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제한 속에서만 가능하다.

『물질과 기억』은 ‘자유’를 향한다.

‘자유-필연’은 대립 관계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자유-필연(운명)’의 관계에 대해서 정리해 봐요. 근대 이후 지금까지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주제가 하나 있죠. ‘자유-필연’의 관계성이에요. 흔히 ‘자유’와 ‘필연’은 대립 관계에 있다고 여기죠. 우리가 ‘자유’롭다면 세계는 ‘필연’(운명)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계가 ‘필연’(운명)적이라면 우리에게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죠. 이것이 베르그손이 해체하려고 했던 세 번째 편견이에요.


자유와 필연의 대립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덜할 것이다. 절대적 필연성은 지속의 연속적 순간들 서로서로의 완벽한 등가성에 의해 표현될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먼저 베르그손은 우주적 질서가 다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봐요. 즉 우주(세계)는 “절대적 필연성으로 이뤄져 있다는 거죠. 그 “절대적 필연성은 지속의 연속적 순간들 서로서로의 완벽한 등가성에 의해 표현”되죠. 이는 어려운 말이 아니죠.


한겨울에는 꽃이 피지 않고, 한여름에는 눈이 오지 않죠. 이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토양·바다·바람 등등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죠. 이처럼 세계의 법칙은 모두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어요. 이런 필연성은 태양과 지구의 공전과 자전이라는 ‘지속’하는 연속적 순간들이 서로 완벽하게 맞물려 떨어지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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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우연’


‘자유’와 ‘필연’에 대한 논의를 더 이어 나가기 위해서 ‘자유’와 ‘우연’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요.


자유란 구체적 자아와 그것이 수행하는 행위의 관계를 일컫는 말이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자유란 (어떤 사람의) 구체적 자아와 그것이 수행하는 행위의 관계”에 의해서 규명된다고 말해요. 그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요? ‘비결정’적 관계죠. 한 사람의 “구체적 자아”가 구두쇠라고 해봐요. 그가 “수행하는 행위”가 돈을 아끼는 행위일 때, 그를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죠. 이는 돈에 의해 ‘결정’된 즉 부자유한 상태일 뿐이죠. 그 구두쇠가 아무런 대가 없이 누군가에게 돈을 줄 때,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죠. 그때 “구체적 자아(구두쇠)와 그것이 수행하는 행위(기부)의 관계”가 비결정적이니까요.


‘자유’는 ‘비결정’성이죠. ‘이미 결정되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다’ 이것이 ‘자유’의 전제잖아요.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자유’는 애초에 존재할 수 없잖아요. ‘비결성’은 어디서 올까요? ‘우연’이죠. ‘필연’적으로 결정되지 않은 ‘우연’적 요소가 있을 때라야, 이미 결정되지 않은 무엇인가가 존재할 수 있죠.


‘우연’은 ‘자유’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죠. (‘필연’적으로 결정되지 않은) ‘우연’적 요소가 있을 때, 비로소 ‘자유(비결정성)’가 성립할 수 있으니까요. 구두쇠가 어떤 ‘우연’적 요소(교통사고, 자녀의 죽음)에 의해서 ‘비결정’적 행위(기부)를 하게 된 상태가 바로 ‘자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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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필연이다.


베르그손은 세계가 “절대적 필연성”을 따른다고 말하죠. 즉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세상에는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들도 분명히 있잖아요. 아침에 출근길에 접촉 사고가 난다거나 지나가는 길에 지갑을 줍는다거나 하는 일들을 생각해 봐요. 이는 ‘필연’이라기보다 ‘우연’에 가깝지 않나요? 세계가 “절대적 필연성” 아래 존재한다면 이런 ‘우연’적인 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자연 흐름의 우연성은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필연과 등가적임에 틀림없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자연 흐름의 우연성은 실질적으로 필연”과 같은 거예요. 쉽게 말해, ‘우연’이 곧 ‘필연’이라는 거죠. 이 형용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교통사고는 ‘우연’으로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이는 사실 “필연과 등가적”인 거예요. 교통사고를 곰곰이 생각해 봐요. 하나의 교통사고는 세계(우주)의 흐름 안에서 “실질적으로 필연” 아닌가요? 교통사고로 귀결될 여러 ‘지속’적 요소(날씨, 교통 체증, 사고 당사자의 조급함…)들이 이미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통사고가 난 거잖아요.


쉽게 말해, 모든 교통사고는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죠. 반대로 어떤 일이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죠. 이처럼 세계는 ‘우연’적인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세계는 “절대적(완벽한) 필연성(부자유)” 아래에 있어요. 다만 우리가 이 “절대적 필연성”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을 뿐인 거죠. 이것이 베르그손의 ‘자유’ 개념의 기본 전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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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자유’의 토대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자유’는 없는 것일까요? 세계의 모든 일이 ‘필연’적으로 이미 다 정해져 있다면, 즉,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자유’는 애초에 없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베르그손은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고 말해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요? 세계가 “절대적 필연성” 아래에 존재하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자유’가 있는 것일까요?


이미 오래된 경험들의 기억에 의해 점점 더 과거를 잘 보존하고 그것을 더 풍부하고 더 새로운 결정 속에서 현재와 유기적으로 조직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세계의 법칙은 이미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어요. 인간 역시 이 세계의 필연성에서 예외적일 수 없죠. 하지만 인간에게는 독특한 힘이 있죠. 바로 ‘기억’이에요. 인간의 정신은 “오래된 경험들의 기억에 의해 점점 더 과거를 잘 보존”할 수 있죠. 그로 인해 인간은 과거를 “더 풍부하고 더 새로운 결정 속에서 현재와 유기적으로 조직”할 수 있죠. 이는 어려운 말이 아니죠.


여름이면 필연적으로 장마가 오죠. 인간은 이러한 필연성을 “오래된 경험들”을 통해서 ‘기억’할 수 있죠. 그 “기억에 의해 점점 더 과거를 잘 보존”할 수 있죠. 인간은 더 잘 보존된 과거 즉 ‘기억’을 통해 장마에 대비하기 위해 수로를 만들 수 있죠. 이처럼 인간은 ‘기억’을 통해서 “더 풍부하고 더 새로운 결정”을 할 수 있죠. 이는 과거를 “현재와 유기적으로 조직”하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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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란 ‘기억’을 통해 ‘필연’의 그물망을 가로지르는 일


이 의식은 더욱 강렬한 삶을 살아가면서 직접적 경험에 의해 자신 현재의 지속 속에 점증하는 수의 외적인 순간들을 응축시키면서 행위들을 창조하는 능력을 증대시킨다. 그 행위들의 내적인 비결정성은 … 그만큼 더 쉽게 필연의 그물망들을 가로질러 통과할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기억’이라는 “의식은 더욱 강렬한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 현재의 지속 속에서” 더 많은 “외적인 순간들을 응축시키면서” 새로운 “행위들을 창조하는 능력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해요. 매년 장마가 온다는 과거 ‘기억’을 통해 수로를 만들게 되면, 인간은 “더욱 강렬한 삶(장마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직접적 경험을 하게 되죠. 인간의 진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죠.


수로를 만들어서 장마의 문제를 해결했다면 이제 댐을 만들어 더 큰 수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잖아요. 이는 (수로를 만든) ‘기억’을 통해 마련된 “자신 현재의 지속 속”에서 더 많은 “수의 외적인 순간들을 응축시키면서” 새로운 행위를 창조하게 되는 상황인 거죠. 바로 이것이 인간의 ‘자유’ 아닌가요?


자유란 “필연의 그물망들을 가로질러 통과”하는 일이에요. ‘기억’은 세계의 필연성 속에서 크고 작은 우연성(비결정성)을 촉발하는 기능을 해요. 인간은 ‘기억’을 통해 촉발된 “내적인 비결정성(수로·댐)”으로 인해 “필연의 그물망(우주적 질서)을 가로질러 통과”할 수 있는 존재죠. 인간은 ‘기억’으로 인해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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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필연’ 속에서 자리 잡고, 그것과 함께 만들어진다.


시간에서 고려되건, 공간에서 고려되건, 자유는 항상 필연 속에 그 깊은 뿌리를 내리고 그것과 함께 내적으로 조직되는 것으로 보인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인간의 “자유는 항상 필연 속에 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어요. 쉽게 말해, 인간의 ‘자유’는 부자유(필연성)로부터 온다는 거죠.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자유하죠. 인간은 세계의 ‘필연’적 법칙 아래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 부자유(필연성) 때문에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의 ‘자유’는 “절대적 필연성”과 “함께 내적으로 조직”돼요. 인간은 매년 찾아오는 장마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죠. 하지만 인간은 수로와 댐을 건설해 장마로부터 일정 정도 ‘자유’를 얻었죠, 이러한 ‘자유’는 장마라는 “절대적 필연성”과 “함께 내적으로 조직”된 자유죠, 이는 달리 말해, 세계의 “절대적 필연성”이 없다면 ‘자유’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하잖아요.


비유하자면, 세계는 레고 같은 거예요. 레고 조각의 모양은 ‘필연’적으로 다 정해져 있잖아요. 하지만 그 정해진 레고 조각으로 우리는 산도, 차도, 집도 ‘자유’롭게 만들 수 있잖아요. 바로 이것이 인간의 ‘자유’에요. 인간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정해진 조건 아래 그 뿌리를 두고, 그 필연성과 함께 내적으로 조직되는 ‘자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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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사실이다.


정신은 물질로부터 지각을 빌려와 거기서 자신의 양분을 이끌어 내고. 자신의 자유를 새긴 운동의 형태로 물질에게 지각을 되돌려준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정신(기억)은 물질(장마)로부터 지각을 빌려”오죠. 장마를 대비해서 수로를 파고 댐을 지어야겠다는 ‘지각’은 장마(물질)로부터 오는 거잖아요.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자유(수로)를 새긴 운동의 형태로 물질(세계)에게 지각을 되돌려”주죠. 인간이 수로를 지으면 그것은 세계의 한 요소로서 자리 잡잖아요. 그리고 다시 “정신은 그 물질(수로)로부터 지각을 빌려 와” 댐을 만들죠. 이는 인간이 다시 “자신의 자유(댐)를 새긴 운동의 형태로 물질(세계)에게 지각을 되돌려” 주는 일이죠.


자유로운 행위는 흐르고 있는 시간에서 일어나지, 흘러간 시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유는 하나의 사실이며,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 중 이보다 더 명확한 것은 없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앙리 베르그손


자유는 “흘러간 시간에서 일어나지” 않아요. 자유는 ‘지속’, 즉 “흐르고 있는 시간에서 일어”나요. 수로를 만들었던 “흘러간 시간”에서 자유는 없죠. 수로를 만들고, 그것을 보고 다시 댐을 만들고 있는 “흐르고 있는 시간”, 즉 ‘지속’에서 자유가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의 자유 역시 마찬가지죠.


돈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나요? 이는 가난했던(부유했던) “흘러간 시간”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아요. 오직 흐르고 있는 시간, 즉 ‘지속’ 속에서만 가능해요. 생존이건, 취미이건, 사랑이건, 어떤 대상에게 빠져 ‘지속’하고 있을 때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위”가 일어나게 되는 거죠.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지속)은 명확한 사실이기 때문에 ‘자유’ 역시 “하나의 사실이며” 이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 중 이보다 더 명확한 것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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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제한 속에서만 가능하다.


자유에 대한 아주 오래된 오해를 바로잡을 시간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자유’를 무제한 상태라고 믿죠. 이 믿음은 진실일까요? 즉 무한한 돈과 무한한 시간이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울까요? 바보 같은 소리죠. 무제한은 ‘자유’가 아니라 ‘무의미’라는 가장 큰 부자유만을 촉발할 뿐이에요.


‘자유’는 오직 엄격한 제한 속에서만 가능해요. 그 엄격한 제한, 즉 부자유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는 거예요. (결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장마라는 엄격한 제한이 없다면, 우리에게 수로와 댐을 만들 수 있는 자유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죠. (결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타자라는 엄격한 제한이 없다면, 우리에게 사랑할 자유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거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는 소유의 대상일 순 있어도 사랑의 대상일 순 없으니까요.


‘자유’란, ‘지속’ 속에서 제한된 조건과 함께 조직되는 거예요. 우리가 ‘지속’ 속에서 장마와 타자를 만날 때 비로소 자유로운 행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것이 삶의 진실이에요.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삶의 진실을 다음과 같은 근사한 말로 표현하죠.


인간은 자신이 필연성에 매여 있음을 자각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의 자유는 필연성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절대 온전히 성공할 수 없는 시도를 통해서만 얻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베르그손이 『물질과 기억』을 통해 끝내 말하고 싶었던 건, 인간의 ‘자유’였는지도 몰라요. ‘물질’과 ‘기억’이 인간의 ‘자유’와 어떤 상관이 있는지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요. ‘물질(장마)’은 과거를 단순히 반복할 뿐이에요. 이때 인간의 ‘정신’은 그 반복되는 과거를 ‘기억’하죠. 바로 이 과거의 ‘기억’이 새로운 미래를 ‘자유’롭게 구성해 낼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 ‘차이’들이 ‘반복’될 때, 우리는 점점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거죠.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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