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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하다가 잘못 배우게 되면 어쩌나?

어떻게 배울 것인가? II

배움에 관한 가장 좋은 방법론이 ‘맹신’이라면, 이제 두 가지 구체적 의문을 남긴다. 첫째, ‘비판적 사고 없이 맹신하다가 잘못 배우게 되면 어쩌나?’하는 의문이다. 영어를 배우러 학원에 갔다가 생각해보자. 그 선생이 사짜일 수 있지 않은가? 그 선생은 사짜이기에, “문법은 할 필요 없고 미드 자막을 보면서 외우라!”라는 말만 반복했다. 이제 그 선생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학생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의심하는 학생과 맹신하는 학생.    

  

 누가 더 잘 배울까? 후자다. 전자는 가르침을 의심하느라 영어를 잘 배우지 못한다. 하지만 후자는 맹신했던 덕분에 영어를 잘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허황된 가정법이 아니다. 실제로 ‘랑시에르’라는 철학자는 「무지한 스승」이라는 저서를 통해 ‘무지한 스승이 오히려 더 잘 가르칠 수 있다’는 역설적인 주장을 충분한 사례를 통해 입증한 바 있다. 이 책에서는 실제로 (네덜란드어를 전혀 못하는) 프랑스어 선생에게 프랑스어를 누구보다 잘 배우게 되는 (프랑스어를 전혀 못하는) 네덜란드 학생의 사례가 등장한다.      


 우리의 믿음과 달리, 맹신한다고 해서 잘못 배우게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맹신하면 ‘잘못된 것’을 배우는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잘못’ 배우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믿게 되면 그것을 잘 배우게 된다. 사이비 종교를 맹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을 배우는 것이긴 하지만, 그 사이비 종교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배우게 된다. 아무리 아는 것 없는 선생이라도 그를 맹신하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분명 잘 배우게 된다. 배움에서 중요한 건 믿음이다. 맹신에 가까운 믿음. 그것이 가장 먼저다.      


 ‘믿음’을 통해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잘 배울 수 있다. ‘의심’은 비판적 사고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배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에 가깝다. 먼저 믿지 않는다면 제대로 배울 수 없다. 엄청난 지식을 갖고 있는 대학교수에 비하면 형편없는 지식을 갖고 있는 아버지에게 더 많은 것들을 배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대학교수보다 아버지를 더 믿기에 그런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에 대한 믿음은 종교적 믿음에 가까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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