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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간절히 바라지만 동시에 너무나 피하고 싶은.

삶의 본질은 게으름이다.

삶의 본질은 게으름

     

영화감독 이창동은 “삶의 본질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 안다. 우리 모두는 한 없이 게으르게 살고 싶다는 걸. 심지어 우리가 ‘가혹’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릴, ‘근면’하고 ‘성실’한 삶을 사는 이유도 결국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서 아니던가. 하지만 동시에 그리도 간절히 원하는 게으름을 부정한다. 게으름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려 한다. 우리의 불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너무나 간절히 원하는 것을 부정하고 멀리함으로써.       


 이제야 긴 시간 부여잡고 있던 하나의 물음에 답할 수 있게 되었다. ‘게으름, 그것을 간절히 바라지만 동시에 왜 그것을 그토록 피하고 싶은 걸까?’ 분열된 두 자아 때문이다. 내 삶의 속도와 리듬을 지키며 살고 싶다는 욕망이 흘러넘치는 자아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기원한 자아. 전자는 게으름이라는 삶의 본질을 긍정하며 다가서게 만든다면, 후자는 게으름을 부정하며 가급적 멀리 떨어지게 만든다. '삶의 본질'이 전자의 자아의 시선에서는 '여유로움'이라는 긍정적 이름을 얻고, 후자의 자아의 시선에서는 ‘게으름’이라는 부정적 이름을 얻는 것일 뿐이다. 

'굿바이 게으름'이 아니라 '웰컴 게으름!'   


그래서 그 이름을 ‘여유로움’으로 하건, ‘게으름’으로 하던 아무 상관이 없다. 중요한 건, 내 삶의 속도와 리듬을 지켜내려는 욕망을 긍정하는 일이다. 진정한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자아를 끈덕지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의 본질인, 게으름을 긍정하며 매일 조금씩이라도 그곳으로 다가설 수 있을 테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내면화된 자아를 구별하고 솎아내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누구나 그렇듯 우리의 내면에는 자신의 욕망과 타자의 욕망이 뒤엉킨 다수의 자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삶의 속도와 리듬이 무엇인지 끈덕지게 묻고, 그것을 삶에서 관철해내려고 애를 쓸 때 게으름을 긍정하며 살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경쾌하고 유쾌하게 살 수 있다. 그때 ‘굿바이 게으름’이라고 외쳤던, 한 때 유행했던 싸구려 자기계발에 속지 않고 삶을 강건하게 살아낼 수 있을 테다.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삶을 강건하게 살아내는 사람의 구호는 ‘굿바이 게으름’이 아니라 ‘웰컴 게으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행복은 삶의 본질에 충실한 것에서 온다. 그러니 충분히 게으르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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