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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우리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실질적인' 부자가 되자!

‘경제적인 부’자? 될 수 있으면 되자!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실질적 부’ 그러니까 가처분시간을 가지려고 해도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최소한의 ‘경제적인 부’ 즉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은 전혀 없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마음껏 쓰라는 말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다. 아니 그것은 돈 없는 우리를 더 열불 나게 하는 헛소리다. 우리는 지금 시간을 쓰는 것도 결국 돈이 있어야 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말한다. ‘되시라!’고. 노력해서 ‘경제적인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시라고 말한다. ‘실질적인 부’를 누리려고 해고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부’는 필요하니까.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다. 지금은 평범한 사람들이 노력한다고, 열심히 산다고 해서 ‘경제적 부’를 원하는 만큼 쌓을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이다. 물론 악착같이 노력하면 ‘경제적인 부’자가 되지 못할 것도 없다. 낮에 일하고, 밤에도 일하고, 주말에도 일하고, 돈 쓸 시간 없이 계속 일만하면 ‘경제적인 부’자가 못될 것도 없다. 그렇게 살면 부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장 싫어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돈은 일하느라 돈 쓸 시간이 없어야 모인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의 예술가나 자신의 일을 정말 좋아하는 특정한 몇몇 사람들뿐이다. 평범한 우리에게 일은 언제나 고초고 고욕일 뿐이다. 그러니 평범한 우리에게 ‘돈은 일하느라 돈 쓸 시간이 없어야 모인다’는 이야기는 결국 충분한 돈이 모일 때까지 언제까지고 계속 고초와 고욕 속에서 살라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좋다.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삶을 선택했다 치자. 그 삶은 어떨까? 평범한 직장인은 언제쯤 충분한 돈을 모을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무난하게 직장생활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대기업 임원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전까지는 대출 갚으랴, 아이들 키우랴 항상 버는 만큼 지출이 있어서 돈이 쉬이 모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직장인이 충분한 ‘경제적 부’를 모으기 위해서는 임원이 될 때까지는 고초와 고욕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건 그 긴 시간 직장에 매여 일만 하느라 ‘실질적’으로 한 없이 가난한 삶을 살라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곤경의 본질이다. 가진 것 없이 몸으로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우리는 ‘경제적인 부’를 이루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부’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게다가 그 ‘경제적인 부’라는 것도 돈 많은 부자들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는 것이다. 그 알량한 ‘경제적인 부’를 이루려고 우리의 가처분시간인, ‘실질적 부’라는 소중한 자산을 탕진할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은 주위에 있는 정신없이 바쁜 의사, 임원, 변호사와 같은 ‘경제적인 부’자들을 보면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참 서글픈 역설이다. ‘경제적인 부’자가 되기 위해 ‘실질적’으로 한 없이 가난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버지가 엄청난 자산가가 아니라면, 어느 날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다면, ‘경제적인 부’를 누리면서 동시에 ‘실질적인 부’를 누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이 핵심이다. 가진 것이라곤 몸뿐인 사람들은 언제나 시간을 써서 돈을 벌수 밖에 없다. ‘경제적인 부’자 될 수 있으면 되면 된다. 솔직히 말하자.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몸을 써서 노동하지 않고 돈이 다시 돈을 버는 것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평범한 우리가 그 두 가지 부를 동시에 만족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너무 억울해 할 것은 없다. 운 좋게 이미 ‘경제적인 부’가 많다고 해서 항상 ‘실질적인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이미 죽을 때까지 쓰고도 남는 돈을 모아놓고도 악착같이 더 많은 돈을 벌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은 이미 주위에 너무 많다. 그런 스크루지 같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게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에,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 자명한 일이다. 좋아하는 일에 가처분시간을 사용하고 싶어도 돈을 버는 일만 하느라 정작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체를 모를 테니까. ‘실질적 부’와 ‘경제적인 부’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세상은 나름 공평하다.


우리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상황이 다소 암울하고 척박하기는 하지만 희망은 있다. 우리도 부자가 될 수 있다! ‘경제적 부’를 조금 양보하고 ‘실질적 부’에 조금 더 욕심을 내면, 보다 손쉽고 보다 빨리 윤택한 삶을 사는 ‘실질적인 부’자가 될 수 있다. 나는 ‘경제적 부’와 ‘실질적 부’ 사이에서 가능하면 ‘실질적 부’를 선택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것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부’의 치명적 함정은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껏 돈을 벌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구체적인 액수를 말하는 사람을 거의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은 항상 돈에 대해서는 다다익선이다. 굳이 말하라고 하면 그들은 애초에 그들이 닿을 수도 없는 100억 1000억 같은 액수를 말하곤 한다.


 누구도 ‘경제적 부’를 충분히 모을 수 없다. 10억이 있는 사람은 100억을 모으려고 할 테고, 100억이 있는 사람은 1000억을 벌려고 하기 때문이다. ‘10억만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막상 10억이 생기면 100억을 벌고 싶다는 탐욕에 허우적거리게 마련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 시대의 남루한 자화상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정말 평생 쓰고도 남을 ‘경제적 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질적 부’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현명하게 ‘실질적인 부’자가 되어야 한다. 필요한 최소한의 노동시간만을 일하고 나머지는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해야 한다. 여기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정말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말이다.


 진짜 부자는 ‘실질적 부’를 많이 가진 사람이다. 입만 열면 유럽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 부자가 되면 가족들과 유럽 여행을 꼭 갈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런데 그는 아마 환갑은 되어야 유렵여행을 갈 것 같다. 아니 그때라도 가면 다행일 것이다. 반면 맞벌이하다가 한 명을 직장을 그만두고 또 한 명은 휴직을 한 커플을 알고 있다. 그들은 도심의 아파트에서 외곽의 빌라로 이사를 한 뒤에 그 차액으로 한 달간 가족들과 함께 유럽일주를 했다. 둘 중 누가 더 부자일까? 누가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자발적으로 ‘경제적 부’를 ‘실질적 부’로 전환하여 당장 유럽여행을 떠난 사람이 더 부자고 더 행복한 사람이라 믿는다. 부자가 되려는 이유가 결국 유럽여행을 가는 것이라면, 일단 유럽여행을 가버리면 당장 ‘실질적’ 부자가 되는 것 아닌가? 이것은 무책임한 것도, 대책 없이 사는 것도 아니다. 자기만의 확고한 철학을 가진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다. ‘여행 갔다 와서는 어찌 살지?’ ‘빌라에서 사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의 끝은 안 봐도 비디오다. ‘경제적인’ 부자도 ‘실질적인’ 부자도 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돈만 벌다가 좋은 세월 다 보내고 늙어버릴 게다.


 ‘경제적 부’가 충분히 없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실질적 부’자가 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노동시간을 정하고 그것을 삶에서 관철시킬 수 있다면 가능하다. ‘항상 더 많이, 더 많이 벌어야 해’라는 이미 미쳐버린 자본주의의 목소리에서 자신만의 삶의 속도와 시간을 지켜낼 수 있다면 가능하다. 그런 자신만의 철학이 있다면 가능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 “이번 주 야근해, 야근하면 수당이 1.5배야”라는 사장의 요구에 “아뇨. 일찍 퇴근해서 아이들과 산책할 거예요!”라고 말할 수 있고, “주말에 장사하면 매출이 30% 더 오를 거야”라는 유혹에 “아니 주말에는 좋아하는 연극을 보러 갈 거야!”라고 말할 수 있으면 된다.


‘경제적인 부’자들을 부러워할 필요 없다. 그들은 돈을 버느라 아이들과 산책도, 주말에 여유롭게 연극 한 편도 편히 못 보는 삶을 살 가능성이 아주 높을 테니까. 과연 어떤 부자가 되어야 할까? 우리는 어떤 부자가 되고 싶은 걸까? 여전히 ‘경제적 부’자 인가? 아니면 정말 행복하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실질적 부’자 인가? 인생에 정답은 없다. 어느 선택이든 못할 건 없다. 하지만 어느 길이든 가능한 빨리 선택하는 것이 좋다. 선택을 보류하는 만큼 ‘나’니까 살 수 있는 삶 대신 자본이 원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지게 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살고 싶다.’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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