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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관심받고 싶은가요?

파스칼의 '허영'

왜 인스타그램에 열광하는 걸까?

집, 카페, 음식점, 여행지, 어디든 빠지지 않는 일상적 장면이 있다. ‘셀카’ 스마트폰이나 디지털카메라로 연신 셀카를 찍는다. 그냥 찍는 건 아니다. 절묘하게 카메라 앵글을 조정해서 ‘없어 보이는’ 배경은 안 보이게 하고 ‘있어 보이는’ 배경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매 순간 얼굴 각도를 조절해 가장 예쁘고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 나오게 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포인트는 하나 더 있다. '셀카'지만 마치 타인이 자신을 찍어주는 것처럼 찍어야 한다. 마지막 작업이 남았다. 뽀샵. 뽀샵을 통해 행복해 보이는 장면을 극대화해야 한다. 이제야 비로소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릴  수 있다.     


 인스타그램에 열광하는 시대다. 밥을 먹으러 가서 사진을 찍는 건지, 사진을 찍으러 가서 밥을 먹는 건지 알 수 없는 시대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에 셀카를 올린다. 그것도 적지 않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가면서. 왜 그럴까? 어딜 가든 셀카를 찍어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는 사람들에게 물은 적이 있다. 돌아온 답은 ‘사진 찍는 게 좋아서’ 혹은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하긴 좋아서 사진을 찍는다는 데 거기에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또 생각해보면 소풍이나 여행을 가서 사진으로 추억을 남겼던 일은 늘 있었던 일 아닌가?     


 하지만 뭔가 석연치가 않다. ‘사진 찍는 게 좋아서’라고 말한 사람을 유심히 살펴보자. 입은 옷이 맘에 들지 않거나 화장을 안 한 날은 사진을 찍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단순한 우연일까? 자신의 외모가 맘에 들지 않는 날과 사진이 찍고 싶지 않은 날이 우연히 겹친 걸까?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 인스타그램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석연찮은 건 마찬가지다. 추억을 간직하고 싶으면 사진을 찍어 혼자 간직하면 될 일 아닌가? 함께 있는 사람과 추억을 만들 시간에 굳이 사진을 편집해서 기어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건 앞뒤가 안 맞다. 셀카와 인스타그램에 열광하는 진짜 이유가 뭘까?



파스칼의 ‘심정’(cœur)

이 질문에 답해줄 철학자는, 천재적인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였던 ‘블레이즈 파스칼’이다. 파스칼이라면 ‘왜 인스타그램과 셀카에 열광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리 답해줄 것이다. “인간은 허영(vanity)을 가진 심정(cœur)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파스칼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허영’과 ‘심정’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조금 더 깊게 알 필요가 있다. 먼저 파스칼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심정 cœur은 이성이 모르는 자신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일에서 이것을 알 수 있다. 심정은 자기가 열중하는 데 따라서 자연적으로 보편적 존재를, 아니면 자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팡세」     


 파스칼은 “심정은 이성이 모르는 자신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며 심정과 이성을 구분한다. 파스칼은 인간은 ‘이성’보다는 오히려 ‘심정’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인간의 마음에는 이성과 심정이라는 두 가지 측면 있다고 말했다. 이성이 “기하학의 정신 esprit de géométne”과 관련된 것이라면, 심정은 “섬세의 정신 esprit de finesse”에 관련된 것이라고 말한다. 난해한 개념이니 조금 풀어서 설명하자.  

    

 ‘이성’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잠재적이고 보편적 능력이라면, ‘심정’은 각 개인들 마다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직관적 감성과 판단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하학’은 배우면 누구나 익힐 있지만, ‘섬세한 정신’은 한 사람의 고유한 것이다. 심정이란 것은 개별자들 각자의 단독적이고 고유한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파스칼은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심정(감정)에 더 큰 영향을 받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감정에 휘둘려 이런저런 일들을 벌이는 게 인간 아닌가. 인간은 결코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파스칼의 ‘허영’(vanity)


 뒤이어 파스칼은 이렇게 말한다. 심정은 자기가 열중하는 데 따라서 자연적으로 보편적 존재를아니면 자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인간은 심정을 통해 ‘보편적 존재’(신) 혹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심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은 결국 필연적으로 보편적 존재(신)를 사랑하거나 혹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서 ‘보편적 존재’(신)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두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문제에 집중하자. 인간은 심정에 휘둘리는 존재이기에 자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하나 도사리고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타인도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란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심정적인 존재이기에 결국 타인의 사랑을 집요하게 갈구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에게 저주처럼 들러붙은 ‘허영’이라는 감정이 정체를 드러낸다. 인간은 심정적인 존재이기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이는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픈 욕망과 연결된다. 이 연결을 통해 결국 인간은 ‘허영’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허영’에 대해서 파스칼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도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라서 병사도, 아랫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자랑하고 찬양해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들도 자신의 찬양자를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 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또한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팡세     



허영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파스칼은 모든 인간은 허영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차가운 진단을 내리고 있다. ‘허영’虛榮은 말 그대로 ‘비어 있는’(虛) ‘꽃’(榮)이라는 의미다.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제로 비어 있는 꽃이 허영이다. 그렇다. 허영은 실제 자신의 모습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려는 것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실제 자신의 모습보다 아름답게 꾸미려는 심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왜? 그래야 타인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파스칼의 진단은 내정하기에, 날카롭다.         


 이제 우리가 왜 셀카와 인스타그램과 셀카에 집착하는지 알 것도 같다. “인간은 허영(虛榮, vanity)을 가진 심정(cœur)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에 셀카를 그리도 열심히 올리는 이유는 사진 찍는 게 좋아서도,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도 아니다. 허영 때문이다. 실제 자신의 모습보다 더 아름답게 자신을 꾸미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싶은 것이다. 속은 비었지만 겉은 화려한 꽃처럼 보여서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싶은 것이다.


 셀카와 인스타그램만 그럴까? 모든 인간은 허영적인 존재다. 아름다운 외모에 집착하는 것만 허영인가? 그 반대도 허영이다.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라 내면이야”라는 말도 때로 허영이다. 어린 시절부터 못생겼다고 구박받고 자랐던 사람은 자신의 외모가 아니라 훌륭한 내면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믿기에 그렇다.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사로잡고 싶은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 희대의 탈옥수 신창원도 정의롭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으며, 독재자 박정희도 위대한 지도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심지어 초야 붙여서 살고 싶다는 책을 쓴 철학자도 그 책에 자기 이름이 빠지는 것은 참지 못한다.     



셀카와 인스타그램은 일종의 자해다.

어떤 인간도 허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그 허영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셀카와 인스타그램을 지금처럼 하면 되는 것일까? 이건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볼 문제다. 철학자 한병철은 ‘셀카와 자해는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병철은 우리 사회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밖에서는 셀카를 찍고 집에 들어가서는 자해를 하는” 사회라고 진단했다. 다소 과격하지만 충분히 공감되고 동의된다. 


 사람들의 관심·인정·칭찬이 없으면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끼지 못하기에 인스타그램을 하는 것과 육체의 고통이 없으면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끼지 못하기에 자해를 하게 되는 것의 내면적 메커니즘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정말 그렇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면서 동시에 근사하고 행복해 보이는 타인들의 인스타그램을 끊임없이 엿본다. 그 사이에 나의 아름다움과 행복이 덜 한 것 같아 더 아름답고 더 행복해 보이는 셀카를 찍으려 기를 쓴다. 


 이 악순환이 점점 강도를 더 해가는 자해와 얼마나 다른 걸까? 실제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해하는 영상을 찍어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례는 셀카와 자해의 연관성은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을지 않을까. 정서적 자해와 육체적 자해는 별도의 영역에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셀카와 인스타그램은 가급적 안 하는 게 좋다. 아름다움과 행복을 날조해 사람들의 관심·인정·칭찬을 받으려는 것은 필연적으로 더 큰 불안, 허무, 그리고 외로움을 동반하는 까닭이다. 비어 있는 꽃을 생각해보라. 그걸 잠시 보는 사람이야 좋을지 몰라도, 그 꽃 자신은 얼마나 불안하고 허무하고 외로울까? 셀카와 인스타그램은 일종의 내면적 자해이기에 안 하는 게 좋다. 하지만 이런 의구심이 든다. 그게 가능할까?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은 허영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 아닌가? 그러니 셀카든, 인스타그램이든 뭐든 사람들의 관심·인정·칭찬을 얻기 위한 허영적인 행위들을 멈출 수 없는 것 아닌가.




어떤 ‘인정투쟁’을 하고 있나요?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인간은 허영 때문에 더 큰 불안, 허무, 외로움에 시달리지만 동시에 허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를 집어삼키는 허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시쳇말 중에 ‘관종’이라는 말이 있다. ‘관심종자’의 준말이다. 관종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허영이라는 것을 아무런 필터 없이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의 극단이 ‘관종’인 셈이다.


 인간은 허영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지만 허영의 종류를 선택할 수는 있다. 철학에는 ‘인정투쟁’(Kampf un Anerkennung)이란 개념이 있다. 이 개념은 어렵지 않다. 주인과 노예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주인에게는 두 가지 허영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나는 100명의 노예를 거느린 주인이야!’라는 허영이다. 또 다른 허영이 있을 수 있다. ‘나는 노예에게도 사랑받는 주인이야!’라는 허영이다. 전자의 허영을 만족시키는 것은 쉽다. 그냥 노예를 착취하는 주인으로 살면 된다.


 하지만 후자의 허영을 만족시키려면 일이 복잡해진다. 왜? 노예가 자신의 곁에 있는 이유가 그들이 노예이기 때문인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강제로 붙잡아둔 연인이 자신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처럼. 후자의 허영을 충족하기 위해서 주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놀랍게도 전자의 허영을 포기해야 한다. ‘나는 노예에게도 사랑받는 주인이야!’라는 허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노예들을 자유인으로 풀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후자의 허영이 근본적으로 만족될 수 있다.



허영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어떤 허영을 선택해야 할까? 중요한 건 허영 자체가 아니라 허영을 채워주는 타자다. ‘어떤 사람에게 관심, 인정, 칭찬을 받을 거냐?’는 질문을 해야 한다. 관심·인정·칭찬을 받고 싶은 대상에 따라, 즉 허영을 만족시키려는 대상에 따라 우리네 삶은 현격하게 달라진다. 그 대상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그 대상은 ‘피상적 관계’가 아닌 ‘진정한 관계’를 맺는 존재여야 한다.

        

 ‘나는 1000명의 노예를 거느린 주인이야!’라는 허영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결국 더 불안하고, 허무하고,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그는 누구에게 관심·인정·칭찬받고 싶었을까? 불특정 다수다. 지나가는 동네 사람, 옆집 성주 같은 불특정 다수. 속 깊은 대화는 고사하고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불특정 다수는 ‘피상적 관계’ 맺음의 대상이다. 인스타그램이 내면의 자해인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 사진을 보여주고 싶은 대상이 언제나 ‘피상적 관계’를 맺고 있는 불특정 다수인 까닭이다. 인스타그램은 불특정 다수에게 관심·인정·칭찬을 받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기에 그 끝에는 필연적으로 불안·허무·외로움이 도사리고 있다.



 반면 ‘나는 노예에게도 사랑받는 주인이야’라는 허영을 만족시키려는 사람은 상황이 다르다. 이 사람이 관심·인정·칭찬받고 싶은 대상은 누구일까? 속 깊은 대화를 나누고, 함께 음악을 듣고, 시와 소설을 읽었던 친구들일 테다. 그 ‘진정한 관계’ 맺음의 대상들에게 관심·인정·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리는 사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면적 자해가 아니다. 그 블로그는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만 공개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런 허영은 불안·허무·외로움이 아니라 충만감·행복함을 느끼게 해준다.


 불안·허무·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인스타그램 대신 정성스럽게 찍은 사진첩을 사랑하는 이에게 조심스럽게 내미는 것은 어떨까? 허영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관심·인정·칭찬을 구걸하지 말자. 그런 ‘피상적 관계’ 속에서 허영을 지속하다간 우리 역시 끔찍한 ‘관종’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진정한 관계’를 맺는 사람에게 허영을 부리자. 그러니 어제보다 더 행복해지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관심·인정·칭찬에 목을 맬 일이 아니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삶의 진실이 하나 더 있다. ‘진정한 관계’는 언제나 ‘사랑의 관계’라는 것. 이제 알겠다. 왜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네 삶을 그토록 행복하게 해주는지. 그건 사랑하는 사람과의 ‘진정한 관계’를 통해서만 허영이 행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저주처럼 뿌리내린 허영은 언제나 불안·허무·외로움으로 내몰지만 오직 한 경우만 예외다. 사랑하는 이! 그 사람 앞에서의 허영만큼은 예외다. 그 허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마음껏 허영을 부리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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