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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일로 '성공'할 수 있을까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순 없어!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순 없어!” 이름만 대면 알만한 직장을 그만두고 글쟁이가 되기로 했을 때 수도 없이 들었던 이야기다. ‘왜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냐?’는 질문에 ‘글 쓰는 것이 너무 좋다’고 답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세상 사람들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정확히 좋아하는 일만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성공’은 무엇일까?


 성공을 하나의 기준으로 예단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는 큰돈과 명예가 성공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는 생존을 위한 밥벌이가 성공일 수 있다. 굳이 ‘성공’이란 것을 정의하자면, 내가 바라는 어떤 삶의 모습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공을 무엇으로 정의하든 상관없다. 그 성공이 무엇이든 간에, 좋아하는 일만 해서는 그 성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믿음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일은 부정의 대상이 된다.

       

 정말 그럴까? 좋아하는 일로는 성공할 수 없는 것일까? 좋아하는 일로는 큰돈과 명예, 혹은 최소한의 밥벌이에 도달할 수 없는 걸까? 결이 맞는 사람을 만나고, 즐겁고 유쾌한 일을 하는 것으로는 내가 원하는 어떤 삶의 모습에 도달할 수 없는 걸까?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불편한 사람들과 만나고, 싫은 일을 꾸역꾸역 참고 견뎌야 큰돈이든 명예든, 하다못해 최소한의 밥벌이라도 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타협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싫어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감정과 욕망의 철학자, 스피노자

        

좋아하는 일을 억누르고, 싫어하는 일을 참고 견디는 것으로 그 ‘성공’이란 것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스피노자에게 구해보자. 스피노자는 ‘신은 곧 자연’이라는 ‘범신론’을 주장하였고, 동시에 정신과 육체는 합일적이라는 ‘일원론’(심신 평행론)을 주장한 철학자다. 데카르트가 이성과 정신의 중요성을 주장했다면, 스피노자는 일찍이 감정과 욕망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욕망이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정서에 따라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된다고 파악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에티카     


 스피노자는 욕망을 부정하기는커녕 ‘욕망이 인간의 본질 자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스피노자이기에, ‘좋아하는 일로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이리 답해주었을 것 같다. “가능하다. 그러니 감정과 욕망이 끌리는 데로 가라” 이런 스피노자의 이야기는 낯설다. 낯설 뿐만 아니라 무책임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우리네 삶을 돌아보자. 어렸을 때는 하기 싫은 공부를 꾸역꾸역 했고, 커서는 먹고살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꾸역꾸역 하며 살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스피노자의 이야기가 낯설 뿐만 아니라 무책임하게 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지금의 삶을 꾸릴 수 있는 것도 좋아하는 일을 억누르고 싫어하는 일들을 참고했던 덕분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감정과 욕망을 일상적으로 억압해왔던 우리에게 스피노자의 이야기는 여전히 낯설게 들리기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라는 개념으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코나투스’는 무엇일까? 스피노자의 주저 「에티카」를 잠시 들여다보자.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코나투스]은 그 사물의 현실적 본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코나투스는 일종의 관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 있는 물체는 계속 서 있으려고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고 하는 것처럼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이 있는데, 이것이 ‘코나투스’다.      


 스피노자는 이 코나투스가 바로 그 물체의 현실적 본질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코나투스는 물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도 코나투스가 있다. 인간의 코나투스는 무엇일까? 다시 「에티카」로 돌아가자. 

     

이 노력(코나투스)이 정신에만 관계되어 있을 때는 의지라고 불리지만그것이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어 있을 때는 충동이라고 불린다그러므로 충동은 인간의 본질 자체일 뿐이며그것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인간의 보존에 기여하는 것들이 나온다따라서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행하도록 결정되어 있다.” 


     

 코나투스는 인간의 정신에서는 ‘의지’로 드러나고, 정신과 육체를 모두 포함하는 온전한 인간에게는 ‘충동’으로 드러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충동’라는 단어가 낯설다면 ‘욕구’로 이해하면 된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를 때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고 보존하기 위해 음식과 물에 대한 ‘의지’를 갖게 되고, 음식과 물을 섭취하려는 충동(욕구) 갖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물과 음식에 대한 ‘의지’는 머리(정신) 속에만 있는 것이고, 물과 음식에 대한 ‘충동’(욕구)은 머리에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몸까지 움직여 낸다. 그게 코나투스다. 정신에만 관계하면 의지, 정신과 육체와 관계하면 충동인 코나투스. 바로 그런 코나투스를 통해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신을 보존해나갈 수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코나투스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인간의 보존에 기여하는 것들이 나온다.”라고 말한 것이다.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까?     

이제 다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을 어떻게 규정하던지, 그 성공이란 것은 자신을 유지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이 거머쥘 수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명예를 얻는 것도, 밥벌이를 하는 것도 다 쉽지 않은 일이다. 각자만의 ‘성공’으로 가는 길에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유지하고 보존하려는 노력, 즉 코나투스가 없다면 그 ‘성공’은 애초에 요원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스피노자에게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이 가지고 있는 코나투스는 불변하는 실체 같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스피노자에게 코나투스는 타자와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인해 증가하거나 혹은 감소할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이다. (*철학적으로 타자는 특정한 사람이라기보다 나 이외에 어떤 것이다) 이제 ‘성공’의 비밀이 보일 것도 같다. 그건 코나투스의 증대에 달려 있다. 어떤 경우라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유지하고 보존하려는 힘을 늘리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다.



기쁨을 주는 타자는 코나투스를 증진한다.

어떻게 코나투스를 증대시킬 수 있을까? 그건 코나투스를 증대시켜줄 타자를 만나는 일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그 타자는 어떤 타자일까? 그 마지막 퍼즐을 맞추기 위해 다시 「에티카」를 펼쳐보자.


“우리는 정신이 갖가지 커다란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보다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수동들은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잘 설명해준다. 그러므로 나는 이하에서 ‘기쁨을 정신이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으로 이해할 것이며, ‘슬픔을 정신이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으로 이해할 것이다.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어 있는 기쁨의 감정’을 나는 쾌감 또는 유쾌라고 부르고, ‘그러한 슬픔의 감정’을 고통 또는 우울이라고 부른다.” 


 스피노자는 타자와 마주쳤을 때 인간 내면에 발생하는 변화를 두 가지 원초적 감정으로 나눈다. 기쁨과 슬픔. 인간에게 많은 감정이 있지만 타자와의 마주침에 의해 발생하는 감정은 근본적으로 기쁨과 슬픔이라는 두 가지 감정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쾌감이나 유쾌함은 기쁨의 감정으로, 고통이나 우울은 슬픔의 감정으로 규정하고 있다. 코나투스는 기쁨의 감정이 발생했을 때 증진된다. 이건 스피노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도 알 수 있다. 쾌감을 주는 일을 할 때, 유쾌함을 주는 사람을 만날 때 삶의 의지가 증대되지 않았던가.


성공은 코나투스에 달려 있다.

어떻게 성공할 수 있냐고? 즐거움, 유쾌함, 기쁨을 주는 타자와 만나면 성공할 수 있다. 즐겁고 신나고 기쁨을 주는 일들과 그런 사람들과 함께할 때 성공할 수 있다. 그 ‘성공’이 무엇이건 가능하다. 그때 코나투스가 증대되기 때문이다. 돈을 벌고 싶은가? 명예를 얻고 싶은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하면 가능하다. 열심히 살았지만 원하는 만큼 돈도 벌지 못했고, 명예도 얻지 못했다면, 그건 기쁨이 아니라 고통, 우울 같은 슬픔을 주는 타자와 마주치느라 코나투스가 줄어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스피노자의 생각에 따르면 삶의 주체가 코나투스의 증가를 지향하는 쪽으로 행동하고 실천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우리네 삶에는 코나투스를 떨어뜨리는 타자들로 넘쳐난다. 그러니 우리는 즐거움, 유쾌함과 같은 기쁨을 주는 타자들을 악착같이 찾아 나서야 한다. 동시에 고통과 우울함의 슬픔을 주는 타자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그리도 원하는 성공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 테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은지도 이제 이해가 된다. 


 이쯤에서 삶의 진실을 말하자. 성공을 위해 코나투스를 증대하고 하고 싶지만 진정으로 코나투스를 증대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 ‘성공’이란 것이 새롭게 보인다. 흔히 말하는 ‘성공’은 무엇일까? ‘돈’ ‘명예’ ‘출세’ 같은 것들일 게다. 하지만 기쁨을 주는 타자와 마주치는, 코나투스를 증대시키는 삶을 살게 되면 알게 된다. 그런 삶 자체가 이미 ‘성공’이라는 사실을. ‘성공’을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기쁨을 주는 사람과 기쁨을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하기에 성공한 것이다. 그게 삶의 진실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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