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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을 부정하고 있나요?

인도의 두 얼굴, '여유로움'과 '게으름'

인도의 두 얼굴


몇 해 전 인도에 간 적이 있다. 함께 갔던 사람들의 ‘더럽다’, ‘무질서하다’, ‘미개하다’는 투덜거림과 달리, 나는 거기서 묘한 평안함을 느꼈다. 느린 삶, 강요하지 않는 삶, 그래서 묘한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삶이 좋았다. 서울의 빠른 삶, 강요하는 삶, 그래서 기묘한 강박이 느껴지는 삶에 지쳤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일주일을 머물렀다. 나에게 평안함을 주었던 인도의 그 첫 얼굴과는 다른 모습이 보였다.


 ‘게으름’이었다. 느리게 살고, 강요하지 않고 살며, 여유롭게 사는 모습은 좋아보였지만, 늦잠을 자고,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고, 대충 일하는 모습은 싫었다. 인도를 떠날 때쯤 혼자 되뇌었다. “인도는 다 좋은데 사람들이 게으른 건 너무 싫다” 한 참 시간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다. 인도에 두 얼굴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두 얼굴이 있었다는 사실을. 느리게 살고, 강요하지 않으며, 여유롭게 살 수 있었던 건 그네들이 게으르기 때문이며, 게으르기 때문에 느리게 살 수 있고, 강요하지 않으며, 여유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여유로움과 게으름은 다른가?


여유로움과 게으름, 그건 하나의 얼굴이었다. 다만, 나의 내면이 두 자아로 분열되어 있었기에 두 얼굴로 보였을 뿐이다. 상대의 무례한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는 사람을 어떤 이는 ‘소심하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배려심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한 얼굴을 보며 두 개의 모습으로 느낄 수 없었던 건 쪼개진 나의 두 개의 자아 때문이었다. 쪼개진 두 자아는 각각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모습을 찾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 있는 그대로의 인도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


 ‘인도’의 얼굴을 보며 내게 평안함을 주었던 자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건 내 속의 욕망이었다. ‘내 삶의 속도와 리듬을 지키고 살아내고 싶다!’는 그 간절한 욕망. 그리도 바랐던 삶, 그리도 살고 싶었던 삶을 향한 욕망 꿈틀대는 자아가 내 속에 있다. 그 자아 때문에 나는 인도의 얼굴에서 평안함을 느꼈던 게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언제나 정신없이 바쁜 삶, 서로가 서로를 속박하며 강요하는 삶, 강박적 불안이 불시에 찾아드는 삶에 환멸을 느꼈던 것일 테다.



내 속의 또 다른 나

‘인도’의 얼굴에서 게으름을 보며 불편함과 짜증을 불러일으켰던 자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건 수 없이 많은 타자들의 시선이었다. 그 타자는 누구일까? “매일 방구석에 틀어박혀 뭐하는 거니?”라고 말했던 엄마, “게으른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야!”라고 말했던 선생, “부지런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어!”라고 말했던 직장 상사와 사장. 그들의 시선이 내 속에 자리 잡아 하나의 자아가 되었다. 타자들의 시선은 충분히 내면화되었기에 그것은 나의 욕망처럼 느껴진다.


 “나는 게으르게 살고 싶지 않아!” “누구보다 부지런한 사람이 될 거야!”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마치 내 속의 목소리인 것 같다. 이미 내면화되어서 또 하나의 자아로 이미 자리 잡아버렸기에 ‘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지만, 본질적으로 그건 ‘나’가 아니다. 그 자아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기원한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그 자아가 구성해낸 욕망도 근원적으로 우리의 것이 아니다. 타인의 것이다. 인도의 ‘여유로움’이 불편하고 불쾌한 ‘게으름’으로 보였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내 속에 자리 잡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유래한 자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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