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 그리고 자기분열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
밤 12시 야근을 끝내고 운전을 해서 집으로 가고 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졸음운전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순간, ‘쿵’하는 소리가 났다. 아뿔싸! 육교 밑으로 무단횡단을 하던 노인을 친 것이 아닌가! 순간 머릿속은 하얘지고 손은 덜덜 떨고 있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상황 아닌가? 비단 교통사고가 아니라도 어떤 사람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게 되었을 때,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본 적 있을까?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왜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지 말이다. 우선 죄책감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에게는 공감능력이 있어서 일 게다. 사고를 당한 사람을 보며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자신 역시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누군가 교통사고를 내게 되면, 그는 결코 되어서는 안 되는 형편없는 부류의 인간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혹은 해를 끼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치를 내면 깊숙이 받아들이고 있다. 교통사고를 낸 후 끔찍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유는 자신이 결코 되어서는 안 되는 형편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자기부정의 감정에 기인한다. 이것이 죄책감을 느끼는 조금 더 근본적인 이유다.
결국 죄책감은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게 될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옳다고 믿는 가치와 실제 행동의 간극만큼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교통사고를 내서 사람을 죽이게 되었을 느끼는 죄책감보다 무단횡단을 하고 난 뒤에 느끼는 죄책감이 현저히 작은 이유도 이제는 알 수 있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가치는 아주 확고하게 옳은 것이고, ‘무단횡단을 하면 안 된다’는 가치는 비교적 확고하지 않게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죄책감은 우리네 삶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운전을 할 때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않기 위해 항상 긴장하고 조심하게 된다. 또 급한 일이 있어도 가급적 무단횡단을 하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죄책감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은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스스로 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부터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게끔 말이다. 죄책감을 느끼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감내하고 나서도 다시 또 죄책감에 시달리는 일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죄책감은 건강한 것이기도 하다. 죄책감 덕분에 옳다고 믿는 삶을 살려고 하고, 잘못되었다고 믿는 삶을 피하려고 하게 되니까. 죄책감이란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해’라는 생각에 부합하지 못한 행동을 할 때 발생하는 감정 아닌가? 그러니 죄책감이란 것은 일종의 제동장치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건강하고 훌륭한 삶을 살아내기 위한 제동장치 말이다. 죄책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훌륭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고, 결코 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 나쁜 인간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자기분열적 삶의 불행
죄책감은 건강한 삶을 위한 제동장치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 삶을 불행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인간이라면 ‘나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해’ 혹은 ‘나는 결코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돼’라는 삶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다. 전자가 ‘긍정적 이상향’이라면 후자는 ‘부정적 이상향’이다. 죄책감이 삶을 건강하게 할 때는, 죄책감이 ‘긍정적 이상향’으로 가까워지고자, ‘부정적 이상향’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동력으로 작용할 때다. 하지만 삶이라는 것이 어디 맘처럼 되던가.
개인적 욕망, 현실적인 문제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삶은 없다. 인간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개인적 욕망, 특정 사회구조에 있기에 어찌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래서 때로 ‘긍정적 이상향’으로부터 멀어지는, ‘부정적 이상향’으로 다가서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 바로 이때 죄책감은 우리네 삶을 불행으로 몰아넣는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훌륭한 존재가 아니라 결코 되지 말아야 할 나쁜 인간이 될 때 극심한 자기분열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참혹한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가 가진 ‘긍정적 이상향’은 ‘타인을 도와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었고, ‘부정적인 이상향’은 ‘타인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현실적 문제 때문에 누군가를 수도 없이 죽여야 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삶은 어땠을까? 아마 극심한 자기분열에 시달렸을 것이다. 참전 용사들 중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이 많다. 그들이 불행해진 건,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가 가진 죄책감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죄책감.
여기서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각자만의 ‘긍정적 이상향’의 방향으로 삶을 살려고 노력할 때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고, 나쁘다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쓸 때, 최소한 정신병적 자기분열만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정신병적 자기분열을 겪고 있다. 바로 돈이라는 것 때문에 말이다. 선뜻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르겠다. 돈에 대해서 우리가 정신병적 자기분열을 하고 있다니 말이다.
부러워하지만 혐오하는 부자
우리가 돈에 대해서 얼마나 자기분열적인지 소위 부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게다. 호화로운 집, 번쩍번쩍한 차, 명품 옷, 그들의 여유로운 삶까지. 대부분의 사람이 기회만 주어진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자가 되려고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돈 많은 상류층 부자들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화면 앞에 있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그들의 삶에 느껴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 시대의 절대다수는 부자를 부러워하고 또 가는만 하다면 무조건 그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동시에 우리는 부자를 혐오한다. 세상 사람들은 부자에 대해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다. 부자를 부러워하는 동시에 소위 말해서 ‘부자들은 다 도둑놈이다’라는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 ‘부자들은 다 도둑놈이다’라는 인식은 가진 것 없는 자들의 피해의식이라기보다는 굴곡진 한국의 근현대사를 감안하면 사실에 가깝다. 지금 한국의 부자들 중에 공정하지 못한 방법은 물론이고 편법과 불법을 사용하지 않고 지금과 같은 부자가 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산업화되기 시작했던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어땠을까? ‘정직하게 일해서 어떻게 돈을 벌어! 돈 벌려면 조금의 편법과 불법은 어쩔 수 없는 거야!’라는 인식이 지배했던 사회였다. 옳고 그름을 떠나, 한국사회에 그런 부조리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에게 ‘정직한 부자’라는 말은 순진하게 들리고 ‘정직하게 돈을 버세요.’라는 말에 자조적인 콧방귀를 뀌는 것이다. 부자가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알고 있기에 부자는 혐오대상이 된 게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부자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이다.
우리는 부자를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인정하거나 존경하지 않는다. 아니 인정과 존경은커녕 ‘돈 있는 놈들은 다 도둑놈 아니야?’라며 부자를 혐오하는 쪽에 가깝다. 천박한 자본주의에 사는 우리에게 부자는 서글프게도 ‘긍정적 이상향’인 동시에 ‘부정적인 이상향’이다. 악착같이 부자가 되고 싶지만, 정 작 우리가 그리도 되고 싶은 그 부자를 혐오한다. 결국 우리는 도둑놈이라고 폄하하고 혐오했던 사람이 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는 셈이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내밀한 어느 곳에서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부정적 이상향'을 향해서 살아갈 때 느낄 수밖에 없는 그 죄책감. 그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정신병적 자기분열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내가 혐오하는 모습이라니, 어찌 정신병적 자기분열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정직한 부자’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드문 사회에서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정신병적 자기분열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