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24.소비의 자유 VS 삶의 자유

돈이 많으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돈-자유, 불공정 거래의 불편한 진실


‘노동’과 ‘소비의 자유’의 불공정한 거래의 비밀은 바로 ‘임금’과 ‘상품’ 사이의 관계에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본적으로 ‘임금’과 ‘상품’ 사이에는 결코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 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임금을 주고 일을 시키는 자본(예를 들면 사장)은 ‘임금’과 ‘상품’ 그 사이의 차익을 통해 자신의 이윤을 축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조금 거칠게 말해보자. 우리가 요리사라고 가정하자. 우리가 스파게티(상품)를 1개를 만드는 데 들이는 노동시간을 통해 번 임금으로는 결코 스파게티를 1개를 사먹을 수 없다. 최소한 스파게티 1.5개 혹은 2개를 만드는 노동 시간의 임금을 통해 스파게티 1개를 사먹을 수 있다. 이것이 자본이 자신의 이윤을 축적하는 방식이고, 동시에 자본주의가 구동되는 방식이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70시간을 일하고 겨우 10시간의 자유시간을 누릴 수밖에 없는 불공정거래의 진실이 숨어 있다.


 극단적 예로 만약 우리가 10시간 노동을 하고 70시간의 소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사장은 노동자에게 엄청나게 많은 임금을 주어야 할 것이고, 이는 곧 사장이 노동자가 만든 물건을 팔아 잉여가치(돈)을 남기는 것은 고사하고 손해를 보게 됨을 의미한다. 40시간 일하고 40시간의 소비의 자유를 보장 받을 때 공정한 거래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렇게 되면 마찬가지로 사장은 잉여가치(돈)을 남길 수 없게 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만약 요리사가 스파게티 1개를 만드는데 들이는 노동의 양으로 스파게티 1개를 사먹을 수 있다면, 사장은 대체 어디서 이윤을 남긴단 말인가? 또 요리사는 뭣 하러 사장 밑에서 눈치 보며 노동을 한단 말인가? 스파게티 1개를 만드는 노동의 임금으로 스파게티 1개를 사먹을 수 없는 조건에 이미 들어가 있기 때문에, 사장이 이윤을 남기고, 우리는 사장 눈치를 보며 스파게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런 불공정거래 속에서 노동하고 또 소비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불공거래를 이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불공정 거래는 사실 부당한 것뿐만 아니라 황당한 것이기도 하다. ‘소비의 자유’를 얻게 되는 메커니즘을 생각해보자. 직장에서 자유(자유시간)를 돈과 바꾸고, 다시 그 돈으로 자유, 그러니까 상품을 살 수 있는 소비의 자유를 얻게 되는 것 아닌가? 원래 우리에게는 자유가 주어져있었지만, 그 자유를 팔아 기껏해야 상품을 살 수 있는 ‘소비의 자유’로 바꿨던 셈이다. 자본주의는 자유(원래 우리에게 있었던 자유시간)를 박탈당하는 대가(돈)로 다시 자유(소비의 자유)를 누려야 하는 황당한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둔갑시킨 셈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현대판 봉이 김선달인 셈이다. 


자본주의가 구축한 최악의 악순환


원래 주어진 자유시간으로 노동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고, 그 임금으로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의 자유를 얻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유시간’을 ‘소비의 자유’로 맞바꾼 것이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자유는 결코 등가적이지 않다. 사장 밑에 들어가 스파게티를 1.5개 혹은 2개를 만드는 노동의 임금으로 스파게티를 1개를 사먹는 꼴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우리에게는 스파게티를 만들 수 있는 재료도, 요리기구도, 장소도 없으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상품을 사기 위해 원래 우리의 것인 자유시간을 헌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을 다시 간단한 도식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자유시간 → 노동 → 임금 → 상품 → 소비의 자유 → 자유시간 ‧‧‧‧‧‧‧‧‧‧‧‧‧‧‧

     

 더욱 황당한 것은 위의 흐름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끝없이 순환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최악의 악순환이다. ‘자유시간’을 ‘노동’으로 맞바꿔 ‘임금’을 받고, 그 ‘임금’으로 ‘상품’을 구매하면서 ‘소비의 자유’를 만끽하고, 또 다시 돈이 없어서 ‘자유시간’을 박탈하는 ‘노동’을 해야 하는 그 악순환 말이다. 철학자 칼 맑스가 “자본주의라는 체제는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을 착취한다!”고 말했던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논의가 여기까지 진전 되면, 이제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는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네 삶은 이미 오직 돈을 벌고, 돈을 쓰는 자본주의적 영역에 모조리 잠식당해 버렸으니까 말이다. 자본주의는 원래 우리에게 주어졌던 소중한 자유를 모조리 소비의 자유로 왜곡해버렸다. 그래서 지금 돈이 없을 때 한 없이 부자유스럽게 느끼게 된 게다.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 절박하게 물어야 할 때다. ‘노동’(돈을 버는 행위)과 ‘소비’(돈을 쓰는 행위)의 영역 이외에 우리의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삶의 영역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그리고 만약 남아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돈만 많으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돈이 많으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나는 ‘그렇다’라고 답하겠다. 하지만 ‘그렇다’의 전제조건이 오직 ‘소비의 자유’일 뿐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하고 싶다. 그러니 누군가 다시 ‘자유로워지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하나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답하겠다. ‘소비의 자유’를 구가하기 위해 돈을 벌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헌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임금’과 ‘상품’ 사이의 불공정한 거래를 인정하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생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불필요한 ‘소비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소비의 자유’는 결국 우리의 자유로운 시간을 먹고 자라는 괴물이니까. 여기서 잠시 철학자, 이진경을 만나보자. 그는 ‘삶을 위한 철학 수업’이란 책을 통해 우리에게 자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돈이 많아 노동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사람은 자유로울까?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니 자유로울 거라고? 그렇다면 우리 옆에 사는 부자들은 모두 자유로울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노동하지 않고 돈을 펑펑 쓰고 사는 이들이 자유롭다면, 자유란 정말 진지하게 생각할 ‘꺼리’도 되지 못한다. 자유의 크기란 쓸 수 있는 돈의 크기, 살 수 있는 상품의 종류나 양이 되고 말테니까. 사실 우리는 잘 안다. 그들이 그 돈에 얼마나 매여서 살며, 그 돈에 치여 가족들끼리 얼마나 치고받고 싸우며 사는지. 그들이 부러울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자유를 부러워하는 게 아니라 돈 쓰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자유란 돈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것이지 돈을 실컷 쓰는 것이 아니다."


 이진경의 주장은 옳다. 돈이 많으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일이다. 굳이 철학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그 돈으로 자유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돈에 매여 아주 부자유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너무도 흔하게 보게 되니까 말이다. 돈 그리고 자유라는 것에 관해 숙고할 때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에 대해 이진경은 이리 답하고 있다. “자유란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지 돈을 실컷 쓰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돈 그리고 자유를 지혜롭게 바라보는 관점이다.


 돈을 실컷 쓰는 것, 그러니까 ‘소비의 자유’ 역시 자유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직 그것만이 진정한 자유라고 믿기 시작할 때, 인생은 어김없이 꼬이기 시작할 것이다. 소비의 자유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지금처럼 병적인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소비의 자유’를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한다면, 결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된다. 소비의 자유를 위해 어김없이 자유시간을 헌납해야 할 테니까.     


소비의 자유 VS 삶의 자유


나는 이제 직장을 다니지 않는다. 돈? 당연히 그다지 못 번다. 직장인이었을 때 비하며 형편없는 수준이다. 당연히 예전에 만끽했던 ‘소비의 자유’는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대신 하루 종일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글을 쓰고 싶을 때 쓰고, 영화를 보고 싶을 때 보고, 아이들과 놀고 싶을 때 논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건, 가끔 낮술이 땡길 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한 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돈을 버는 최소한의 시간을 제외하면, 나는 지금 정말 자유롭다. ‘소비의 자유’를 만끽하던 시절과 지금 '삶의 자유'를 만끽하는 시절 중 어느 삶이 더 행복한지 묻는다면, 분명하게 답할 수 있다. ‘지금!’이라고.

     

 더욱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직장을 다닐 때 나는 무엇인가를 계속 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소비욕구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제 그 이유를 알겠다. 직장을 다닐 때, 무엇인가를 계속 사고 싶었던 이유는 그것이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물건을 사면서 자유롭다는 느낌을 갖고 싶어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직장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자유의 결핍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소비하는 것뿐이었으니까. 직장인은 돈을 버느라 시간이 없으니 자유마저도 돈으로 살 수밖에 없다. 지금 내게 소비 욕구가 줄어든 이유는 분명하다. 하고 싶은 것을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다. 굳이 과도한 소비를 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자유롭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적게 벌지만 내 멋대로 사는 것이 바로 '삶의 자유'다. ‘삶의 자유’를 포기하고, ‘소비의 자유’를 선택하는 것을 삶의 다양성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걸 한 사람의 개인적 선택이라고 퉁치고 넘어가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그리 생각한다면, 말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다. 아니 도시락 싸다니면서 기꺼이 이야기해주고 싶다. ‘소비의 자유’보다 ‘삶의 자유’가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준다고. 그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차례다. 우리는 어떤 자유를 누려야 할까? 많이 일하고 많이 벌어서 ‘소비의 자유’를 누려야 할까? 아니면 적게 일하고 적게 벌지만 내 멋대로 사는 '삶의 자유'를 누려야 할까? 어떤 것이 진짜 자유일까? 어떤 자유가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줄까? 삶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한번쯤 고민해본 사람들에게 대답은 어렵지 않을 게다.  

매거진의 이전글 23.돈과 자유의 불공정거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