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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할 자유' 마저 없는 사회

우리에게는 '일하지 않을 자유'도 '일할 자유'도 없다.

‘일할 자유’ 역시 없는 사회


우리는 ‘일하지 않을’ 자유가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갖가지 이유로 언제나 일에 파묻혀 지내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쯤해서 반대의 질문을 한 번 해보자. 지금 우리에게 언제든 ‘일할 자유’는 있는 것일까? 한동안 나를 정말 답답하게 했던 질문이다. 우리는 ‘일하지 않을 자유’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일할 자유’ 역시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지금이 조선시대나 북한도 아니고 한국이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으면서 ‘일할 자유’가 없다니 이게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40대 후반의 어떤 철학자가 그런 말을 하더라. 자신은 지금 대학생들을 보면 불쌍하다고. 적어도 자신이 대학을 다닌 80년대에 대학은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고. 그 철학자가 했던 말은 도서관에서 다들 토익 책만 붙들고 사는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조금의 위로라도 주려고 했던 이야기로 생각한다. 소위 386으로 불리는 80년대 학번들은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던 대신 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화염병과 짱돌을 들었어야 했던 세대들이었으니까.


 힘들지 않은 인생은 없지만, 분명 80년 대 학번은 적어도 원하는 책을 읽을 만한 여유는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당시가 한국 경제가 급격하던 팽창하던 시기였고 그로 인해서 일자리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 대학생은 적어도 취업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갖가지 사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공부나 일을 하지 못하고 대기업에 취업을 하게 된 사람을 위로해야 했던, 지금 대학생들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그런 시기였다.     


취준생에게 일할 자유는 없다.     


지금 대학생들은 어떤가? 그들은 사상초유의 취업난에 시달리고 있다. 취업을 위해 학점 관리에 영어공부는 물론이고, 이제는 봉사활동이나 심지어 성형수술마저 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들에게 정말 ‘일할 자유’가 있긴 한 걸까? 누가 감히 그들에게 정말 일할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너무 쉽게 말하더라. "대학생들이 눈만 높아져 대기업만 선호하니까 그런 것 아니냐?"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다. "지금 영세기업, 중소기업의 현실이 어떤지 아느냐?"고. 또 "영세기업이나 중소기업에서 일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나는 운이 좋게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중소기업이나 영세기업 직원들과 자주 일을 했었다. 그들은 언제나 대기업 직원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려야 했다. 중소기업의 급여는 대기업의 급여에 턱없이 모자란 것은 이미 식상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뿐인가? 그 고질적인 갑을 관계 때문에 중소기업의 직원은 대기업 직원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와야 한다. 금요일에 대기업 신입사원이 중소기업 과장에게 일을 던지고 퇴근하면 중소기업 과장은 주말에 출근해서 월요일까지 그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이것이 지금 중소기업의 현실이다.


 나와 함께 일했던 중소기업 직원 중 중학교 동창이 있었다. 그는 사장에게 나와 일하기 힘들다고 말하며 부서를 바꾸었다. 아마 중학교 동창에게서 묘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런 구조적인 상황에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다들 대기업에 목숨을 거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나조차 후배들이 조언을 부탁하면 '악착같이 대기업을 가라!'고 말한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서 누가 감히 ‘일할 자유’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양심적으로 그런 말을 못하겠다. 지금 대학생들에게는 '일할 자유'가 없다.


월급쟁이에게도 일할 자유는 없다.     


이미 취업에 성공한 직장인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직장인들 역시 일하지 않을 자유만큼이나 일할 자유 역시 없다. ‘일하지 않을 자유’를 포기한 채 죽어라 일만 하면 정말 ‘일할 자유’는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마저도 때가 되면 박탈당하게 마련이다. 싱싱한 신입사원들이 밀고 올라오면 노땅 직원들은 그들에게 밀려 일할 자유마저 박탈당하게 된다. 그게 직장이다. 그래도 자영업을 할 자유는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혹자는 성실하기만 하면 뭐든 해서 먹고 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이보다 더한 현실을 모르는 소리도 없다.


 동네 담배 가게, 카페, 빵집, 치킨 집은 이미 거대 자본에 의해 다 잠식 당한지 오래다. 그나마 남은 자영업자들도 서로 경쟁하느라 생계를 유지하기도 버거운 것이 지금 자영업자의 현실이다. 자조적인 우스갯소리로 자영업자들 중 돈 버는 사람은 간판하는 사람들뿐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하도 자영업자들이 자주 망하고 새로 생기니까 그때마다 간판을 만드는 사람만 돈을 번다는 이야기다. 참, 속없이 그저 웃을 수만도 없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자영업자든 누가 그들에게 일할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게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직면한다면, ‘누구에게나 일할 자유가 있다’는 허황된 말을 할 수는 없을 게다. 진실에 직면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일하지 않을 자유’만 없는 것이 아니라 ‘일할 자유도 없다’는 이 암울한 진실 말이다. 


 우선 인정하자. '일하지 않을 자유'도 '일할 자유'도 없는, 그런 서글픈 역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일을 하며 오늘을 살고 있다는 걸. 암울하기는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직면하는 것은 중요하다. 지눌의 말처럼 '우리는 언제나 넘어진 곳을 짚고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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