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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국가는 야만이다.

불안을 덜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가 국가다.

불안을 덜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가 국가다.     

“서양(유럽) 사람들의 특징이 행복하지 않으면 나라 탓을 해요. 그런데 아시아 쪽에서는 행복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탓해요. 내가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공부 안했기 때문에 그래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우리(유럽 사람들)는 ‘나는 행복할 수 있는데 나라가 잘못했다’라고 말해요. 그래서 우리는 데모(파업, 시위) 같은 것도 굉장히 많이 해요.”      


 ‘비정상회담’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벨기에 청년, 줄리안이 한 이야기다. 조금 거칠기는 하지만 아주 의미 있는 이야기다. 불안은 근본적으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엄습해 오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돈이 없을 때 불안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막연한 미래에 발생할 수 있을 일들을 돈이 없다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에 돈에 관한 강박적 불안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국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부터 분명히 하자. 미래는 원래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것이다. 또 미래의 불확실성·불안정성은 한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국가라는 공동체가 생기기 전 인간의 삶은 어땠을까? 불안의 연속이었을 게다. 야생동물의 습격, 자연 재해, 옆 부족의 약탈 등등의 돌발 상황은 혼자이거나 소수인 사람들이 어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갖가지 돌발 상황은 여지없이 불안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많은 욕구가 있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욕구 중 하나가 바로 안정을 지향하고자 하는 욕구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그래서 끊임없이 불안을 야기하는 미래를 통제하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다. 바로 이 욕구, 미래의 불안정을 최소화하려는 욕구를 통해 공동체라는 것이 출현했던 게다. 그리고 그 공동체가 최종적으로 진화한 것이 바로 국가라는 형태인 것이다. 국가의 기원에 관한 많은 이론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국가는 혼자 혹은 소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미래의 불안을 덜기 위해 발생한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국가는 대체 왜 존재하는 걸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뭔가 좀 이상하다.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매일 불안감에 시달리며 살고 있으니까. 그 많은 세금을 내고, 거의 무료로 군방의 의무까지 수행하고 있다. 이건 국가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우리의 희생이다. 그렇다면 국가라는 공동체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하나? 부유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생계와 안전에 대한 문제만큼은 걱정하지 않고 살게 해주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국가는 도대체 왜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취업이 안 되어 불안해하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집권 여당의 대표라는 사람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다. 법원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어 생계 문제로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건 원래 사장 맘대로 하는 거야!’라는 이야기만 하고 있다. 그뿐인가? 심지어 생떼 같은 아이들이 바로 눈앞에서 차디찬 바다에 가라앉고 있을 때, 국가는 단 한 명의 아이도 구하지 못했다. 이런 국가를 정말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나라를 위해 세금을 내고, 군대를 가야 하는 걸까? 


 지금 한국이란 국가는 권력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 힘도 돈도 빽도 없는 사람들을 합법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수단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줄리안의 말이 옳다.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데 나라가 잘못해서 우리가 행복할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생존과 생계의 문제 때문에 불안하지 않아야 하는데, 국가의 잘못으로 부당한 불안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하긴 어디 그것이 국가만의 잘못일까? 피 같은 세금을 내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권익을 요구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잘못일지도 모르겠다. 


 정당한 우리의 권익을 요구해야 한다. 거창하게 말하지 말자. 불평불만이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라도 우리가 처해있는 부당함을 외쳐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  4대강을 뒤집어 파느라 말 그대로 혈세를 강바닥에 퍼부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자기 탓을 하라’는 이야기를 했다. 국가를 탓하지 말고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라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에서 느낀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황당함이었다. 남 탓을 하지 말라니, 그게 왜 남 탓인가? 내가 고생해서 번 돈으로 세금을 낸 내 나라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어찌 남 탓인지 나는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르겠다. 경제 대통령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에 아직 나는 멀었나보다.

     

국가는 문명일까? 야만일까?


정부는 소극적이게는 국민의 불안을 방치하고, 적극적이게는 국민의 불안을 조장한다. 신자유주의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워 사회 안정망을 점점 없애가고 있는 것이 바로 정부다. 그렇게 국가는 국민들의 불안을 방치하고 조장한다. 철도를 민영화하고, 의료 산업을 민영화하고, 기본적인 사회 안정을 담보하는 복지를 포퓰리즘이라고 몰아세울 때, 국가는 우리에게 이리 말하고 있는 셈이다. “살길을 각자 알아서 찾아라!”

      

 약자와 소수자를 보듬지 않고 각자 도생하는 시대가 있었다. 언제였을까? 바로 문명화된 공동체가 생기기 전, 무자비한 야만의 시대였다. 강자는 강하다는 이유로 약자를 무자비하고 약탈하고, 다수는 다수라는 이유로 소수를 참혹하게 억압하는 그런 야만의 시대 말이다. 국가가 소수자와 약자를 보듬지 않는다면, 그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국가는 결코 문명의 산물이 아니다. 야만이다.


 누군가는 그리 말할지도 모르겠다. “원래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 아니야?”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다. "그런 야만적인 약육강식의 정글을 만들려고 우리가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사는 것이냐?" 굳이 국가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인간이 처음으로 문명을 만들고 공동체를 만든 이유는 야만적인 약육강식의 논리가 작동하는 정글로부터 인간들끼리 서로 보듬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였다. 진보든 보수든, 좌든 우든, 인간답게 살기를 원하는 모든 인간은 그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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