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8.왜 돈이 없을 때 불안한 걸까?

가난의 기억, 타인의 시선, 불확실한 미래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돈


돈이 없을 때 불안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분명 드물게다. 답답한 직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좋아하는 일은 뒤로 밀어둔 채 당장 돈이 되는 일만 하는 이유도 사실 이미 알고 있다. 돈이 없을 때 어김없이 찾아드는 불안감, 압박감을 견디기가 만만치 않아서다. ‘왜 돈이 없을 때 (혹은 없어져 갈 때) 불안하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계에 위협을 받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옳은 이야기다. 지금처럼 자본주의가 강하게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당장 돈이 없으면 먹을 것도, 입을 옷도 살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돈과 불안의 관계는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볼 문제다. 다들 생계(생존)의 문제 때문에 돈이 없으면 불안하다고 말하지만 조금 이상하다. 지금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거나 입을 옷이 없어 얼어 죽는 사람은 뉴스에 나올 정도로 드문 사건이 되어버린 세상에 아닌가? 돈이 없어서 생계(생존)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분명 우리 사회에 아주 소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대다수는 돈이 없거나 수입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때면, ‘굶어죽으면 어쩌지?’라며 과도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대체 우리는 왜 돈이 없을 때 불안한 걸까? ‘돈이 없을 때 불안한 것은 당연한 것 아니야?’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말자.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가 돈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을 유일한 대안은 오직 더 많은 돈을 버는 것 밖에 없게 되니까. 돈이 없으면 불안한 이유에 대해서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자. 그 진짜 원인을 되짚어 보다보면, 돈이 없을 때의 근거 없고, 막연한 불안을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1. 가난의 기억


중학교 때쯤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늦게 들어오시는 날이 겁났다.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들은 경제적 쪼들림을 겪어야 했다. 어머니는 그런 상황에 대한 짜증과 원망을 하루가 멀다 하고 아버지에게 쏟아 내었다. 고지식한 중년의 경상도 남자가 그 자괴감과 스트레스를 풀 때가 어디 있었을까? 그저 한 번씩 술을 진탕 마시는 것 밖에. 그렇게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고성과 욕설이 오고가는 원색적인 부부 싸움이 났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하며 싸울 때 너무나 무서웠다. 이불 속에서 혼자서 소리 내지 않으려 애를 쓰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었을 때, 알게 되었다. 당시 내가 겪었던 상처들은 오직 나만의 특수하고 개인적인 경험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한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가난에 대한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1997년의 그 사건 모두 겪어내야만 했다. ‘IMF’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1997년, 우리 잘못도 아닌 그 사태의 모든 책임을 고스란히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하루아침에 믿음직스럽고 존경스러운 아버지를 잃어 버렸다. 그에게 남은 아버지는 연이은 취업 실패로 술에 찌든 아버지였다. 집에 가면 온갖 종류의 게임기에 장난감에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부유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자신의 게임기, 장난감, 자전거에 빨간 딱지가 붙는 것을 두려움에 떨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주 운이 좋은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가난의 기억은 구체적인 양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같은 상처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어린 시절 경제적 쪼들림을 겪으면서 받았던 크고 작은 상처들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여지없이 우리 내면에 불안으로 각인된다. 어린 시절 돈이 없을 때 받았던 상처는 어른이 되어도 치유되지 않는다. 그 상처는 무의식에 각인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었지만, 지금 돈이 없어진다면 다시 어린 시절 상처가 반복될 것만 같다. 그 무의식에 각인된 상처를 흔히 트라우마라고 한다. 바로 그 트라우마가 돈이 없을 때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불안의 정체다.


 통장잔고가 줄어들어 갈 때, ’지금 내가 도대체 왜 불안한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 적이 있었다. 이유를 알았다. 그것은 지금 돈이 없어지면 다시 어린 시절처럼 혼자 이불속에서 울며 불안에 떨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 어린 시절 가난의 상처 때문에 나는 돈이 없을 때면 어김없이 불안해졌던 것이다. 투명하게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크고 작은 상처에 지금도 여전히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참 서글픈 일이다.


2. 타인의 시선


때때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가난의 트라우마는 가난 자체뿐만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오기도 한다. 지인 중에 ‘나는 누구도 믿지 않아, 믿을 수 있는 건 돈 뿐이야!’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그는 아내에게까지 자신의 자산 규모를 알려주지 않는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어린 시절 아주 잘살았단다. 하지만 가세가 기울고 나서 친절하고 상냥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싸늘하게 돌변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어린 시절 그런 타인의 이중성에 크게 상처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급기야 사람은 믿을 것이 못되고 오직 돈만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 학창시절 말썽쟁이였던 나는 친구와 놀다가 다른 학교 아이와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곧 학교에 알려졌고 우리 둘은 담임선생에게 불려갔다. 다행히 친구는 약간의 꾸지람을 들은 후 훈방(?)조치 되었다. 안도했다. 나 역시 훈방 조치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황은 나의 기대와 사뭇 달랐다. 부모를 모셔오라고 했다. 부유했던 친구의 부모는 알게 모르게 평소에 담임선생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때 분명히 알게 되었다. 부유하지 못하다는 것은 곧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는 걸.


 우리는 가난이나 혹은 부유하지 못함을 대하는 타인들의 시선에 때문에 크고 작은 상처들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부유한 친구 곁에는 늘 친구가 북적되고, 가난한 혹은 부유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그 북적되는 친구 중에 한 명일 뿐이라는 사실을 어린 시절부터 알게 된다. 세상에 어디 사랑받고 싶지 않은 아이가 있던가? 하지만 부유하지 못한 아이는 오직 부유하지 못하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관심 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했다.


 또 가난한 사람은 오직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의 분명한 혹은 은근한 무시와 냉대를 감내 해야만 했다. 그런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이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떨까? 돈이 없으면 불안해지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게다. 돈이 없을 때 타인들이 우리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알고 있다. 타인의 시선에 자유롭지 못한 우리는 그래서 돈이 없거나 수입이 줄어들 때 한 없이 불안해지는 게다. 돈이 없다면 사랑받지 못하고 무시 받고 냉대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여기기에 불안한 것이다.


3. 신자유주의가 증폭시킨 불확실한 미래


돈이 없을 때 불안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불확실한 미래 때문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그것은 1997년 이전에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사람들은 1997년 이후에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사람들보다 돈이 없을 때의 불안감이 대체로 덜하다는 사실이었다. 한국 사회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1997년 IMF 사태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갈린다. 실제로 IMF에서 살아남아 꽤 긴 시간 직장을 다니고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너무 미래가 불투명하고 불확실해!’라는 것이다. 그들은 1997년 전에는 일이 힘든 경우는 있었어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1997년 이전까지 한국 경제는 지속적으로 그것도 급격하게 성장해오던 시기였다. 술 한 잔 하고 택시를 타려면 ‘따불’ 혹은 ‘따따불’을 외쳐야만 겨우 택시를 잡을 수 있을 만큼 호황 중 호황이었다. 그 시절에는 당장 돈이 없더라도 불안할 이유가 없다. 다음 달이면 안정적인 월급이 나올 것이라는 암묵적인 믿음이 있었으니까. 지금 같은 호황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만 같은 환상에 빠져 지내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경제적 부분에서 만큼은 미래에 대한 불안은 현저히 적었던 게다. 대학을 졸업하면 당연히 취업은 되는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남부럽지 않은 아파트 하나, 승용차 하나 정도는 당연하게 마련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택시 앞에서 ‘따불’을 외치기는커녕 술 한 잔 마시는 것도 택시비가 부담스러워 지하철 시간에 맞춰야 하는 형편이다. 그뿐인가? 취업은 하늘에서 별 따기고, 취업이 되어도 별반 달라지는 것은 없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구정조정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연례행사처럼 일어나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지금 월급을 받고 있다고 해도 언제 잘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항상 떠안고 살 수밖에 없다. 이게 현실이다. 그러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1997년 외환위기가 남긴 사회적 상처는 ‘신자유주의’다. 극단적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 형태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토록 원하는 좋은 직장에 취업을 했다고 해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건 미래의 본질적인 속성이 불확실성이기 때문이기도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밥벌이의 문제를 극단적으로 불확실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돈이 없을 때 불안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돈이 없으면 불안한 이유는 바로 '신자유주의'라는 극단적 자본주의가 증폭시킨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17. 우리는 스크루지 영감과 정말 다른 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