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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노오력하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일에 관한 자유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노~오력 하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지금 ‘일할 자유’도 ‘일하지 않을 자유’도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서글프고 답답하지만 현실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인생은 한 번 뿐이고, 그 인생이라는 것도 순식간에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을 돌파해야만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려울 것 없다. 간단한 답이 있다. 노력하면 된다. 개인이 노력해서 능력을 쌓아 유능해지면 된다. 쉽게 말하자. 우리 모두 연봉을 한 10억 정도 버는 사람이 되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일할 자유’도 ‘일하지 않을 자유’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어떤가? 그럴듯한가?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자기계발식 논리다. ‘개인이 노력하면 모든 것이 다 된다’는 자기계발의 논리는 우리에게 잠시 그럴듯한 희망을 주지만 이 희망은 명백한 허구다. 또한 허구이기에 폭력이기까지 하다. 물론 자기계발식 논리가 허구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틀린 이야기인 것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들지만, 일에 관한 자유가 없다면,  절반의 책임은 개인에게, 그 나머지 절반의 책임은 사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균형 잡힌 시각일 게다.


 하지만 개인이라는 절반의 책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적어도 지금 시대에서는 말이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자. 요즘 세상에 어디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이 있던가? 다들 각자의 치열한 밥벌이 현장에서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적어도 내가 만나본 사람들은 혹사 수준의 일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 중 나태하고 태만한 사람이라고 여길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죽을 둥 살 둥 모든 것을 다 받쳐 일을 해야 그나마 지금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니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은 나태하고 태만한 개인은 기본적인 생계조차 유지하기 쉽지 않은 시대다. 평범한 대학생, 직장인, 자영업자들에게 일에 관한 자유는 TV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사치스러운 이야기일 뿐이다. 이것은 자기계발식 논리를 받아들여 개인이 노력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런 곤경의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본들 지금의 곤경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구조에 우리가 이미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생이란 시험에서 ‘나’라는 과목만 들입다 파고 ‘우리’란 과목은 포기하고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평균점수가 오르지 않는다고 좌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라는 과목에서 100점 맞으면 뭐하겠나? ‘우리’라는 과목이 0점이면, 평균은 언제나 50점을 넘지 못할 텐데. 이제 다음 시험부터는 ‘우리’라는 과목, 그러니까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해보는 건 어떨까? 그럼 평균 성적이 쑥 올라갈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이란 시험의 평균 성적이 올라간다는 건, 최소한 지금보다는 조금 더 사람답게 일하며 살 수 있다는 말과 동의어일 게다.


사회구조, 그 절반의 책임


일에 관한 자유는 없다. ‘일할 자유’도, ‘일하지 않을 자유’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자유’도 없다. 이런 곤경의 본질적인 책임은 분명 사회구조에 있다. 만약 ‘일할 자유’가 개인의 책임이라면 지금 이 엄청난 취업대란은 대체 왜 발생했다는 말인가. 만약 ‘일하지 않을 자유’가 개인의 책임이라면 그 수많은 명예퇴직자는 다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만약 ‘하고 싶은 일을 할 자유’가 개인의 책임이라면, 잿빛 표정으로 출근을 하는 그 많은 직장인은 대체 다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지금은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일에 관한 자유를 얻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시대다. 그러니 사회구조라는 절반의 책임에 직면해야 할 때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사람답게 일할 수 있는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벌써 걱정이 앞선다. 사회구조적인 이야기는 공허하게 끝을 맺기 십상인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문제는 내가 바뀌면 당장 내일부터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사회구적인 문제는 ‘항상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주체는 ‘나’가 아니라 ‘우리’다. 그래서 사회구적인 문제는 항상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


 지혜로운 누군가가 그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대해 꽤 훌륭한 해법을 제시한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문제 해결 속도가 현저히 느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의 속도가 느린 해법은 늘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결과를 원하는 다수에게는 언제나 공허한 이야기로 치부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 사회구조의 문제를 은폐하고 외면하면서, ‘일단 나부터 살고보자’ 혹은 ‘개인이 노력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식의 자기계발의 담론에 너무 쉽게 빠져 들어 가는 것일 테다.


 언젠가 어느 대학생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을 욕하지만 전 존경해요. 다른 건 몰라도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지금의 자리까지 오직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 낸 거잖아요. 그런 건 정말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회구조라는 맥락을 전혀 읽지 못하고 모든 문제를 철저하게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시키는 자기계발식 논리에 이미 너무 깊이 길들여져 있어서였다.


 하긴 그마저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사회구조의 문제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야’라며 압도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일단 나부터 살고보자’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쩌랴? 또 ‘개인이 노력하면 다 이룰 수 있다’는 믿음마저 없다면 평범한 소시민들은 어떻게 매일 반복되는 그 고단한 일상을 버틸 수 있을까? 정말이지 이해가 된다. 그러니 개인이 노력해서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악착같이 찾아내려고 할 수밖에. 믿고 싶은 것을 믿기 위해서. 설사 그 대상이 온갖 비리로 국민의 혈세를 4대강에 퍼부은 가짜 경제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나’보다 ‘우리’로 문제를 풀자.


맞다.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복잡하고 어렵다. 그래서 해결 속도도 느리다. 하지만 ‘우리’(사회구조적인)의 문제를 은폐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 사회구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옳고 고결한 일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영향력 측면에서 ‘나’(개인)의 문제로 해결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안 될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뜬구름 잡는 이론적인 이야기 말고 일상생활의 예를 들어보자.


 평범한 사람들의 가장 큰 경제적 문제가 뭘까? 단연 집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맞벌이에, 야근까지 불사하며 그리도 빡세게 사는 이유는 사실 발 뻗고 누울 내 집 하나를 장만하기 위해서 아니었던가. 이 주택문제를 ‘나’의 문제로 해결할 수도 있다. 투잡을 뛰고, 맞벌이를 하고, 야근도 마다하지 않으며 그렇게 빡세게 살면 된다. 그렇게 주택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의 문제로 해결할 수도 있다. 지금 부풀려진 집값을 합리적으로 내려줄 의지와 능력이 있는 정치가와 정당을 찾고 그들에게 투표를 하면 된다.


 물론 안다. 정말 잘 안다. 나만 그렇게 한다고 당장 집값이 내려가지 않는다는 거.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를 왜곡 없이 대변해줄 만한 의지와 능력 가진 정당이나 정치가가 거의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정부여당은 부패했고, 여당은 무능하게 짝이 없으니까. 하지만 ‘다 그놈이 그놈인데 투표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고 냉소하지 않고, ‘우리’의 문제에 조금 더 적극적인 사람이 된다면 상황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속도는 느릴지 몰라도 그 영향력은 분명 더 클 것이다. 


 사례가 없다면 믿기 어려운 법이다. 다행스럽게도 몇 번의 사례가 있었다. ‘무슨 지랄을 해도 반값 등록금은 절대 안 된다!’고 다들 말했지만 서울 시장 한 명이 바뀌면서 어느 대학의 등록금이 정말 반값이 되었다. 집값 문제도 그렇게 풀어갈 수 있다. 합리적인 정당, 합리적인 국회의원, 합리적인 대통령이 나온다면, ‘반값 주택’이 현실로 실현되지 못하란 법도 없다. 잊지 말자.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 중 많은 부분이 과거에는 다들 ‘에이, 그게 될 리가 있나!’라고 냉소했던 것이었음을.


 주거 문제는 단순히 주거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주거문제만 해결되어도 우리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사람답게 일하며 살 수 있다. 집값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는 조금 더 손쉽게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일할 자유’를 얻고, 가끔은 멈추어서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일하지 않을 자유’도, 또 ‘하고 싶은 일을 할 자유’도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처한 삶의 문제의 해결책을 ‘나’의 영역에서 찾지 말자. 다들 ‘나’의 영역에서는 충분히 아니 과도하게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나의 문제는 뭘까?’를 묻는 대신 ‘우리의 문제는 뭘까?’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를 묻는 대신 ‘우리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의 문제를 묻고 해결해나갈 때, ‘나’의 삶의 질을 변화시켜줄 제도적 장치가 마련될 게다. 그렇게 하나씩 사회적 안정망이 갖춰질 때 우리는 일에 관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우리’의 문제에 직면하고 각자만의 방식으로 ‘우리’의 문제에 개입할 때, 비로소 ‘개인’의 삶이 달라질 게다. 일과 삶의 문제를 정면돌파할 수 있는 힘은 ‘나’에게 있지 않고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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