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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없다면, '배움'도 없다.

어떻게 배울 것인가? III

이제 두 번째 의문이 든다.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다. 좋다. ‘믿음을 통해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치자. 그래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사짜 영어 선생을 믿고 그의 말대로 미드 자막을 외우는 짓을 하고 싶지만 자꾸만 의심이 생기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믿음의 역설은 믿으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믿음은 분명 배움을 담보하지만, 그것을 안다고 해도 아무나 믿을 수 없다. 그래서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어찌 해야 할까? 믿음은 어디서 오는지 물어야 한다. 믿음은 감정에서 온다. 정확히는 기쁨의 감정에서 온다. 종교인들이 신을 믿는 근원적 이유는 신이 전능하고 옳아서가 아니다. 신에게서 평온함, 안락함과 같은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모를 믿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그네들이 언제나 옳기에 그런 게 아니다. 그네들에게 평온함, 안락함, 포근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미드 자막을 통째로 외우고 있었던 그 학생은 어떻게 사짜 선생을 맹신할 수 있었을까? 그 선생에게서 어떤 기쁨을 느꼈기 때문일 테다. 아마 그 학생은 그 선생을 사랑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다른 모든 학생들이 그 선생을 의심할 때도 그 학생은 선생을 믿고 그의 가르침대로 배우려고 했을 테다. 사랑만큼 큰 기쁨을 주는 감정도 없으니까.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를 질문하기보다 기쁨을 주는 대상을 찾는 편이 낫다. 작게는 나와 결이 맞는, 크게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선생과 책을 찾는 게 중요하다. 그것이 잘 배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래야 맹신에 가까운 믿음이 생길 테니까. 그 믿음만큼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 좋은 선생과 좋은 책은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선생과 책이 아니다. 그런 것들로 제대로 배울 수 없다. 기쁨을 주는 선생과 책이 가장 좋은 선생과 책이다.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된다.    

  

 잘 배우고 있지 못하다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결이 맞거나 사랑하는 대상이 얼마나 있는지. 그렇게 맹신하는 대상이 얼마나 있는지. 제대로 잘 배우고 싶다면, 가장 먼저 맹신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야 한다. 물론 ‘비판적 사고’는 중요하다. 그런데 그 비판적 사고라는 것은 맹신했던 대상이 하나씩 하나씩 늘어나면서 제대된 배움이 확장되어갈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안목이다. 비판적 사고는 배움의 사후적 결과물이지, 배움을 위한 선제적 조건이 아니다. 배움에 관한 역설 하나. 먼저 맹신하지 않는다면 비판적 사유를 할 수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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