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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친다는 건, 삶을 건드린다는 것.

“To teach is to touch a life”


운전을 하다 어느 어린 집 차를 멍하니 바라봤다. “To teach is to touch a life” 라고 적혀 있었다. 글을 쓰고 수업을 한다. 어느 순간 자괴감이 든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이런 걸 떠들어도 되는 사람일까?”라는 자괴감. 그 자괴감은 부지불식간에 나를 집어삼키고, 동시에 나 자신이 싫어지게 만든다. 바로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앎’으로 ‘삶’을 때우려 했던 선생이 되어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혐오했다. ‘알랭 바디우’의 ‘사랑예찬’을 떠들지만,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해보지 않은 선생을. ‘니체’와 ‘들뢰즈’를 명품 가방처럼 들고 다녔던 선생을. 그들은 대체로 ‘삶’이 두려웠기에 ‘앎’으로 도망친 부류들이었다. 그래서 더 ‘앎’에 집착하게 되었을 게다. 그네들은 ‘앎’에 집착했기에, 학생들의 ‘삶’이 빚어내는 상처와 아픔에 공감하지 못했다. 나는 그게 싫었다. 적게 알더라도 많이 살아내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제대로 살아내는 법을.

     

 수업을 하면서 나는 학생들의 삶에 개입한다. ‘가르친다’는 것은 결국 ‘삶을 건드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제 넘는 짓이란 걸 알지만 그렇게 한다. 이 주제 넘는 짓은 결국 양날 검처럼 나를 향해 돌아온다. “넌 잘 살고 있니?” 이 질문에 머뭇거리게 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정신적 탈진을 겪게 된다. 어느 책 제목처럼, ‘가르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가르친다는 건,  삶을 건드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수업을 쉬고 싶다. 누군가의 삶을 건드리는 일을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이제 알겠다. 시그널이다. 나의 무의식이 나에게 보내는 시그널. ‘앎’을 멈추고 ‘삶’을 정돈하라는 시그널. 가르친다는 것이 누군가의 삶을 건드리는 일이라면, 훌륭한 선생은 먼저 자신의 삶을 잘 정돈해야 한다. 좋은 선생의 시작은 학생의 삶을 비춰주는 호수가 되는 것이다. 선생은 학생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잘 비춰줄 수 있어야 한다.      


 격렬한 파문이 일고 있는 호수는 누구도 비출 수 없다. 오직 잔잔한 호수만이 타자를 비출 수 있다. 나는 지금 묻는다. 나의 호수는 타자를 비출 만큼 잔잔한가? 나는 안다. 좋은 선생의 마지막은 학생의 격렬한 파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걸. 선생의 삶이 잔잔한 호수처럼 정돈되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타자의 삶을 비추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자의 파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함께 진동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삶의 파문이 격심할 때 어찌 타자의 파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를 찾아왔던 어느 분의 깊은 상처 이야기를 다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구토가 날만큼 어지러웠던 적이 있다. 나는 그때 그 분의 감정적 파문에 함께 진동했다. 아무 것도 ‘앎’으로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녀는 ‘삶’을 배웠다고 말해주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 주제넘게 너무 많은 사람을 사랑하려 했기 때문일까? 지금 내 삶은 고요하지 못하다. 그래서 지금은 누군가의 삶을 건드릴 수가 없다. 무엇을 가르칠 수 없다. 지금은 내 삶을 돌볼 때다. 나는 잠시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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