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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무책임하게 삽니다.

인생 졸라 마이웨이


직장인, 전업 작가, 프로복서, 철학자 


이 네 가지 삶이 한 사람의 것이라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략, “야매 아니면 사이비네!”다. 그렇다. 나는 야매이거나 사이비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에서 7년을 일했다. 답답했고, 우울했다. 넘쳐나는 퇴사 스토리처럼 나 역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사표를 썼다. 넘쳐나는 퇴사 스토리와 다른 게 있다면, 사표를 던진 뒤 이직을 한 것도, 대학원을 간 것도, 창업을 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글을 쓰고 싶었다. ‘나’라는 사람이 여기 있다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래서 작가가 되었다.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었다. 몇 권의 책을 내고 알게 되었다. 좋은 글은 컴퓨터로 쓰는 게 아니라 삶으로 쓰는 거란 걸. 용기를 내어 진짜 삶을 살아낼 때, 비로소 좋은 글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진짜 삶이란 건, 미뤄 두었던 혹은 숨겨두었던 꿈에 다가서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콤플렉스처럼 들러붙어있던 꿈이 있었다. 프로복서. 반 백수 글쟁이가 남는 게 시간 아닌가? 그날로 체육관으로 갔고 1년 6개월 뒤, 프로복서가 되어 데뷔전을 가졌다.      



 직장인이었던 시간, 프로복서였던 시간, 그리고 작가였던 시간 동안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이해되지 않았던 철학자들의 이야기가 이해되었다. 철학 책 안에서 죽어 있던 텍스트는 내 삶으로 되살아났다. 난해해서 이해되지 않았던 글이 이해되는 경험, 이해했던 글이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재해석되는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좋은 글은 삶으로 쓰는 글이고 그런 글은 필연적으로 철학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그렇게 철학자가 되어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잡스러운 내 인생이, 나는 좋다. 행복하다. 하지만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진리처럼 떠받들어지는 세상에 나의 행복은 이상해 보였나보다. 직장을 그만 둘 때 어머니는 내게 “귀신이 씌였으니 굿을 해야 한다”고 말했고, 직장을 그만두고 살아가는 내 모습에 친구들은 “너는 정체가 뭐냐?”라고 타박했다. 안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그들은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근히 묻는다. “너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니야?” 


 이해도 된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없다’는 학습된 믿음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내 삶은 분명 무책임하다. 그뿐인가? 조금 있으면 내 나이 마흔이다. 아이가 둘이다. 그 중 한 놈은 내년이면 학교엘 간다. 이런 처지에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글 쓴다고, 복싱을 한다고, 철학을 공부한다고 말하고 다니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무책임’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 때 ‘나는 무책임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 번뿐인 인생을 제대로 살고 싶은 거야’라고 강변하고 다녔다.         



 하지만 요즘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세상 사람들의 무책임하다는 타박에 이렇게 답해준다. “당신은 무책임할 용기가 있나요?” 세상의 시선에, 자본의 논리에 속박되어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지금 우리네 모습 아니던가. 그 집요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무책임하게 살 용기. 생각해보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책임감 속에서 산다. 세상이 요구하는 질서를 조금이라도 거부하면 무책임하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과도한 책임감을 부여하면서 서로를 서로의 감옥에 가두고 있다.


 직장인 대신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부모는 말한다. “넌 왜 그리 무책임하니?” 질식할 것 같은 직장을 떠나고 싶다는 이야기에 배우자는 말한다. “당신은 왜 그리 무책임해요?” 돈을 조금 적게 벌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이야기에 친구들은 말한다. “그건 무책임한 거야” 우리는 책임감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불행한 삶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행복한 삶의 슬로건은 ‘인생 졸라 마이웨이’다. 이 슬로건을 집요하게 방해하는 것이 바로 ‘책임감’이다. 그래서 ‘인생 졸라 마이웨이’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무책임할 용기가 필요하다. 오직 자신이니까 살 수 있는 삶을 살아낼 용기 말이다. 그래도 책임감 있는 삶을 살고 싶다면, 돌아볼 일이다. 진짜 책임감이 무엇인지? 진짜 책임감은 타인의 시선에, 자본의 논리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행복을 찾고 그 행복을 기꺼이 누리면서 사는 일이다. 그것이 진짜 책임감 아닐까?


 누군가 보기에 잡스러운 삶이, 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부심이다. 지금처럼 타인의 시선에 자본의 논리에 갇혀 사는 세상에 어떤 이가 나처럼 무책임하게 살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아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나야 말로 세상에서 누구보다 더 책임감 있는 인간이다. 그런 믿음으로 오늘도 난, ‘인생 졸라 마이웨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내어보자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졸라 마이웨이를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 길을 걸어 가보니 알겠다. 얼마나 행복한지. 물론 때로 고되고 외롭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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