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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자본주의는 체제가 아니다. 종교다!

독실한 기독교인 그리고 은행털이범

독실한 기독교인, 그리고 은행털이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있다. 그는 예수 형상을 본뜬 나무 십자가를 가방에 가득 넣고 교회로 가고 있었다. 교회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해주기 위해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한 겨울이라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산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해까지 져서 어쩔 수 없이 근처 동굴에 자리를 잡았다. 너무 추워서 불을 피우고 싶었지만, 근처에는 불을 피울만한 땔감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가방 속에 언뜻 보이는 나무 십자가를 잠시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라며 혼잣말을 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그날 밤의 추위를 견디지 못했다.
은행털이를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한 사람이 있다. 드디어 은행털이에 성공했다. 들고 갔던 가방에 돈을 잔뜩 담아 나왔다.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계획처럼만 되던가. 얼마 도망가지 못해 경찰들이 그를 쫒기 시작했다. 그는 경찰을 피해 산속은 깊은 곳으로 도망을 쳤다. 한 겨울 추위와 무거운 가방 때문에 그는 이내 지쳐버렸다. 근처에 보이는 동굴에 들어갔다. 몸을 녹이고 싶었지만 근처에 땔감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가방 속에 언뜻 보이는 현금 다발을 잠시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라며 혼잣말을 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그날 밤의 추위를 견디지 못했다.

 

 앞의 기독교 신자는 전형적인 종교인이다. 그가 추위에도 불구하고 나무 십자가를 태울 수 없었던 이유는 종교적 믿음 때문이었다. 사회학자 ‘노명우’는 자신의 저서 「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 종교적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자신의 신조와 열정 모두를 그 자체로 목적이자 사고 및 행위의 기준인 어떤 신조에 기꺼이 바치면서 자신을 희생하면, 그것을 우리는 종교적 믿음이라 한다.” 앞의 독실한 기독교인은 바로 그 종교적 믿음 때문에 나무 막대기에서 그것 이상의 가치를 보고 또 그 가치에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던 것이다. 


 은행털이범 역시 마찬가지다. 그에게 종교는 다름 아닌 자본주의다. 그에게 돈은 신이다. 종교인이 절대자를 믿으면서 마음의 안식을 얻고 행복감을 얻었다면, 은행털이범은 돈의 가치를 믿으면서 마음의 안식을 얻고 행복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는 그 추위 속에서도 결코 그 돈다발들을 태워 몸을 따뜻하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종잇조각일 뿐인 지폐에서 그 이상의 가치를 보고 또 그 가치에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던 것이다. 이것 역시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앞의 기독교 신자와 은행털이범은 본질적으로 모두 절실한 종교적 믿음이 있었던 셈이다. 한 사람에게 ‘신’이라는, 또 한 사람에게는 ‘돈’이라는 종교적 믿음 말이다. 


 나는 무신론자다. 하지만 누군가 어떤 절대자를 믿는 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종교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어떤 절대자를 숭배함으로써 마음의 안식이나 행복감을 얻으려는 것 아닌가? 거칠고 힘든 세상에서 따뜻한 위안을 얻고 평온한 안식을 얻을 수 있다면, 종교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믿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차피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혹은 불행하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믿으며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 믿음의 대상이 어떤 절대자가 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부모를 믿든, 돈을 믿든, 신을 믿든 우리는 다들 행복하자고 무엇인가를 악착같이 믿으며 사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믿음의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우리네 삶을 건강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라고 생각한다. 부모든, 신이든, 돈이든 그것에 대한 믿음이 우리네 삶을 불행하게 한다면, 그 믿음은 없는 것만 못한 것이 된다. 같은 맥락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해서 엄동설한에 나무 십자가를 태우지 못할 이유는 없다. 만약 전지전능하며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신이 정말 있다면, 그 역시 추우면 십자가를 태워서 몸을 따뜻하게 하라고 말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자본주의는 체제가 아니다. 종교다!


종교적인 믿음은 때로 우리 삶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도 한다. 사이비 종교 집단에 빠져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파멸의 길로 걸어 들어갔던 사람들을 볼 때 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동시에 ‘혹시 우리 역시 그런 사이비 종교에 빠져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나는 결코 종교를 믿지 않아!’라고 단언했던 사람마저 어느 순간 빠져들게 된 그런 사이비 종교 말이다. 그 사이비 종교는 바로 자본주의다. ‘발터 벤야민’이라는 탁월했던 철학자가 “자본주의는 세속화된 종교”라고 말한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어렸을 때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장롱 제일 밑에서 적금 통장을 꺼내어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던 모습이. 생활의 궁핍함으로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던 날조차 그 적금 통장의 숫자들을 볼 때면, 어김없이 평온하고 온화한 미소가 찾아 들었다. 이것은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믿는 사이비 교주를 보며 모든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환한 미소를 짓게 되는 것과 다르다면 무엇이 얼마나 다른 걸까? 정말 ‘자본주의는 세속화된 종교’다.


 이쯤에서 사회학자 ‘노명우’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종교는 사람들의 ‘걱정’을 건드리고, ‘걱정’을 대신해 ‘구원’을 약속한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현실적 ‘걱정’은 많은 경우 자본주의 법칙에서 유래하는데, ‘걱정’의 원천인 자본주의는 동시에 우리에게 자본주의적 ’구원‘을 약속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일종의 종교적 기능을 한다. “자본주의에서 일종의 종교를 볼 수 있다. 즉 자본주의는 예전에 이른바 종교들이 그 답을 주었던 것과 똑같은 걱정, 고통, 불안을 잠재우는데 핵심적으로 기여한다.”


 ‘발터 벤야민’과 ‘노명우’의 말처럼 자본주의는 분명 종교다. 적어도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는 분명 그렇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과거 종교와 정확히 같은 메커니즘으로 우리의 걱정, 고통, 불안을 야기하고 또 다시 구원을 약속한다. 자본주의는 ‘돈 없으면 사람 취급 받을 것 같아?’라고 걱정,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동시에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며 그 걱정, 불안을 잠재우는 구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아닌가? 우리는 다들 돈만 있으면 우리가 지금 겪는 걱정, 고통, 불안이 눈 녹듯 사라질 것이라 분명하게 믿고 있으니까.


 아, 맞다. 차이가 있다. 종교와 자본주의에 차이가 있긴 하다. 종교는 내세(來世)의 행복,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있을지 없을지 모를 사후의 행복에 대해서 약속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종교는 다르다. 종교의 신이 내세의 행복을 담보한다면, 자본주의라는 종교의 신인 돈은 현세에서 구원을 약속한다. 돈만 많으면 당장 무엇이든 이룰 수 있고,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이점이 종교와 자본주의가 다른 점인 동시에 너무나 매혹적인 점이다.


 어쩌면 자본주의라는 종교에 빠진 사람은 나름 합리적인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있을지 없을지 모를, 행복보다는 비교적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니까. 자본주의는 확실히 종교다. 돈은 분명 그 돈을 써야 의미가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종교를 맹신하는 사람은 돈을 쓰지 않는다. 돈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소비의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까닭이다. 돈이 주는 어떤 구체적 효용성을 따지기보다 돈 그 자체를 맹신하는 것이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그들 역시 그들이 모시는 신의 효용성을 따지기보다 신 그 자체를 맹신하니까. 그리고 그 맹신 속에서 이미 충분히 행복하니까.


 ‘노명우’는 이렇게 말했다. “수전노는 자본주의하에서 가장 종교적인 인물이다. 수전노는 자본주의에게 모든 열정과 의지를 헌납하는 중세 수도사와 같다” 스크루지 영감으로 대변되는 수전노는 자본주의라는 종교의 전형적인 신자다. 그는 많은 돈이 있지만 결코 쓰지 않는다. 언제나 아끼고 또 아끼며 불편하고 고단한 삶을 견뎌 낸다. 더 많은 돈을 벌려고 발버둥을 친다. 돈이 있다는 것 자체로 행복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중세 수도사와 놀랄 만큼 닮아 있다. 중세의 수도사는 철저하게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불편하고 고단한 삶을 견뎌 낸다. 쾌락이나 즐거움은 언제나 내세의 행복을 위해 유예된다. 급기야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로 행복해지는 것이다. 


돈에 관한 생활철학은 여기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에게 자본주의는 체제가 아니다.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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