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문제는, 무례함을 정직함으로 혼동하게 될 때 발생한다.
무례함은 유아론적 정서다.
무례함이란 건 기본적으로 유아론적 정서다. 유아론적 정서란 타자(상대)를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변수’로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고정시킬 수 있는 ‘상수’로 여기는 것이다. 다섯 살짜리 아이를 생각해보라. 엄마가 아픈지, 아빠가 피곤한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자신이 갖고 싶은 장난감이 있으면 울고불고 난리를 치지 않던가. 그게 바로 유아론적 정서고, 그 정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이어지는 것이 무례함이다. 타자를 상수로 보는, 유아론적 정서가 바로 무례함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무례함은 친구 사이보다 연인 사이에서 더 잘 발견된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아이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아픈 엄마에게 조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된다. 아이는 알고 있다. 엄마가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걸. 엄마의 사랑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엄마가 아프건 말건 떼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철없는 아이라도 옆집 아줌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쓰지는 않는다.
친구는 타자지만, 옆집 아줌마 같은 타자다. 엄마처럼 언제나 헌신적인 사랑을 주는 타자가 아니다. 친구라는 타자는 ‘변수’다. 친구가 수업 중에 전화를 안 받는다고 느닷없이 화를 내면 어찌 될까? “내가 네 전화를 대기하고 있다가 받아야 되냐?”라며 면박을 줄게다. 그래서 아무리 유아론적 정서를 가진 사람이라도 친구에게는 쉽사리 무례하게 굴지 못하는 것이다. 친구라는 타자는 언제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수’가 아니라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런데 연인이라는 타자는 다르다. 엄마 같은 타자다. 헌신적인 사랑을 줄 것이라 믿는 타자. 그래서 때로 연인이라는 타자를 ‘상수’라고 믿는다. 그 믿음 때문에 “저번에 말했지? 나 혼자 있는 거 싫어한다고!”라며 다시 유아론적인 무례함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무례함은 연인과 연애를 질리게 만든다. 연애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무례함의 원인은 유아론적 정서 때문이다. 자신의 무례함이 미성숙한 태도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 무례함은 어느 정도 극복가능하다. 심각한 문제는, 무례함을 정직함으로 혼동하게 될 때 발생한다.
무례함과 정직함 사이에서
“수업 중에는 전화 받기 곤란할 때가 있어”
“그게 그렇게 어려워? 나는 정직하게 내 모습을 보여줬는데, 넌 그걸 못 받아들이는 구나!”
정직함과 무례함은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상대를 함부로 대하는 것(무례함)과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보이는 것(정직함)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이 둘은 너무 미묘해서 종종 헷갈릴 때가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무례함을 정직함으로 혼동하곤 한다. ‘나는 외동이었고, 어렸을 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서 외로움을 많이 탄다.’고 말하는 것, 어찌 보면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보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보인다는 미명하에 상대를 함부로 대하는 경우는 연애에서 너무나 흔한 일이다.
그렇다면 정직함과 무례함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측면으로 접근하면 이 둘은 점점 더 구분하기 힘들어진다. 무례함은 종종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그러니까 네가 나에게 맞춰!’라는 논리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냄’이 무례함인지 정직함인지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타자라는 논의에 집중해야 한다. 정확히는 타자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무례함과 정직함을 구분하는 방법
무례함은 유아론적 정서다. 즉 타자를 ‘상수’, 언제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을 것이라 믿기에 상대에게 무례할 수 있는 것이다. 친구에게는 불평불만 못하지만, 연인과 엄마에게 그리도 쉽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사람은 언제나 그 자리, 나를 사랑해주는 자리에 있는 ‘상수’로 믿기 때문 아닌가. 무례한 사람 역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지만 그 방식이 폭력적이다. 연인이라는 타자를 ‘상수’로 여기기 때문이다.
정직함은 다르다. 정직함 역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지만 그 방식이 폭력적이지 않다. 정직함은 타자를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변수’로 여기기 때문이다. 정직함이 힘든 이유가 뭘까? 그건 타자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남자 친구에게 아버지가 술주정뱅이라는 이야기를 왜 그리 하기 힘들까? 여자 친구에게 작은 기업에 다닌다고 말하기가 왜 그리 힘들까? 상대가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변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아도 좋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강요하고 있다면, 그건 무례함이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면서 불편하고 힘들고 이런저런 걱정이 된다면, 그건 정직함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과 연애하고 있다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자. 하지만 그 드러냄의 이유를 섬세하게 살펴볼 일이다. 그저 아이처럼 내 감정만 앞세우느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상대의 오해를 감당하는 용기를 내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그 고민 사이에 무례함과 정직함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