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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왜 바쁘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을까?

'일하지 않을 자유'는 어떻게 사라졌을까?

‘일하지 않을 자유’는 어떻게 사라졌을까?     


이제 ‘일하지 않을 자유는 어떻게 사라졌을까?’라는 질문에 답해보자. 그건 기본적으로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사회구조가 어느 사이엔가 그렇게 구성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앞서 여행을 좋아했던 후배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 후배가 어느 날 ‘삶은 이런 게 아니야. 내가 일을 하는 이유는 삶을 향유하기 위해서야’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많은 현실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당장 다음 주부터 한 달간 휴가를 내고 브라질 배낭을 여행을 떠났다고 해보자. 그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최악의 경우, 팀장이나 사장에게 찍혀 그 해 정리해고 명단에 이름을 올릴지도 모른다. 아니면 보복성 인사 조치를 당할지도 모르겠다. 설사 운이 좋다고 해도, 바빠 죽겠는데 눈치 없이 한 달씩 팔자 좋게 여행이나 갔다 오는 무책임한 직원으로 낙인찍히는 건 어쩔 수 없다. 비약이 아니다. 직장생황을 할 때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다. 당시 과도한 업무로 역류성 식도염에, 스트레스성 두통까지 건강에 이상이 온 적 있다. 그즈음 팀장에게 일주일만 휴가를 쓰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팀장이 내게 했던 이야기를 통해 우리네 직장이 어떤 곳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일주일 쉴 거면 그냥 사표를 써! 직원들한테 피해주지 말고”     


 문제 본질은 자본주의가 너무 강해졌다는데 있다. 자본주의가 극심해지면서 더 치열하게 경쟁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우리는 낙오하지 않기 위해, 지금의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더, 더,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한 일이다. 같은 값으로 일을 할 사람이 널렸는데, 한 달씩 여행을 가는 무책임한 직원을 굳이 떠안고 가야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일을 하기 위해 ‘일하지 않을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일하지 않을 자유’를 박탈당한 근본적인 이유다.


 생각해보면 참 서글픈 역설이다. 평범한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삶을 향유하기 위해서인데, 정작 삶을 향유하려면 지금 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되니까 말이다. 지금 우리의 일은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 같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는 무조건 앞으로 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으니, 나중에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속페달만 밟으며 앞으로 질주해보자는 상황인 게다. 이것이 우리가 일하는 모습이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를 멈추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사고’가 나거나 ‘연료’가 떨어지거나. 밥벌이라는 자동차에서 ‘사고’와 ‘연료’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고’는 명예퇴직이나 해고가 될 것이고, ‘연료’가 떨어진다는 것은 ‘사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다 결국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을 잃게 되는 것일 테다. 지금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매일 일터로 출근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매일 매일이 정말 아찔한 순간인 것은 아닐까?


바쁘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회     


더욱 심각한 것은 극심한 자본주의가 불러일으킨 과도한 경쟁 만능주의가 이미 우리 깊숙한 곳까지 내면화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는 언젠가부터 바쁘지 않은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가 자본주의가 야기한 무한 경쟁을 얼마나 내면하고 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쁜 일상에 찌들어 정신없이 밥벌이를 하며 사는 사람들이 그리도 원하는 것이 여유로운 삶 아닌가? 그런데 평범한 사람들은 정작 그런 여유로운 삶을 내심 불안해한다. 멀리 갈 것이 없이 불과 몇 년 전까지 바로 내가 그랬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 일해야 하는 삶이 싫어서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모두 쥐어짜서 직장을 겨우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렇게 직장을 그만둔 후에도 여전히 내면화된 자본주의적 태도는 극복하지 못했다. 직장을 그만 둔 후 주변 사람들이 ‘너 요즘 뭐하냐? 너무 한가한 거 아니야?’라는 말에 한 없이 위축되곤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마치 경쟁에서 낙오한 것 같고, 혼자 뒤에 처진 패배자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바쁘지 않은 삶이 창피하게 여겨졌다.


 창피한 고백을 하나 하자. 직장을 그만 두고 난 후 한동안은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괜히 스마트 폰을 만지거나 울리지 않는 전화를 붙잡고 통화를 하는 척 하곤 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내가 예전의 직장인이었을 때처럼 여전히 바쁜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위 사람들에게 증명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정작 그 의미 없는 바쁨이 그리 싫어서 직장을 그만두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왜 그랬던 것일까? 자본주의의 병폐인 과도한 경쟁체제를 내면화했기 때문이었다. ‘경쟁에서 이겨 항상 앞서 가는 것이 훌륭한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불쌍한 패배자다’라는 의식이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니 돈을 많이 번다거나, 유명세를 얻는다거나 하는 결과론적인 성취를 이루어내지 못할 때는 어찌 되었겠나? 당연히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의 모습을 흉내라도 낼 수밖에. 늘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모습이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의 모습이었기에, 직장을 그만두고 한동안 그 모습을 흉내 내며 살았던 게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긍정할 수 없어서.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테다. 우리는 다들 이 안타까운 역설 속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며 살아가고 있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에 점점 지쳐가지만, 정작 그 바쁜 일상을 은근히 동경하게 되어버린 안타까운 역설 말이다. 바쁘지 않음을 창피해하지 않고, 그것을 진정으로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 그것은 자본주의를 내면화하지 않고 자본주의에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드물 것이다.


 이쯤에서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자동차의 이야기로 잠시 돌아갈 필요가 있겠다. 자동차의 존재의 이유가 오직 정신없이 달려 목적지로 우리를 빨리 데려다 주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고’가 나거나 ‘연료’가 떨어지지 않더라도 언제든 원하는 곳에서 멈추어서 서서 여유를 즐기고, 좋은 경치를 향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 또한 분명한 자동차의 존재의 이유다. 밥벌이도 마찬가지다. 정신없이 바쁜 일이 우리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일의 이유인 것은 아니다. 일은 우리가 잠시 멈추어 서서 좋아하는 것을 즐기고 향유할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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