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사라진 시대
바야흐로, 사랑이 사라진 시대다. 반박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휴일이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그 많은 연인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서로에게 달라붙어 물고 빠는 그 알콩달콩한 연인들은 사랑하는 것 아닌가? 반발심을 잠시 뒤로 하고 처음부터 묻자.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에 대한 정의는 무수히 많다. 그중 가장 간결하면서 가장 확실한 정의가 있다. ‘계산하지 않음’
사랑은 계산하지 않음이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 보라. 부모가 아이에게 맛있는 것을 사줄 때, “아이가 짜장면에 탕수육까지 시키면 내 신발은 못 사겠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아이가 먹는 모습에 흐뭇할 뿐이다. 아이를 보며 어떤 계산도 없기에 가능한 일이다. 계산하지 않기에 늘 덜 준 것 같은 마음. 계산하지 않기에 더 주지 못해 늘 미안한 마음, 그래서 늘 더 주려고 애쓰는 마음. 이것이 사랑이다.
더치페이는 사랑이 아니다.
더치페이를 하는 연인들은 흔하다.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선의를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사랑이 아니다. 더치페이는 본질적으로 계산이기 때문이다. 더치페이는 결국 ‘나도 너한테 부담 주지 않을 테니, 너도 나한테 부담 주지 마’라는 철저한 계산의 논리일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의 행위’를 ‘사랑’ 그 자체라고 믿으려고 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서로 물고 빠는 것이 사랑인가? 그것은 ‘사랑의 행위’이지 ‘사랑의 본질’은 아니다. 사랑의 본질은 ‘계산하지 않음’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계산하지 않고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다. ‘사랑’하면 ‘사랑의 행위’가 따라온다. 즉, 어떤 계산도 하지 않고 만나는 사람은 물고 빨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의 행위’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인 것은 아니다. 즉, 물고 빠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계산하지 않고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 증발해 버린 이유
즐겁게 물고 빨다가, 누가 밥값을 낼 건지 누가 커피값을 낼 건지 계산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서로의 욕구를 합리적으로 충족시켜 주는 ‘거래’일 뿐이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도 좀처럼 계산을 멈추지 못한다. 늘 이해득실을 따져 이익을 얻고 손해 보지 않으려 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 사랑이 증발해 버린 이유일 테다.
이제는 사랑도 계산이라고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더치페이를 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믿게 된 것일 테다. 이것은 얼마나 절망적인 사태인가? 우리는 사랑이 사라진 시대를 산다. 하지만 인간은 사랑하고 또 사랑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그러니 우리는 진지하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안셀무스 ‘이성’과 ‘신앙’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안셀무스에게 들어보자. 안셀무스는 대주교(기독교의 최고 직위)를 지낸 중세의 중요한 신학자이자 철학자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이 질문에 안셀무스는 이렇게 답해줄 테다. “이해해서 믿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믿어라!” 이 의아한 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양의 중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서양의 중세 철학은 ‘이성-신앙’을 연결해 내려는 사유였다. 즉, 고대(그리스‧로마) 철학의 ‘이성’과 종교(기독교)의 ‘신앙’을 연결해 내려는 사유가 중세 철학의 주된 흐름이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로 상징되는 고대(그리스‧로마) 철학은 ‘이성’을 중시했다. 즉, 인간이 직접으로 경험한 것에 대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담론이 주된 흐름이었다. 하지만 고대가 끝나고 시작된 중세는 정반대였다.
중세는 신앙(신)의 시대였다. 즉, (경험이 아닌)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종교적이고 영성적인 담론이 주된 흐름이었다. 그러니 고대와 중세 사이에 ‘이성(경험‧논리)’과 ‘신앙(초월‧영성)’의 마찰과 충돌은 불가피했다. 쉽게 말해, 중세는 “이성적으로 신을 증명해 봐!”라고 말하는 고대적인 사람(철학자)과 “신앙(믿음)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중세적 사람(성직자‧신학자)이 갈등하는 시기였다.
안셀 무스는 ‘이성’과 ‘신앙’ 사이의 충돌과 갈등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래서 ‘이성’과 ‘신앙’에 대해 누구보다 깊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과 ‘신앙’을 중재하지 못한다면, 달리 말해, ‘이성’적인 사유에 익숙한 이들에게 ‘신앙’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종교가 설 자리는 애초에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이성’적이었던 그리스‧로마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와 같은 중세 초기 신학자(기독교 사상가)들은 어쩔 수 없이 ‘이성’과 ‘논리’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를 설득하려면 상대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이에 대한 안셀 무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이성(논리)’적인 ‘신앙’
만일 무無로부터 어떤 것이 만들어졌다면, 바로 이 무가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의 이유였다. 하지만 어떻게 아무런 존재도 가지지 못한 것이 어떤 것을 존재로 이행하도록 돕겠는가? …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창조적인 본질(신)이 모든 것을 무로부터 만들었다. 또는 모든 것이 그를 통해 무로부터 만들어졌다라고 말한다면 모순에 빠지지 않고 이해될 수 있다. 『모놀로기온』 안셀무스
안셀무스는 ‘신은 있다!’고 무조건 윽박지르지 않는다. 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이야기한다. 안셀무스의 논리구조는 간단하다. 먼저 세계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무)로부터 만들어졌다고 가정한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는 꽃‧새‧인간 등등 존재들이 있다. 태초는 무無였는데, 지금은 존재들이 있다有. 즉 ‘없음無’에서 ‘있음有’이 나왔다. 그런데 이는 논리적 모순이다.
무언가(도자기) 있으려면 그것을 있게 할 대상(사람)이든. 재료(흙)든 뭐가 있어야만 한다. ‘없음無’은 말 그대로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 아닌가. 이 상태는 무엇인가를 있게 할 수 없다. 안셀무스는 이 모순을 논리적으로 해명한다. 태초에 어떤 존재가 있으면 된다. 그 태초의 존재, 즉 “창조적인 본질(신)”은 있어야만 한다. (만약 신이 없다면 세계는 계속 무의 상태니까 말이다.)
이제 다양한 존재들이 무로부터 만들어졌고 해도 “모순에 빠지지 않고 이해될 수 있다.” 안셀무스의 논리는 어렵지 않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지금처럼 다양한 것들이 있는 상태가 되려면, 누군가(신)가 그것들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안셀무스의 ‘이성’적 ‘신앙’의 논리다. 안셀무스는 이렇게 ‘이성’적인 유럽인들에게 ‘신앙’을 ‘이성’적으로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긴 시간 ‘이성’과 ‘신앙’을 중재하려던 안셀무스는 결국 ‘신앙’으로 돌아간다. 이에 대해 안셀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앙’적인 ‘이성(논리)’
설명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믿어야 한다. 『모놀로기온』 안셀무스
‘이성’으로 ‘신앙’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결국 불가능한 시도일 수밖에 없다. ‘신앙’은 결국 초월‧영성의 영역이지 ‘이성’ 즉, 경험‧논리의 영역은 아니다. ‘신앙’을 아무리 ‘이성’(경험‧논리)적으로 설득한다고 해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안셀무스는 누구보다 그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설명할 수 없더라도 믿어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파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연구하는 사람은 추론을 통해 그것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인식에 도달했을 때, 비록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존재방식)를 완전히 통찰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만족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이유들과 모순됨 없이 필연적인 증명을 통해 주장되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그것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을지라도, 신앙의 확실성을 덜 부여해서는 안 된다. 『모놀로기온』 안셀무스
안셀무스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발생하더라도 “신앙의 확실성을 덜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신앙’으로 돌아간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이성’과 ‘신앙’을 모두 아우르려고 했던 안셀무스였지만. 그는 결국 성직자이자 신학자였다. 그러니 그에게 근본적인 것은 결국 ‘신앙’일 수밖에 없었다.
‘이성’과 ‘신앙’을 중재하려 했던 안셀무스의 결론은 이렇게 함축할 수 있다.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 즉, ‘신앙’으로 인해 ‘이성’(지성)이 촉발된다는 것이다. 즉 ‘신’을 이성적으로 다 이해하기 때문에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먼저 ‘신’을 믿기 때문에 ‘신’(‘신’이 창조한 세계)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안셀무스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만일 내가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 또한 믿기 때문입니다. 『프로슬로기온』 안셀무스
사랑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사랑할 수 있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이에 대한 안셀무스의 답, “이해해서 믿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믿어라!”의 의미를 이제 알 수 있다. ‘이성’과 ‘신앙’ 사이에서 결국 ‘신앙’으로 돌아간 안셀무스 아닌가. 그런 그가 사랑 역시 이해(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신앙)의 영역으로 파악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셀무스는 진정한 사랑은 이해(이성)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신앙) 것이라고 말한다.
믿지 않는 것을 사랑하거나 희망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 영혼은 최고 본질과 그것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을 믿는 것이 유익한데, 이로써 그것을 믿음에 따라 추구할 수 있게 된다. 『모놀로기온』 안셀무스
안셀무스는 ‘믿지 않는 것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믿음은 사랑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안셀무스가 말한 사랑은 “최고 본질” 즉 ‘신’에 대한 사랑 아닌가?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그런 신앙적인 사랑이 아니다. 내 옆에 있어서 물고 빨 수 있는 한 사람에 대한 일상적 사랑이다. 하지만 종교적 사랑이든, 세속적 사랑이든, 그 본질은 같다.
분명 안셀무스의 사랑은 신앙적인 것이지만,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놀랄 만큼 정확히 꿰뚫고 있다. 이는 사랑의 대상을 ‘신’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바꿔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안셀무스의 이야기는 이렇게 바꿔볼 수 있다. “믿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 믿음은 ‘신’뿐만 아니라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당연하지 않은가. 믿지 못할 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는 없으니까 말이다.
믿음이 있는데 왜 계산하는가?
사랑과 믿음에 대한 상관관계를 더 이야기하기 전에 ‘믿음’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민철’과 ‘수애’의 관계로 이야기해 보자. 둘은 소개팅에서 만나 서로 물고 빠는 연애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둘은 ‘사랑’하는 것일까? 사랑이 ‘계산하지 않음’이라면 둘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둘은 늘 계산적이기 때문이다. 더치페이는 물론이고, 약속 장소나 시간까지 서로 더 큰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계산한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믿음이 없느냐? 아니다. 둘은 서로를 믿는다. 믿지 않는 이와 어떻게 단둘이 여행을 가고 서로의 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 수 있게 해준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제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믿는데 사랑하지 않는(계산적인) 일은 왜 발생한 것일까?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사랑의 전제조건일 뿐, 믿음이 곧 사랑은 아니다. 우리가 믿는 것들 중 사랑하지 않는 것들도 많다. 컴퓨터와 자동차를 믿는다고 해서 그것을 사랑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한 사람’에 관해서는 믿음이 사랑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믿으면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민철’과 ‘수애’는 서로 믿으면서도 왜 사랑(계산하지 않음)이 없는 걸까?
진정한 사랑은 ‘신앙적 믿음’으로만 생성된다.
믿음에는 두 가지 믿음이 있다. 앎 이전의 믿음과 앎 이후의 믿음이다. 전자는 ‘신앙적 믿음’(알기 위해서 믿는다!), 후자는 ‘이성적 믿음’(알아야 믿는다!)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말하는 관계가 전제하는 믿음은 무엇일까? 대체로 후자다. 즉 ‘이성적 믿음’이다. 우리는 아무나 믿지 않는다. 그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이성(경험‧논리)적으로 따진 후에 믿게 된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생긴 후에야 우리는 소위 사랑이라는 것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이성적 믿음’은 역설적으로 불신이기 때문이다. ‘나’ 아닌 ‘한 사람’을 어떻게 완전히 다 알 수 있단 말인가? 안셀무스가 만났던 ‘신’과 우리가 만났던 ‘한 사람’은 다르지 않다. 안셀무스가 어떤 지성으로도 ‘신’을 다 이해할 수 없었듯,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복잡하고 미묘하게 뒤엉킨 삶의 맥락이 만든 ‘한 사람’(타자)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부조리하고 모순되고 때로 광기 어린 모습들이 존재한다. 어떤 이도 ‘한 사람’의 모든 모습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사람’을 알 수 있는 만큼 알게 되고, 그만큼만 믿게 될 수밖에 없다. 이는 뒤집어 말해, 알 수 없는 부분만큼은 불신하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한 사람’을 ‘믿는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계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믿지 못하는 것 앞에서는 항상 나를 보호해야 하니까 말이다.
‘한 사람’을 향한 ‘신앙적 믿음’이 필요한 시간
진정한 사랑, 즉 ‘계산하지 않음’으로 갈 수 있는 믿음은 ‘신앙적 믿음’이다. 이런 신앙적 믿음은 교회에만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세속적이지만 ‘신앙적 믿음’이 있다. 너무나 매혹적인 한 사람을 만났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때 그 사람에 대해서 뭔가를 알려고 하기보다 먼저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다 옳은 말일 것이라고 믿어버리게 되지 않던가? 이는 ‘신앙적 믿음’에 가깝다.
마치 절대적 ‘신’을 믿듯, ‘한 사람’도 그렇게 믿게 될 때가 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그 매혹적인 사람을 알아가게 되고, 비로소 그때 그 사람의 모순과 부조리와 광기조차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싹트게 된다. 이러한 ‘신앙적 믿음’으로 시작된 사랑에 계산은 없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기도 전에 이미 믿어버린 사람 앞에서 어떻게 계산 따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늘 더 주어도 더 못 준 것 같아 미안하고, 늘 더 못 준 것 같은데도 미소를 보내주니 그리도 고맙다. 이것이 사랑이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이해해서 믿으려 하지 말고, 먼저 믿으면 된다. 믿어서 이해되는 순간, 사랑이 시작된다. 물론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테다. ‘나만 손해 보면 어쩌나?’ ‘나만 상처받으면 어쩌나?’하는 이성적 판단이 집요하게 작동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얼마나 엄혹한 세상인가? 모든 사람을 ‘신앙적 믿음’으로 대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맹목적인 믿음이 싹틀 것 같은 매혹적인 ‘한 사람’이 나타났을 때마저 이성적인 믿음을 고수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때는 용기를 내어 ‘신앙적 믿음’으로 뛰어내려야 할 때이다. 절벽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같은 그 한 걸음이 ‘신앙적 믿음’이 되어 우리를 진정한 사랑 앞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이성적인 믿음을 유지하려는 태도로 차가운 이성적 삶을 살 순 있어도, 행복한 지혜가 있는 삶에 도달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