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은 본능이다.
복싱은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운동이다. 복싱은 근본적으로 때리고 피하는 반응 아닌가? 이보다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일도 없다. 누군가를 때리거나 피하는 일은 따로 공부하거나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복싱은 본능대로 해야 한다. 그런데 복싱 초심자들에게 “본능대로 해”고 말하면 어떻게 싸울까?
십중팔구 길거리 막싸움이 된다. 상대방이 주먹을 휘두를 때 멀리 도망가고, 자신이 공격해야 할 때는 허리를 숙이고, 두 팔을 허공에 마구 휘두르게 마련이다. 이는 본능적인 일이다. 누군가 우리를 때리려고 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최대한 멀리 도망가고 싶다. 또 누군가를 때리려 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최대한 동작을 크게 해서 때리고 싶다.
복싱을 해본 이들은 알겠지만, 이러한 본능은 복싱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본능적인 움직임으로는 상대를 때리기는커녕 신나게 얻어터지기 일쑤다. 그런데 이는 의아한 일 아닌가? 복싱은 분명 본능적인 운동이다. 그런데 본능대로 하면 복싱을 잘할 수 없게 된다.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슥빡’을 잘 쓰려면
복서에게는 두 가지 본능이 있다. ‘주어진 본능’과 ‘훈련된 본능’이다. ‘슥빡’이라는 기술을 예로 설명해 보자. ‘슥빡’은 상대 주먹을 (더킹이나 스웨이로) 피한 다음 곧장 상대를 때리는 기술이다. 이 ‘슥빡’은 본능적이어야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상대방 주먹이 나올 때 그것을 피한다. 그리고 주먹을 내어 상대 때린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움직이면 ‘슥빡’은 평생 쓸 수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미 ‘슥빡’을 칠 수 있는 타이밍은 지나가 버린 후이기 때문이다.
‘슥빡’을 쓰려면, 말 그대로 ‘슥-빡’이 되어야 한다. 상대방의 주먹이 나오는 순간에 본능적으로 ‘슥’ 빠졌다 ‘빡’ 때려야 한다. 복싱 초심자들에게 본능적으로 싸우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이 ‘슥빡’은 쓸 수 없다. 왜 그런가? 초심자들은 ‘주어진 본능’만 있을 뿐, ‘훈련된 본능’이 없기 때문이다.
‘슥빡’은 핵심은 ‘슥’에 있다. 쉽게 말해, 상대의 주먹을 간발의 차이로 ‘슥’ 피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의 주먹을 피하는 거의 동시에 상대를 ‘빡’ 때릴 수 있다. 그런데 초심자들은 이런 동작을 본능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초심자들에게는 상대의 주먹이 날아올 때, 최대한 안전하게 충분히 멀리 도망가려는 ‘주어진 본능’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주어진 본능’으로는 길거리 막싸움만을 반복하게 될 뿐, 복싱을 잘하는 일은 요원하다.
복싱은 ‘훈련된 본능’을 몸에 익히는 수행의 과정이다.
복싱을 잘하려면 ‘주어진 본능’ 너머의 본능을 장착해야 한다. 상대의 주먹이 날아올 때 본능적으로 반응하지만, 그 주먹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할 수 있는 본능이 필요하다. 상대를 때려야 할 순간에 본능적으로 반응하지만, 최대한 간결하게 주먹을 낼 수 있는 본능이 필요하다. 이는 꾸준히 연습해서 몸에 익혀야만 하는 ‘훈련된 본능’이다. 바로 이것이 복싱에서 필요한 본능이다.
인간은 누구나 ‘주어진 본능’이 있다. 누군가가 우리를 때리려고 하면 최대한 멀리 도망가려는, 우리가 누군가를 때리고 싶을 때 최대한 동작을 크게 해서 때리고 싶은 ‘주어진 본능’이 있다. 그런데 복싱을 잘하려면 이 ‘주어진 본능’을 넘어서서 ‘훈련된 본능’을 몸에 새겨야 한다. 누군가 우리를 때리려 할 때 간발의 차이로 피할 수 있는, 우리가 누군가를 때리려 할 때 최대한 간결한 동작으로 때릴 수 있는 본능을 몸에 새겨야 한다.
복싱은 역설적인 운동이다. 본능대로 하기 위해서 본능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달려들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게 마련이다. 상대의 주먹이 날아올 때 본능적으로 눈이 감기게 마련이다. 상대를 때리려 할 때 본능적으로 동작이 커지게 마련이다. 이는 모두 ‘주어진 본능’이고, 이를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면, 복싱을 잘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복싱에서 필요한 본능은 ‘훈련된 본능’이다. 이는 ‘주어진 본능’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지난하고 고된 훈련으로 몸에 익히게 되는 새로운 본능이다. 복싱을 잘하고 싶다면, ‘주어진 본능’을 넘어서서 ‘훈련된 본능’을 익혀야 한다. 상대의 주먹을 끝까지 볼 수 있는, 상대의 주먹을 간발의 차이로 피할 수 있는, 간결하게 상대를 때릴 수 있는 ‘훈련된 본능’ 말이다. 복싱은 ‘주어진 본능’을 넘어 ‘훈련된 본능’을 몸에 새기는 수행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행복은 본능적이며 원초적인 삶에 있다.
이러한 복싱은 ‘링’ 위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삶’에서도 필요하다. 행복한 삶은 무엇인가? 본능적이며 원초적 삶이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의 기초이다. 그런데 의아하지 않은가? 실제 삶을 살펴보라. 본능적이며 원초적으로 사는 이들은 더 불행해지는 경우는 일반적이지 않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고 남의 것을 뺏는 범죄자나 일하는 것이 싫다고 아무 곳에서 먹고 자는 노숙자의 삶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왜 삶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링 위에서와 마찬가지다. 본능대로 살 때의 본능이 ‘주어진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금욕주의적 삶의 태도를 갖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본능적으로 살면 삶이 파괴될 것 같기에 본능을 외면하고 억압하며 금욕주의적으로 살게 된다. 이것이 금욕주의의 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논리다. 그런데 이 역시 불행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말처럼 “억압된 것은 반드시 되돌아온다.” 심지어 몇 곱절만큼 커진 채로 되돌아오지 않던가. 요요현상을 생각해 보라. 먹고 싶은 음식을 참으면, 그 욕망을 몇 곱절만큼 더 커져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차라리 애초에 본능(식욕)을 억압하지 않았다면 60kg이었을 일이, 본능을 억압했기에 90kg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삶에서 더 큰 불행은 늘 이런 식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삶이라는 지독한 모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복싱을 잘하려면 ‘주어진 본능’ 너머 ‘훈련된 본능’이 필요하듯, 삶을 잘 살려고 해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본성’ 너머 ‘수행된 본성’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욕구와 욕망이 있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이는 그 사람에게 ‘주어진 본성’이다. 이 ‘주어진 본성’을 따르는 삶이 행복한 삶의 기초이다. ‘주어진 본성’을 외면하고 억압하고서 행복한 삶은 애초에 요원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주어진 본성’만 따라 산다면, 행복한 삶은 곧 불행한 삶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네 삶의 근본적인 문제 아닌가? 우리는 행복한 삶을 위해 본성대로 살고 싶지만, 그 본성대로 살다 보면 불행해지는 지독한 모순 속에 놓여 있다. 술과 담배, 달고 짜고 기름진 음식을 마음껏 즐기며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살면 온갖 삶의 문제가 다시 우리를 덮쳐오게 마련이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삶의 모순이자, 근본적인 문제다.
이 지독한 모순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 가장 먼저, (욕구와 욕망의 중추인) 본성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본성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 본성이 ‘주어진 본성’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수행된 본성’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주어진 본성’도 있지만,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 아닌가? 개는 개로서 ‘주어진 본성’을 따르다 개로 죽지만 인간은 다르다.
‘주어진 본성’ 넘어 ‘수행된 본성’으로
인간은 새로운 본성을 만들 수 있다. 특정한 행동을 반복해서 그것이 습관이 되어 몸에 완전히 체화되면, 그것은 새로운 본성이 된다. 이 본성이 바로 ‘수행된 본성’이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란 바로 이 ‘수행된 본성’을 따르는 삶이다. 욕구와 욕망을 따르지만, 불행의 길로 접어들지 않고 더 큰 행복으로 나아가는 삶은 오직 ‘수행된 본성’을 마련한 이들만이 이를 수 있는 삶이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은 ‘주어진 본성’을 무분별하게 따르는 삶도, ‘주어진 본성’을 무작정 억압하는 삶도 아니다. 새로운 본성, 즉 ‘수행된 본성’을 몸에 새겨 그것을 따르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일까? 술과 담배를 참고 삶이 아니라 차와 산책을 즐기는 삶이다. 달고 짜고 기름진 음식을 참는 삶이 아니라 신선하고 담백한 자연적인 음식을 즐기는 삶이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란 자연스러운 삶이다. ‘주어진(혹은 왜곡된) 본성’을 억압하는 삶이 아니라, 새로운 본성(욕구·욕망)을 생성시켜 그것을 충족하며 사는 삶이다. 문제는 그러한 새로운 본성을 몸에 익히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긴 시간 담배와 술, 달고 짜고 기름진 음식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던 이가 차와 산책, 슴슴하고 단백한 자연식에서 행복을 느끼게 되는 일은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진정한 쾌락주의란?
그래서 우리에게는 저마다 ‘복싱’이 필요하다. ‘링’ 위에서 잘 싸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어진 본능’을 넘어 ‘훈련된 본능’을 익히기 위해 매일 고되게 땀을 흘려야 한다. 처음엔 잘 안되더라도, 상대가 달려들 때 물러서지 않는 연습, 상대의 주먹이 날아올 때 눈을 감지 않는 연습, 상대를 때리고 싶을 때 주먹을 크게 휘두르지 않고 간결하게 때리는 연습을 해야 꾸준히 해야 한다. ‘훈련된 본능’이 몸에 새겨질 때까지.
‘삶’을 잘 살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주어진(혹은 왜곡된) 본성’을 넘어 ‘수행된 본성’을 익히기 위해 매일 고되게 애를 써야 한다. 처음엔 잘 안되더라도, 술과 담배 대신 차와 산책을 하는 수행, 달고 짜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는 대신 슴슴하고 담백한 자연식을 먹는 수행을 매일 해야 한다. ‘수행된 본성’이 몸에 새겨질 때까지.
삶의 모순을 뚫고 행복을 원하는가? 욕망을 따르는 시간만큼, 새로운 욕망을 생성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수행이다. 이 수행은 지난하고 고되다. 이는 분명 고통이다. 하지만 그 고통이 언제까지나 고통인 것은 아니다. ‘훈련된 본능’이 몸에 새겨졌을 때 복싱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수행된 본성’이 몸에 새겨졌을 삶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삶을 잘살고 싶다면,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수행된 본성’을 체화해야 한다. 매일 수행하며 주어진 본성을 넘어 새로운 본성을 익혀나가야 한다. 이는 결코 ‘금욕주의’가 아니다. ‘쾌락주의’다. 우리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해 줄 진정한 ‘쾌락주의’다. 진정한 ‘쾌락주의’는 '인간다운 삶'이며 '자연스러운 삶'이다. 매일 수행하는 '인간다운 삶'을 살 때 ‘수행된 본성’이 마련되고, 그 본성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삶'에 이를 때 진정한 쾌락(행복)이 주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