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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우리는 스크루지 영감과 정말 다른 걸까?

왜 돈을 버는지 정말 알고 있을까?

우리는 스크루지 영감과 정말 다른가?     


어린 시절 스크루지 영감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게다. 우리가 그를 어리석다 여긴 것은 스크루지가 ‘돈’이라는 ‘신’을 섬긴, ‘자본주의’라는 ‘종교’를 맹신했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파악했기 때문일 게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스크루지 영감과 정말 다른 걸까? 어느 날 한 겨울에 5만 원 권 지폐가 가득 든 가방을 가지고 산에서 표류하게 되었다고 가정 해보자. 우리는 그것을 선뜩 태워 추운 겨울에 몸을 데울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게다. 그 5만원 다발을 보면서 우리는 그 종잇조각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볼 테니까. 누군가 구하러 올 때까지 조금만 참으면 좋은 차, 좋은 옷, 좋은 집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행복한 상상 때문에 쉽사리 그 돈다발을 태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역시 그렇게 앞서 말한 은행털이범처럼 그리 얼어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우리 역시 자본주의라는 종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벌써 나만 해도 그렇다. 직장을 그만두고 통장의 잔고 숫자가 줄어 들어가면 딱히 이유 없이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그러다가 인세나 강연료가 들어와서 통장 잔고 숫자가 조금 높아지면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졌다. 돈이라는 신에게 구원받은 것이다. 실제 내 삶에 구체적인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은 전혀 없었다. 단지 통장의 숫자만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던 것일 뿐인데, 그것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했다가 또 행복해지기도 했던 게다. 그러니 왜 돈을 벌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그것을 악착같이 벌려고만 하는 것이다. 그저 돈이 있으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가 종교인데 뭘 어쩌라고? 돈 없이 살 수 있어?” 맞는 말이다. 자본주의가 종교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돈 없이는 살 수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돈 없이 살 수 없는 환경을 충실히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돈을 벌어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자본주의는 종교‘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말해 준다. 


왜 돈을 버는지 정말 알고 있을까? 


우리는 모두 돈을 벌며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왜 돈을 버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돈이라는 신을 떠받드는 자본주의 맹신도들은 ’돈을 왜 버는가?‘라는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마치 독실한 종교인들이 ’신을 왜 믿는가?‘라는 질문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신을 믿는 것처럼. 종교에서 ’왜?‘라는 단어는 금기어다. 믿음에는 근거를 대라는 것은 믿음 없는 자들의 불온한 태도일 뿐이니까.


 하지만 다들 “왜 돈을 버세요?”라는 질문에 나름 대답을 한다.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요.”, “가족들과 알콩달콩하게 잘 지내기 위해서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요.”라고. ‘왜’라는 질문에 나름 답했으니 자본주의는 종교가 아닌 걸까?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한때 자본주의 맹신도였다. 돈만 있으면 삶의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 역시 ‘왜 돈을  버냐?’는 질문에 나름 답했다. 나와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나는 ‘왜 돈을 버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한 것일까? 아니었다. 늘 ‘나와 가족의 행복을 위해 돈을 번다’고 떠들었지만, 그렇게 번 돈으로 아들에게 장난감 하나를 사줄 때도 괜스레 망설여졌다. 또 주말에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는커녕 그 놈의 돈을 더 벌기위해 또 다시 출근을 했다. 습관처럼 행복을 위해 일한다고 말했을 뿐, 나는 그저 돈을 많이 버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돈이 있어야 든든하고 행복하고, 돈이 조금이라도 줄어들면 불안하고 초조했다. 내게 분명 자본주의는 종교였고, 돈은 신이었던 셈이다.


돈을 '신'에서 '하인'으로 끌어 내리자!

     

자본주의가 종교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때 돈이라는 신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삶이 아니라 삶을 위해서 돈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돈,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이 주는 그 가능성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통장의 잔고를 보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그 매혹적인 가능성의 상상에 매몰될 때, 돈은 신이 된다. 돈을 삶의 수단으로 만들어야 한다. 행복한 밥벌이를 하고, 건강한 삶을 살고 싶다면 돈이라는 ‘신’을 ‘하인’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돈을 벌고 또 그것을 써야 할 때 적절히 쓸 수 있어야 한다. 돈이 있으면 막연하게 행복하고, 없으면 또 막연하게 불행해지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돈을 신이 아니라 하인처럼 부리자! 그때 정말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돈이 하인이 되었을 때, 열심히 번 돈으로 기분 좋게 아내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 사줄 수도 있을 것이고, 아이들에게 장난감도 하나 사주고, 짜장면도 한 그릇도 사줄 수 있을 것이다. 또 열심히 돈을 벌어 그리도 가고 싶었던 곳으로 여행도 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돈을 버는 진짜 이유 아니었던가?


 자본주의를 종교로서 받아들이고 있고, 돈이라는 신을 너무 어린 시절부터 내면화해 온 탓에 돈으로부터 자유롭기가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월급날 아내와 아이들에게 선물을 하나 사줄 때도 그저 행복한 마음이라기보다는 ‘이 돈을 안 쓰면 나중에 다른 걸 할 수 있을 텐데’라며 찜찜하고 무거운 마음이 슬며시 찾아 들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그리도 원했던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가서도 마냥 즐겁지 만은 않았던 것이다. ‘이 돈이면 한국에서 다른 걸 더 많이 할 수 있을 텐데’라는 찜찜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까. 서글프게도 우리는 그렇게 자본주의를 종교로 받아들이며 산다.


 돈? 일해서 필요한 만큼 벌자. 동물들도 자기 먹을 것은 알아서 구하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우리가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다. 각자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상황에 맞게 밥벌이를 하자. 하지만 우리, 돈의 노예만은 되지 말자. 사랑하는 사람에게 맛있는 식사를 사주고, 작은 선물을 하나 사주는 것조차 주저하고 망설이게 되는 구질구질한 사람은 되지 말자.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해줄 여행을 떠나는 것조차 망설이게 되는 찌질한 사람은 되지 말자. 그럴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종교다! 돈은 신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돈을 벌어도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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