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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데카르트의 '코기토'

지각의 한계가 의식의 한계를 만든다.  


‘뮐러-라이어’ 착시

  

 어느 쪽이 선이 더 길어 보일까? 아래쪽 선이 더 길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두 선의 길이는 같다. 이런 종류의 착시들은 인간의 지각 능력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인간이 가진 지각 능력의 불완전성이 의식(생각, 판단)의 불완전성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생각하고 판단하기 위한 정보를 지각을 통해서 받아들이게 되는 까닭이다. 즉,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 내리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만지는 지각 능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마련이다.   

   

 시각·청각·후각·촉각 같은 ‘지각’의 불안정성이 생각·판단 같은 ‘의식’의 불완전성을 야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생각해보라. 인간의 의식적인 측면(생각, 신념, 판단)은 얼마나 불완전한가? 의식의 한계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선입견이다. ‘저 사람은 딱 봐도 싸이코네!’ ‘직장 그만두면 못 먹고살아!’ ‘여자(남자)는 원래 다 그래’ ‘돈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어’ 같은 선입견은 인간이 가진 의식적인 측면의 불안정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은 선입견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도, 세상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선입견이 없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지각 능력 자체가 불완전하니까. 제한적인 자신의 삶의 맥락을 넘어선 것들을 온전히 모두 지각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선입견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니까, 그걸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선입견은 그냥 두어도 좋은 것일까?


  

선입견은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       


선입견은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끊임없이 극복하려고 애를 써야 한다. 왜? 선입견을 극복하는 삶이 훌륭한 삶이어서가 아니다. 그것이 행복한 삶이기 때문이다. 딱 봐도 싸이코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은 조금 예민했을 뿐 좋은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선입견 때문에 그 사람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관계가 되곤 한다. ‘직장을 그만두면 못 먹고 산다’는 선입견은 또 어떤가? 영혼이 질식해가는 직장을 떠나지 못하는 불행한 삶은 바로 그 선입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남자(여자)는 다 그래’ ‘돈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어’라는 선입견도 마찬가지다. 전자의 선입견은 새로운 이성을 만나 다채롭고 풍요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막는 쪽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다. 후자의 선입견은 돈 이외에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하게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선입견에 갇힌 만큼 불행하고, 선입견을 극복한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입견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든 피해갈 수 없는, 그 저주처럼 들러붙은 선입견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방법이 있다. ‘의심’이다. 의심하면 된다. 내가 확실하다고, 옳다고 믿는 것들을 처음부터 모조리 의심할 수 있으면 된다. 그 의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그 선입견들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쯤에서 의심의 철학자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세상 모든 것을 의심했던 철학자를 만나보자. ‘데카르트’다.



의심의 철학자,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는 최고의 능력과 책략을 겸비한 심술궂은 악마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이려 든다고 가정하련다.”라고 말할 정도 모든 것을 의심하려고 했다. 데카르트는 먼저 사고의 모든 바탕을 포기했다.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것들, 예를 들면 ‘2와 3을 더할 때마다 계산을 잘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것마저 의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데카르트가 이렇게 까지 극단적으로 모든 것을 의심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데카르트는 ‘철학’은 불확실한 지식에 확실한 기초를 제공해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즉, 철학은 결코 틀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에, 철학의 출발점은 더없이 자명하고 확실한 것이야 했다. 데카르트는 끊임없는 의심을 통해 절대 의심할 수 없는, 그래서 모든 사고의 시작점이 될 만한 그 무엇을 찾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존재할까? 세상에 확실한 것이 있을까?


 회의주의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확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백조는 희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일까? 그때 회의주의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검은 백조가 있으면 어쩔 건데?’ 회의주의자들에게 백조가 희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진리)이 아니다. 단지 검은 백조가 아직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회의주의자들의 집요한 공격을 받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결코 의심할 수 없는 더없이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기어이 찾아내고 만다. 데카르트의 저서 「방법서설」 통해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나는 지금까지 내 정신 안에 들어온 모든 것은 꿈에서 등장하는 환상보다 조금도 참되지 않다고 여기기로 결심했다그러나 이렇게 내가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은 반드시 무언가로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바로 깨닫게 되었다그리고 나는 생각한다고로 존재한다.’는 진리는 매우 확고하고 확실한 것으로서 회의주의자들의 터무니없는 억측에 의해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점에 주목하여 나는 이것을 내가 추구했던 철학의 제일원리로 받아들이는 데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데카르트라는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어도, 나는 생각한다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이야기는 한 번 즈음 들어 봤음직하다. 데카르트가 발견한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것은 바로 ‘코기토’(cogito)였다. 코기토는(cogito)는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cogitare)의 1인칭 형태다. 즉 코기토는 ‘나는 생각한다.’는 뜻이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의심 가능하지만,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만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자신 철학의 시작점을 바로 이 ‘코기토’로 삼았다. 코기토에서 출발해서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추론을 통해 더 복잡하면서도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실에 도달하려 했다. ‘어떻게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데카르트라면 이리 답해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의심)하고 있는 자신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라!” 데카르트의 말처럼, 코기토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 우리이게 저주처럼 들러붙은 그 선입견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이쯤 되면 의아한 생각이 든다. 요즘 같이 팍팍한 세상에 의심 없이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은 오히려 믿음이 없는 시대지, 의심이 없는 시대는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의심이 판치는 세상에 살면서도, 왜 삶의 진실에 도달하지도,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지도 못하는 걸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의심 자체가 아니라 ‘의심하는 태도’에서 찾아야 한다. 의심하는 태도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다시 데카르트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코기토’의 숨겨진 의미     

 

사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철학사적 맥락에서 보면 한계가 많은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인정받으며, 철학사의 묵직한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데카르트는 어떻게 근대 철학의 아버지가 되었을까? 데카르트는 중세를 종결짓고 근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중세는 신이 중심인 시대였다. 신의 말씀이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던 시대였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이란 존재 역시 신이 창조한 피조물일 뿐이었다. 말 그대로 중세는 ‘하나님이 아버지’인 시대였다. 즉,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신 때문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코기토의 숨겨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코기토를 다시 생각해보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이 코기토다. 중세 시대에 이 주장은 어떤 함의를 갖는 것이었을까? 불온하고 불경스럽게도 신을 부정하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나’의 존재 이유는 ‘신’이어야 하는데, 지금 데카르트는 ‘나’의 존재 이유를 ‘생각’(이성)에서 찾고 있는 것 아닌가! 


 데카르트는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신 때문이 아니라 바로 생각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신이 세상의 중심인 중세에 이보다 더 불경스럽고 불온한, 그래서 위험한 이야기도 없었을 테다. 데카르트가 가진 ‘의심의 태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익숙하고 편안한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을 만한 것들까지도 과감하게 의심하는 태도였다. 중세를  막 벗어나려 했던 시대를 살았던 데카르트에게 '코기토'는 목숨을 건 의심이었다.



의심할 수 있는 용기


이제 우리가 그 많은 의심에도 불구하고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우리는 무엇을 의심할까? 우리네 익숙하고 편안한 삶, 그리고 그 삶을 정당화해주는 것들에 대해서는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싸이코야!’라는 생각은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그건 그 싸이코가 익숙하고 편안한 내 삶을 부정하고,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돈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어’라는 선입견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걸 의심하는 순간, 돈을 벌기 위해 기계처럼 살고 있는 지금 내 삶이 부정당하고, 그래서 지금 삶이 낯설어지고 불편해지고 끝내는 위험해질 수 있음을 직감하는 까닭이다.

  

 우리는 익숙하고 편안한 삶을 부정하고, 낯설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 것들만 집요하게 의심한다. ‘적게 가지는 것에 행복이 있어’ ‘직장을 떠나면 새로운 삶이 보여’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해’라는 이야기를 집요하게 의심한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적게 가지는 것, 직장을 떠나는 것,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종종 익숙하고 편안한 삶을 부정하고, 낯설게 하며, 불편하게 만들며 결국에는 위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심은 언제나 익숙하고 편안한 삶을 부정하고, 낯설게 하며,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향해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의심들은 선입견을 더욱 고착시킬 뿐이다.


   

 선입견을 벗어날 길은 분명 의심이다. 하지만 모든 의심이 선입견을 벗어나게 해주는 건 아니다. 데카르트가 중세를 벗어나 근대를 열어젖혔던 의심처럼, 우리 역시 익숙하고 편안한 삶, 그리고 그런 삶을 정당화해주는 것들에 대해서 과감하게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네 삶이 부정당하고, 낯설어지고 불편해지게 만들 것들까지 의심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의심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선입견을 벗어날 수 있는 의심하는 태도다.      

 데카르트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코기토’라는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과감하게 '의심할 수 있는 용기'일지도 모르겠다. 데카르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의심할 수 있는 용기'를 바탕으로 엄격하게 생각하는 태도와 권위에 의존하기를 거부하는 태도라고 나는 믿고 있다. 데카르트 통해 우리에게 집요하게 들러붙은 선입견을 하나씩 떼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각자 조금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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