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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이별

‘통보하는 이별’, ‘통보받는 이별’, ‘통보 없는 이별’

이별의 세 가지 유형


“우리 헤어지자”
“내가 잘할 게”
“헤어 져”
“너 나 사랑하니?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 (2001년 허진호 감독)의 이별 장면이다. 이별은 언제나 아프다. 느닷없는 사랑 고백이 황홀한 만큼 느닷없는 이별 통보는 잔인하다. 이별은 아프고 두려운 것이기에 깊이 숙고하지 않은 경향이 있다. 마치 죽음이 아프고 두렵기에 그저 외면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인 것처럼 사랑과 이별 역시 그렇다. 잘 살아내려면 죽음을 깊이 숙고 해보아야 하듯이, 잘 사랑하려면 이별을 깊이 숙고해야 한다. 이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자.


 이별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통보하는 이별’, ‘통보받는 이별’, ‘통보 없는 이별’ 하나씩 고민해보자. 먼저 ‘통보하는 이별’부터 말해보자. 상대는 아직 나를 사랑하지만 내 사랑이 식어 이별을 통보하는 것이다. ‘통보 받는 이별’은 그 반대다. 나는 아직 상대를 사랑하지만 상대에게 이별을 통보받는 경우다. ‘통보 없는 이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그렇게 흐지부지하며 사랑이 끝나는 경우다.

    

 세 가지 이별은 사랑이 끝나버린 시점의 차이다.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사랑이 끝나버린 시점의 차이로 인해 세 가지 이별이 구별된다. 연인이었던 둘 중 한 사람의 사랑이 먼저 끝나면 누군가는 통보하고, 누군가는 그 통보를 받을 수밖에 없기에 ‘통보하는 이별’과 ‘통보 받는 이별’이 발생한다. 또 둘의 사랑이 동시에 끝나면 누가 먼저 말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이별하는 ‘통보 없는 이별’이 된다.



‘통보받는 이별’을 준비하기

이별을 피할 수 없다면, 가급적 ‘통보하는 이별’을 하고 싶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느닷없는 이별 통보를 받고 싶지 않다. 이별을 통보 받는 것은 괴롭다. 상대에게 버려졌다는 기분에 자신이 처량하고 불쌍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별에 대처하는 가장 훌륭한 자세는 언제나 ‘통보받는 이별’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왜냐? 사랑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통보하는 이별’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애가 주는 즐거움의 정수는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온전히 느끼는 것이다. 연애를 하는 매순간 둘의 교감이 만들어내는 두근거림, 그리움, 사랑받고 있다는 정서적 충만감 등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다. 이런 연애의 정수를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항상 ‘통보받는 이별’을 감당하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나보다 먼저 상대의 사랑이 식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온전하게 연애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내가 헤어지자고 말하면 했지, 이별 통보는 절대 받지 않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연애의 즐거움을 결코 온전히 누릴 수 없다. 자신과 연인이 만들어내는 순간순간의 그 매혹적인 감정에 충실하기보다 ‘상대가 변심하거나 혹은 사랑이 줄어들지 않았을까?’에 온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 좋은 연애의 절정의 순간은 그렇게 희생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통보하는 이별’의 자세


그렇다면 ‘통보하는 이별’은 잘못된 것이냐? 사랑에도 옳고 그름이 없든, 이별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 쪽의 사랑이 먼저 끝나버릴 수 있다. 그게 잘못은 아니다. 이별을 통보받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아픈 일이겠지만, 사랑이 끝나버린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사랑이 시작된 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니듯 사랑이 끝나버린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통보하는 이별’이 잘못은 아니지만 몇 가지 에티켓은 있다.


 ‘통보하는 이별’에서 가장 중요한 에티켓은 잔인해지는 것이다. ‘통보하는 이별’을 하는 경우,  대체로 상대는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내 사랑이 끝나 이별을 통보해야 한다면, 잔인하게 이별을 말해야 한다. 일말의 미련도 남지 않도록. ‘통보하는 이별’을 말하는 사람 중 애매모호하게 이별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잠시 서로 시간을 갖자” “내 마음이 예전 같지가 않아”라는 식이다.


 이런 식의 애매모호하게 혹은 우유부단하게 이별을 통보하는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상대에게 큰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그 말,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애매모호한 혹은 우유부단한 ‘통보하는 이별’의 이유는 육체적·정서적 결핍의 두려움 때문이다. 이별을 하면 연인과 섹스할 수 없다. 이건 사랑과 별개로 육체적 결핍감을 낳는다. 잔인하게 이별을 말하지 않으므로 여지는 남기는 건, 가끔 만나 섹스를 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제든 섹스할 수 있는 한 사람도 정도는 남겨 놓고 싶은 것이다.



 정서적 결핍감도 마찬가지다. 이별하면 더 이상 사랑받을 수 없다. 이건 사랑과 별개로 정서적 결핍감을 낳는다. 내 사랑은 식었지만, 상대가 나를 여전히 사랑해줄 때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별을 하게 되면, 상대가 주었던 관심과 애정이 단박에 사라진다. 정서적 결핍감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종종 잔인하게 이별을 통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의 애정과 관심이 필요할 때, 언제든 그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을 한 사람 정도는 남겨 놓고 싶은 것이다.


 ‘통보하는 이별’의 경우, 역설적이게도 잔인하지 않음이 가장 잔인하다. 상대가 나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질로, 내가 원할 때 섹스하고, 내가 원할 때 관심 받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 때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이별을 통보할 때 잔인해지자. 불필요하게 더 큰 상처를 줄 필요야 없겠지만, 최소한 자신이 상대에게 돌아갈 수 있는 여지를 없애고, 상대가 나에 대한 미련을 남길 여지 정도는 없애자. 그 정도만큼은 잔인해지자. 그것이 한 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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