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몸’은 대립 관계인가?
베르그손은 <요약과 결론> 마지막 부분에서 세 가지 편견에 대해서 다루고 있어요. 그 세 가지 편견은 ‘비연장’적인 것과 ‘연장’적인 것의 대립, ‘질’과 ‘양’의 대립, 그리고 ‘자유’와 ‘필연’의 대립이에요. 베르그손은 이 세 가지 편견을 해체하려고 해요. 즉, ‘비연장-연장’ ‘질-양’, ‘자유-필연’은 이분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거죠.
먼저 첫 번째와 두 번째 편견을 살펴봐요. ‘비연장’적인 것은 ‘비물질(정신)’이고, ‘연장’적인 것은 ‘물질’이죠. 마찬가지로 ‘질’은 ‘의식(정신)’적인 것이고, ‘양’은 ‘운동(물질)’적인 것이죠. 우리는 흔히, ‘비연장’적인 것(정신)과 ‘연장’적인 것(물질)은 다르다고 생각하죠. 또 ‘질’(의식)과 ‘양(운동)’ 역시 다른 것이라고 여기죠. 이는 ‘마음’과 ‘몸’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워요.
‘마음(정신)’은 ‘비연장’(비물질)적이며 ‘질’(의식)적인 것이고, ‘몸’은 ‘연장’(물질)적이며 ‘양’(운동)적인 것이잖아요. ‘마음(정신)’이 바뀌는 것(‘이제 살을 빼겠다!’)은 ‘질’(의식)적인 차원의 변화이고, 몸(물질)이 바뀌는 것(100kg→70kg)은 ‘양’(운동)적인 변화잖아요. 이처럼, 우리는 ‘마음’(비연장·질)과 ‘몸’(연장·양)을 구분하잖아요. 즉, 이 둘을 이분법적 대립 관계로 보죠. 쉽게 말해, ‘마음’은 ‘마음’(정신·의식·질)이고, ‘몸’은 ‘몸’(물질·운동·양)이라고 보는 거죠.
‘펼쳐짐’은 ‘마음-몸’을 동시적이며 연속적인 관계에 놓는다.
베르그손은 (이원론자임에도 불구하고) ‘정신(마음)’과 ‘물질(몸)’를 이분법적 대립 관계로 보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우리는 펼쳐짐이라는 관념에 의해서 비연장적인 것과 연장적인 것의 대립을 제거했듯이, 긴장이라는 관념에 의해서 질과 양의 대립을 제거했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펼쳐짐’과 ‘긴장’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마음’과 ‘몸’의 이분법적 대립 관계를 제거해요. “펼쳐짐이라는 관념에 의해서 비연장적인 것(마음)과 연장적인 것(몸)의 대립”이 제거돼요. 또 “긴장이라는 관념에 의해서 ‘질’(마음)과 ‘양’(몸)의 대립”이 제거돼요. 이 난해한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펼쳐짐’에 대한 논의부터 해봐요. 항상 주눅 들어서 살던 아이가 있어요. 그 아이는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마음(비연장적인 것)’ 먹을 수 있죠. 하지만 그런 ‘마음’과 상관없이 그 아이의 ‘몸’(연장적인 것)은 작은 위험에도 여전히 주눅 들게 될 거예요. 이처럼 ‘마음’과 ‘몸’은 구분되기에 종종 대립 관계에 놓이곤 하죠. 하지만 이런 대립 관계는 ‘펼쳐짐’에 의해서 제거돼요.
‘펼쳐짐’은 ‘기억’의 펼쳐짐을 말하는 거예요. ‘기억’을 하나씩 펼쳐나갈 때 ‘마음’(비연장적인 것)이 변하게 되죠. 항상 주눅 들던 아이가 ‘더 이상 주눅 들어 살고 싶지 않다’고 그냥 ‘마음’ 먹는 것과 항상 주눅 들어 살아오느라 지독히 불행했던 과거 ‘기억’들을 하나씩 떠올리며(펼쳐짐) ‘더 이상 주눅 들어 살고 싶지 않다’고 ‘마음’ 먹는 것은 전혀 다르죠. 전자는 낮은 강도의 ‘마음’이고, 후자는 높은 강도의 ‘마음’이겠죠.
‘기억’의 ‘펼쳐짐’으로 생긴 강도 높은 ‘마음’(비연장적인 것)은 단순히 ‘마음’으로 끝날까요? 결코 그렇지 않죠. 긴 시간 주눅 들며 살았던 ‘기억’을 아프게 펼쳤던 아이의 마음은 모종의 변화를 겪게 되죠. 그 아이는 더 이상 주눅 들어 살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복싱 체육관에서 열심히 훈련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 아이는 곧 당당한 복서의 ‘몸’(물질)으로 ‘연장’되겠죠. 이처럼 ‘펼쳐짐’이라는 관념을 통해서 ‘마음’(비연장)과 ‘몸’(연장)은 대립이 아니라 동시적이며 연속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긴장’은 ‘마음-몸’은 동시적이며 연속적인 관계에 놓는다.
마찬가지로 “긴장이라는 관념” 역시 “질(마음)과 양(몸)의 대립을 제거”하게 돼요. ‘나는 이제 살을 빼겠어!’라고 ‘마음’ 먹었다고 해봐요. 이는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난 ‘질’적인 변화죠. 이는 ‘양’으로 결코 잴 수 없지만, 분명 어떤 ‘질’적 변화가 일어난 거잖아요. 하지만 이런 ‘질’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몸’의 변화, 즉 ‘양’(몸무게)의 변화는 없을 수 있죠. ‘살을 빼겠다’고 ‘마음’ 먹는다고 누구나 살을 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처럼 ‘마음’(질)과 ‘몸’(양)이 일치하지 않고 대립하는 경우는 너무나 흔하죠.
이런 대립은 “긴장이라는 관념”을 통해서 제거됩니다. ‘긴장’은 ‘주의’죠. ‘긴장’하며 산다는 건, 삶에 ‘주의’를 기울이며 사는 거죠. “나는 이제 살을 빼겠어”라고 ‘마음(질)’ 먹어도 ‘몸’무게(양)를 줄이지 못하는 건, 삶의 매 순간 ‘주의’를 기울이며 살지 않기 때문이죠. ‘긴장’하며 ‘주의’를 기울이며 살면 어떻게 될까요?
구체적으로 말해, 일상의 순간마다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먹는지, 또 어느 정도 활동하는지 ‘긴장’하며 ‘주의’를 기울이며 살면 어떻게 될까요? ‘질(마음)’은 곧 ‘양(몸)’이 되죠. 쉽게 말해, 살을 빼겠다는 ‘마음(질)’이 곧 ‘몸’무게(양)의 변화로 이어지게 될 거예요. 이처럼, ‘긴장’이라는 관념을 통해서 ‘마음’과 ‘몸’, 즉 ‘질’과 ‘양’은 대립이 아니라 동시적이며 연속적인 관계에 놓이게 돼요. 이러한 세계의 진실은 한 개인의 삶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에요.
민주적 ‘정신’과 민주적 ‘물질’ 사이에서
2024년 12월 3일, 계엄이라는 이름으로 내란을 획책했던 대통령이 있었죠. 우리는 이 사태를 보면서 얼마나 황망하고 또 분노했던가요? 이 황망함과 분노가 지나간 자리에는 모종의 회의감과 절망감이 찾아오지 않았던가요? 그 회의감과 절망감은 ‘정신’(비연장·질)과 ‘물질’(연장·양)을 대립적 관계로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라요.
민주적 ‘정신’과 민주적 ‘장치(물질)’를 생각해 봐요. 민주주의 ‘정신’은 “비연장(비물질)적인 것”이고 이는 “질”적인 어떤 상태죠. 반면 법과 제도와 같은 민주주의 ‘장치’는 “연장(물질)적인 것”이고 이는 “양”적인 어떤 상태죠. 우리는 민주적 ‘정신’과 민주적 ‘장치’를 구분하죠. 즉 이 둘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고 있었던 건지 몰라요.
우리 사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난과 곡절(독립운동·민주화운동)을 겪으며 민주적 ‘정신’을 이룩했죠. 그리고 그 ‘정신’을 바탕으로 ‘물질’적 민주적 장치(공화국·직선제)를 마련했잖아요. 그런데 이러한 ‘정신’과 ‘물질’ 아래서 독재(반反민주!)를 위해 내란을 획책한 대통령이 등장한 거잖아요. 이 내란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의구심을 품게 된 것인지도 몰라요.
‘민주적 정신과 민주적 장치는 일치되지 않는 것인가?’ 쉽게 말해, ‘민주적 열망(정신)이 아무리 높아도 민주적 장치(물질)는 항상 독재자를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인가?’라는 의구심이 망령처럼 떠나지 않게 된 거죠. 사실 이는 오래된 망령이죠. 과거 우리는 군사 독재(전두환)에 맞서 직선제를 쟁취했죠.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죠. 군사 쿠데타에 가담했던 핵심 인물(노태우)이 대통령으로 다시 당선되었으니까요. 그때 과거 우리는 얼마나 황망하고 분노했을까요? 시간이 지나 그 황망함과 분노는 이내 회의감과 절망감이 되었죠.
‘정신’과 ‘물질’이 동시적이며 연속적인 사회를 위하여
2024년 12월 3일, 황망하고 분노했던 내란 사건이 지나간 자리에 회의감과 절망감이 찾아들었던 건, 역사의 서글픈 반복인지 몰라요. 하지만 좌절할 필요는 없죠. 베르그손의 말처럼 ‘정신’과 ‘물질’은 분명 구별되지만, 그것은 대립이 아니라 동시적이며 연속적인 관계예요. 민주적 ‘정신’과 민주적 ‘장치’는 결코 대립이 아니에요. 만약 그것이 대립하고 있다면, ‘펼쳐짐’과 ‘긴장’의 강도가 약하기 때문일 뿐이죠.
내란을 획책했던 대통령은 왜 등장했을까요? 그것은 우리 사회가 지난 민주화의 ‘기억’을 충분히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며, 민주적인 삶에 대한 ‘긴장’과 ‘주의’가 약했기 때문일 거예요. 이는 뒤집어 말해, 우리가 항상 민주화의 기억을 ‘펼쳐’나가고, 항상 ‘주의’를 기울여 민주적 삶에 대한 ‘긴장’을 놓지 않는다면, ‘정신’(민주적 의식)은 곧 ‘물질’(민주적 체계)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그렇게 ‘정신’과 ‘물질’이 동시적이며 연속적인 사회가 될 때, 다시는 황망하고 분노스러운 ‘내란 사건’은 결코 반복되지 않을 겁니다. 개인적 삶에서 사회적 삶에서도 ‘펼쳐짐’과 ‘긴장’은 중요해요. ‘펼쳐짐’과 ‘긴장’을 통해서만 ‘정신’(마음·시민의식)과 ‘물질’(몸·국가장치)이 더 이상 대립하지 않고 동시적이며 연속적일 수 있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