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복서’ 넘어 ‘투사’로
‘아이’와 ‘복서’
‘아이’는 자신의 삶을 위해서 싸우지 않는다. 누가 자신을 대신해 싸워주기를 바라며 언제나 자신의 삶에서 뒤로 물러서 있다. 다들 아닌 체하며 살지만, 세상에 ‘아이’ 같은 어른들이 얼마나 많던가? 누구는 부모의 재산 뒤에, 누구는 직장 뒤에, 누구는 종교 뒤에, 누구는 멘토 뒤에 숨어서 자신의 삶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자신의 삶을 위해 스스로 싸울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이것이 ‘아이’ 같은 어른들이 삶의 이런저런 문제 앞에서 항상 누군가에게 의존하려 하는 이유다. 그 의존조차 여의치 않을 때, 그들은 ‘시간이 없어서 못 했어’라며 변명을 하거나 ‘집만 부자였으면 나도 그 일을 하지’라고 핑계를 대며 산다. 이런 이들은 결코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없다. 그런 ‘아이’ 같은 어른들에게 복싱을 해보라고 권한다.
복싱은 야박한 운동이다. 복싱은 홀로 싸우는 법을 배우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복싱은 링 위에서 나를 대신 싸워줄 사람은 없으며, 어떤 위기 상황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이것을 깨달은 이들은 삶의 문제 앞에서 누군가에게 의존하려 하거나 변명하거나 핑계 대며 살지 않는다. ‘내 삶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 복싱을 진지하게 해본 이들은 이 삶의 진실을 모두 알고 있다. 복싱은 ‘아이’ 같은 어른들이 ‘어른’ 같은 어른이 되는 쓴 보약인 셈이다.
‘이기심’은 성공의 원동력이다.
‘복서’는 자신의 삶을 위해서 스스로 싸우는 법을 아는 이들이다. 그렇다면 ‘아이’를 넘어 ‘복서’가 되면, 삶을 잘살 수 있을까? 이는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복싱뿐만 아니라 성공한 격기 종목 선수들의 공통점이 있다. 이기심利己心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룬 선수들은 다들 이기적인 면이 있다. 쉽게 말해, 못된 면이 있어야 선수로서 성공할 수 있다. 이는 비난이 아니다.
‘링’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처절한 승부의 세계다. 이 세계에서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지 않는 이는 성공은커녕 생존조차 어렵다. 몸과 몸이 격돌하는 승부의 세계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하려면, 자신의 이익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만 한다. 항상 주변 사람들부터 생각하는 착한 사람은 ‘링’ 위에서 성공하기 어렵다. 복싱에서 이기심은 성공의 원동력인 셈이다. 그런데 이 이기심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격기 종목 선수를 한 명 알고 있다. 그는 선수로서의 커리어도 성공적이었고, 은퇴 이후에는 더 큰 성공을 이루었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는 은퇴 이후에도, 선수 시절 그랬던 것처럼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어떤 난관이 있어도 변명하거나 핑계 대지 않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는 ‘링’ 위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것처럼, ‘삶’에서도 그렇게 싸웠던 셈이다.
그런데 그는 은퇴 이후, 이런저런 구설수에 올랐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선수 시절 오래 함께했던 지도자와 동료들과의 관계를 좋지 못하게 매듭지었기 때문이었다. 일부 주변 사람들은 ‘사람이 변했다’고 그를 비난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링’ 위에서 자신의 이익을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처럼, ‘삶’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일 뿐이다.
그를 향한 비난은 온당치 않다. 심각한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는 악의가 없었을 테다. 선수 시절, 자신을 가장 먼저 생각했기에 선수로서 좋은 업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처럼, 은퇴 이후에도 같은 방식으로 좋은 경력을 만들려고 했던 것일 뿐일 테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선수가 좋은 삶을 산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언제나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싸우는 삶을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아이’와 ‘복서’ 넘어 ‘투사’로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가장 먼저, ‘아이’는 ‘복서’가 되어야 한다. 자신 삶에서 누군가 대신 싸워주기를 바라는 대신 당당하게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복서’에 머무르는 삶 역시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복서’는 누가 자신 대신 싸워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또 그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복서’는 언제나 오직 자신만을 위해 싸운다. ‘아이’는 스스로 싸울 수 없어서 좋은 삶에 이르지 못하지만, ‘복서’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싸우느라 좋은 삶에 이를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이’에서 ‘복서’를 넘어 ‘투사’가 되어야 한다. ‘투사’는 어떤 존재인가? 좋은 사람이다. ‘투사’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도 싸울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와 ‘복서’를 가로질러 왔다. 세상이 무서워서 눈을 감은 ‘아이’처럼 살았던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은 지독히 불안해서 불행했던 시간이었다. 그 불행을 끝내고 싶어서 ‘복서’가 되었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어내며, 두 눈을 부릅뜨고 나 자신을 위해 세상과 싸울 수 있게 되었다.
복싱이 가르쳐준 마지막 가르침
나는 행복해졌을까? ‘아이’로 살았던 시절보다 나아졌지만, ‘복서’의 삶에는 또 다른 불행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 자신만을 위해 싸우느라, 소중한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들을 주었다. 그 시간은 지독히 부끄러워서 불행했던 시간이었다. 다시 찾아온 불행의 시간 속에서 깨달았다. “조금 더 좋은 삶을 살려면, ‘투사’가 되어야 하는구나.”
물론 대단한 ‘독립투사’가 될 생각은 없다. 그럴 깜냥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싸우는 부끄러운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아이’처럼 누군가의 뒤에 숨지 않고, 나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기 위해서 ‘복서’처럼 싸우며 살아갈 테다. 그렇게 자신을 싸우되, 가끔은 타인을 위해서도 싸울 수 있는 ‘투사’가 되고 싶다.
아무런 ‘철학’이 없어서 ‘아이’처럼 살았던 시간을 지나,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철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를 위한 철학을 넘어 ‘너’를 위한 철학을 하며 살고 싶다. 아무것도 쓸 수 없어서 ‘아이’처럼 살았던 시간을 지나,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를 위한 글을 넘어 ‘너’를 위한 글을 쓰며 살고 싶다. 대단한 ‘투사’는 못되더라도, 가끔은 ‘너’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것이 복싱이 내게 가르쳐준 마지막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