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자유를 사는 것은 가능할까?
돈과 자유의 상관관계
“진규야, 어디 돈 좀 벌 거 없냐? 너네 회사 상장하던데 그 주식을 좀 사볼까?”
“멀쩡히 직장 잘 다니는데 뭔 돈이 또 필요하냐?”
“야! 그 돈 벌어서 언제 돈 모으냐?”
“대체 돈 벌어서 뭐할려고?”
“어? 돈 벌면? 일단 직장 그만두고 프리하게 살아야지, 여행도 다니고”
친구와의 대화였다. 내 친구도 마찬가지고 우리 모두는 돈을 벌고 싶다. 그런데 왜 돈을 벌고 싶을까? 이유야 많겠지만 그 중에서 단연 큰 이유는 친구의 말처럼 ‘프리’하게 살고 싶어서 일 게다. 맞다.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돈을 벌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좋아하는 취미도 자유롭게 하고,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배낭여행을 가고 싶다면 자유롭게 훌쩍 떠나고 싶다. 그런 자유로운 삶을 위해 돈을 벌고 싶은 것이다.
돈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프랑스 파리나 미국 뉴욕으로 훌쩍 떠나 버린다. 우리는 그들을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나도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저렇게 자유롭게 살고 싶다’라는 말을 되 뇌이면서. 돈이 충분히 많으면 일정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이다. 적어도 돈이 충분히 많으면 일단 그 놈의 지긋지긋한 직장 사무실에 아침부터 밤까지 매여 있는 일은 없을 테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은 일정 정도 자유를 보장한다.
문제는 자유가 충분히 보장될 만큼의 돈을 벌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미리 초를 치려는 게 아니다. 우리네 삶의 조건을 조금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보자는 이야기다. 물려받은 재산도 딱히 없고, 오직 몸과 시간을 써서 돈을 벌어야 하는 임금 노동자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이 열심히 일을 하면, 원하는 만큼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액수의 돈을 벌 수 있을까? 물론 소수는 혈혈단신으로 시작해서 엄청난 부를 거머쥘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그 소수가 될 확률은 아주 낮다. 우리는 모두 분명 특별하지만 결코 예외적이지는 않으니까.
돈과 자유의 거래관계
평범한 사람들은 자유롭기 위해 돈을 벌려고 하면 할 수록 오히려 자유를 더 박탈당하는 역설에서 갇힐 수밖에 없다. 직장생활을 횟수로 7년을 하면서 확실히 하나 배운 것이 있다. 그것은 돈을 많이 주는 곳은 그만큼 부려 먹는다는 것이다. 돈을 벌어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 직장을 다니지만 그 때문에 ‘보고서는 언제 되냐?’, ‘자리 비우지 마라’ ‘책상 정리 정돈 잘해라’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유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퇴근 후나 주말에는 온전히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강변하는 사람도 있다. ‘퍼펙트하게 자유로운 삶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니 직장에서는 자유를 박탈당하더라도 나머지 시간에 자유로운 삶을 살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동의한다. 일을 할 때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나머지 시간에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면 된다는 이야기에 동의한다. 하지만 자유라는 가치는 시간이라는 자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깊이 숙고 해봐야 한다. 자유는 정확하게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의 양이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그것은 돈이라는 것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벌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돈 없이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 돈이 없다면 먼저 자유를 일정 정도 포기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 그렇게 번 바로 그 돈으로 다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내에서 돈과 자유의 서글픈 악순환이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자유를 박탈당해야 하는. 말하자면 자유로운 삶을 위해 돈을 버려는 사람은 일종의 거래를 하는 셈이다. 자유를 돈과 맞바꾸는 거래.
돈과 자유의 불공정거래
하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 거래가 상당히 불공정한 거래라는 사실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자유는 시간이다. 자유를 누린다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가처분 시간이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제 지금 돈과 자유의 거래가 얼마나 불공정한지 한 번 살펴보자. 현실적으로 직장인의 삶으로 시작하자.
직장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직장인은 출퇴근 시간까지 포함하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일을 한다. 하루에 거의 14시간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셈이다. 직장에 있는 동안 상사나 사장이 원하는 혹은 시키는 일을 할 뿐,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다. 게다가 늘 사장·상사·고객의 눈치까지 보아야 하니 그 시간이 어찌 자유롭다할 수 있을까? 자유를 헌납한 대가로 돈은 벌지만 자유를 구가할 시간은 없다. 자유시간이 거의 없는 채로 평일은 그렇게 후딱 지나간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주말이 있다. 드디어 주말이다. 정말 자유다. 온전히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드라이브를 즐기기도 하고, 백화점에서 사고 싶었던 것을 마음껏 쇼핑을 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연인과 영화도 보고, 근사한 음식점에서 식사도 할 것이다. 그것뿐인가? 1년에 한 번 정도는 모아둔 돈으로 자유로운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다. 이것은 분명 자유다. 돈이 주는 자유. 평일에 자유를 박탈당한 대가로 번 돈으로 주말 혹은 휴가 동안에 마음껏 그 돈을 쓰면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당연하게 여기는 이런 일상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진정한 자유는 소비하는 ‘돈의 양’이 아니라 자유를 누리는 ‘시간의 양’이다. 그렇다면 자유를 누리는 ‘시간의 양’은 얼마나 될까? 주말에 쇼핑을 하고 데이트를 하고 외식하는 시간은 아무리 많아도 10시간을 채 넘기기 힘들다. 일주일을 기준으로 보자면 일주일 중 10시간의 자유를 위해서 평일 직장에서 일하는 70시간(5일x14시간)의 자유를 헌납하는 꼴이다. 이 얼마나 불공정한 거래란 말인가? 일주일 중 대략 10시간의 자유를 위해 70시간의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불공정한 거래고, 그 불공정한 거래를 지속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불공정한 거래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
이것부터 바로 잡자. 이제껏 자유라고 말하는 것은 엄밀하게 ‘소비의 자유’일 뿐이다. 정말이다. 우리가 언제 자유롭다고 느낄까? 곰곰이 생각해보자. 백화점에서 갖고 싶은 물건을 마음 껏 살 수 있을 때, 자유롭다고 느낀다. 또 가고 싶은 비싼 음식점에 마음대로 갈 수 있을 때, 자유롭다고 느낀다. 이처럼 ‘소비의 자유’만을 자유라고 인정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소비의 자유’ 이외에 그 어떤 자유도 진정한 자유라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돈과 자유의 불공정한 거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외적인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직장은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는 고초의 장소일 뿐이다. 물론 직장을 다닐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는 직장이 좋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라며 자기최면을 걸 수는 있다. 하지만 직장은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고 그 대가로 돈을 주는 장소일 뿐이다. 그러니 직장에서는 늘 자유에 대한 결핍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직장에 있는 시간은 늘 사장·상사·고객의 눈치를 보며 주눅 들어 있으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월급쟁이는 항상 직장을 벗어나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은 게다.
월급을 받아 지갑이 두둑해진 주말이면 이제 그 억압되었던 자유에 대한 갈망을 해소할 수 있다. 직장에서 자유를 헌납한 대가로 받았던 돈이 있으니까. 우리는 이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면서 자유를 구가할 수도 있고, 원하는 음식점에 가서 자유롭게 식사를 할 수도 있다. 심지어 휴가가 되면 패키지 여행상품을 골라 손쉽게 자유로운 해외여행을 만끽할 수도 있다. 이 얼마나 매혹적인 일인가? 이것이 자유가 아니라면 또 무엇이 자유란 말인가?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다. 백화점에서 잔뜩 쇼핑을 하고 나오면서, 고급 음식점에서 결제를 하고 나오면서, 해외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알 수 없는 어떤 불안감, 헛헛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돈을 쓰는 동안에 누구보다 자유로운 사람이었지만, 그 돈을 다 써버린 후에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소비의 자유’ 뒤에 찾아드는 불안감과 헛헛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돈을 다 쓰면 우리는 직감하게 된다. 다시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쏟아지는 업무, 상사의 잔소리, 사장의 눈치, 진상 고객을 견디느라 또 자유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다는 직감 말이다. ‘소비의 자유’ 뒤에 찾아오는 불안감과 헛헛함의 정체는 바로 결코 틀릴 일 없는 이 직감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근본적으로 시간을 써서 일해야 하는 임금 노동자에게 ‘노동’과 ‘소비의 자유’ 사이에 공정한 거래가 이루질 리가 없다. 임금 노동자는 ‘노동’을 통해 ‘임금’을 받게 되고, 그 임금을 통해 갖가지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소비의 자유’를 얻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 ‘노동’으로 ‘소비의 자유’를 구가하기 위해서는 그 ‘노동’과 ‘소비의 자유’ 사이에 ‘임금’과 ‘상품’이라는 매개 거쳐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당연한 말이다. ‘노동’을 하고 ‘임금’을 받지 못하거나 혹은 ‘임금’을 받더라도 소비할 ‘상품’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소비의 자유’를 만끽할 수 없으니까. 간단한 도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노동 → 임금 → 상품 → 소비의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