다. 


그가 만드는 영화 스타일이 좋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가 가진 진솔함과 유쾌함이 좋아서이기도 하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그의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작품성을 높이 평가 받았다는 질문에 이리 답했다. ‘평론가들이 엔딩 장면에 흐릿하고 역광 같은 게 들어온 것이 깊은 메시지를 주는 것다고 했는데, 사실 그거 필름 살 돈이 없어서 재촬영을 못해서 그런 거거든요’ 그 인터뷰를 보고 한참을 웃었다. 어떻게 류승완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진솔함과 유쾌함을 가진 이를.    

 

 홍대에 있는 상상마당이라는 곳에서 철학 수업을 진행했다. 담당자가 수업을 들었던 분이 정성스런 후기를 남겨주셨다고 그 내용을 메일로 보내왔다. ‘한 입씩 떠먹는 생활철학 수업의 좋았던 점’이란 질문에 이리 답해주셨다. 

“무엇보다도 철학이 일상 속에 스며들어왔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행태의 변화가 아니라 보지 못하였거나 보려하지 않았던 것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혹은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일상'의 민낯을 자연스럽게 들춰볼 수 있게 된 앎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무지의 고정관념을 거두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지라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아무것도 없는 상태인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무지함으로 고정관념을 만들고 벽을 만들어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시간에는 이 고정관념들과 벽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무지의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일상이 의식으로 전환되는 철학의 스며듦이라고 조심스레 말해 봅니다.”     

 

 후기를 다 읽고 류승완 감독이 생각났다. 내가 수업 시간에 저런 걸 가르쳐드렸던가? 그저 조금의 철학적 지식에 나의 철학에 대한 주관을 진솔하게 표현했을 뿐인데. 필름 없어서 재촬영을 하지 못해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정도의 ‘재수’는 아니었지만, 분명 ‘재수’가 좋았다. 가르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학생을 만날 수 있었던 재수. 분명 내 수업이 그 학생이 깨달았던 것만큼을 줄 수 있는 수업은 아니었으니까. 가르친 것보다 많이 배울 수 있는, 선생보다 훌륭한 학생을 만나는 ‘재수’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다음에 그 학생을 만나게 되면, 말해주어야겠다. “그 수업, 누군가에게 철학적 깨달음을 주려고 했다는 건 핑계고, 사실은 글쟁이가 먹고 살기 힘들어서 시작한 거예요” 나 역시, 류승완처럼 그렇게 진솔하고 유쾌한 철학자이자, 글쟁이가 되고 싶다.        


뮤즈, 땡큐

작가의 이전글 [철학걸음마떼기] 라캉과 정신의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