흄의 '동정심'
어떤 사람이 ‘착한’ 사람일까?
“구걸하는 사람에게 돈 주면 안 돼”
“왜? 추운 날씨에 뭐라도 드셔야 할 거 아니야”
“돈을 주는 게 도와주는 게 아니야. 저 사람이 왜 저렇게 구걸을 하겠어? 너 같은 사람들이 돈을 주니까 계속 저러고 있는 거야.”
“그래도 어떻게 마음이 아픈데...”
남자와 여자 중 누가 ‘착한’ 사람일까? 질문에 답하기 전에 ‘착하다’는 말의 의미부터 정의하고 가자. ‘착하다’는 말은 너무 다양하게 사용되니까. 여기서는 ‘착하다’라는 말을 ‘선하다’ 혹은 ‘윤리적이다’란 의미로 규정하기로 하자. 이제 다시 묻자. 남자와 여자 중 누가 더 선하고 윤리적일까?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구걸하는 사람에게 돈을 준 여자는 착한 사람이다. 그럼 남자는 어떤가? 걸인에게 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착하지 않은 사람일까? 일반적으로 그럴 개연성이 높다.
“돈을 주는 게 도와주는 게 아니야”라는 말은 기만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다. 돈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남자를 착하지 않다고 단언할 수 없다. 남자는 진심으로 걸인을 도와주고 싶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물고기 대신 낚시하는 법을 알려주려고 말이다. 조금 길게 본다면, 여자보다 남자가 걸인의 인생에 더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구걸하는 삶은 계속 유지해서도 안 되고, 또 그럴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남자처럼 살아야 할까? 여자처럼 살아야 할까? 우리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 대단히 고결하고 헌신적인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선함과 윤리성은 지키며 살고 싶다. 하지만 삶의 굽이굽이에서 혼란스럽다. ‘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선하고 윤리적인 행동인지. 어쩌면 우리는 ‘착함(선함, 윤리성)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명료하게 답할 수 없어서 착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회의주의’자 데이비드 흄
“착함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해 답해줄 철학자는 ‘데이비드 흄’이다. 흄이라면 이 질문에 '그것은 동정심 sympathy에 달려 있다'고 답해주었을 것 같다. 이 아리송한 대답을 이해하기 위해서 흄의 철학에 대해 알아보자. 흄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회의주의’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회의주의’는 쉽게 말해 뭐든 끝까지 의심하는 것이다.
흄은 ‘회의주의’자로서 너무 자명해서 결코 의심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까지 의심했다. 예를 들어보자. ‘가열하면 물이 끓는다’ 혹은 ‘아침에는 해가 뜨고, 저녁에는 해가 진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해 의심할 수도, 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흄은 이런 것들까지도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흄은 ‘인과관계’라는 것에 주목한다. ‘인과관계’는 말 그대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다. 흄은 우리가 자명한 사실(철학에서는 이것을 ‘진리’라고 한다)이라고 여기는 것들은 대부분이 이 ‘인과관계’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가열을 하면 물이 끓는다’는 것은 ‘원인’(가열)이 ‘결과’(물이 끓음)로 연결되는 경험이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그것을 진리라고 여기게 되었고,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진다’는 것도 ‘원인’(아침, 저녁)에서 ‘결과’(해가 짐, 해가 뜸)로 이어지는 인과관계 때문에 그것을 진리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민한 철학자였던 흄은 묻는다. ‘인과관계'는 정말 진리를 담보하는가? 쉽게 말해,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원인) 음료수가 나오는(결과) 경험이 많이 반복되었다고 해서 계속 그러리라는 것을 누가 보증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인과관계’에 기반 한 모든 법칙·진리는 단 하나의 예외가 발생하는 순간, 법칙도 진리도 아닌 것이 된다. 모든 법칙, 진리는 그런 가능성을 이미 항상 내포하고 있다. ‘백조는 하얗다’는 건 한동안 진리였지만, 검은 백조가 등장하면서 순식간에 진리가 아닌 것이 되었던 것처럼. 그러니 흄은 모든 것을 극한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회의주의’란 이런 진리의 불가능성을 표현하는 말인 셈이다. ‘칼 포퍼’라는 철학자의 “귀납법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는 흄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았다.”라는 전언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흄의 ‘동정심’
흔히 흄을 ‘경험론’자라고 하는데, 그 이유 역시 이제 알 수 있다. 흄이 ‘회의주의’를 통해 도달한 진리는 ‘세상에 자명한 법칙이나 진리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이성적으로 추론하는 건(합리론) 언제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흄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지각(감각 기관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하는 것) 일뿐이라는 ‘경험론’을 받아들이게 된다.
흄은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매 순간마다 감각 기관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경험. 우리가 법칙이니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우연히 하지만 자주 이어졌던 두 사건을 필연적인 원인과 결과로 추론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니까. 이제 우리는 흄이 말한 ‘동정심’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이해할 준비가 되었다. 경험론자답게, 흄은 동정심이란 것이 우리가 겪은 ‘경험’ 이후에 생기는 감정이라고 이해했다. 흄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다른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정념 그 자체가 직접 나의 마음에 느껴질 수는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느끼는 정념의 원인이나 결과를 감각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정념을 추리해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것들이 곧 우리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흄이 말하는 ‘동정심’은, 타인의 고통을 인식한 뒤에 발생하는 나의 고통에 대한 ‘경험’(회상,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추운 날씨에 구걸하는 사람을 보고 동정심이 드는 이유는, 완전히 똑같지는 않더라도, 추운 날씨에 떨었던 유사한 ‘경험’이 나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정심’同情心이라는 말 자체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다. 동정심同情心은 ‘감정’情을 ‘공유’同한다는 말 아닌가. ‘착함’(선, 도덕, 윤리)이란 것은 흄의 ‘동정심’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착함은 '동정심'에 달려 있다.
선, 윤리, 도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고 착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내면에서 동정심이 일어나야 한다. 그것이 착함이다. 타인의 고통은 분명 내 것이 아니지만 특정한 나의 ‘경험’을 매개로 마치 나의 고통처럼 느껴져야 한다. 이제 “착함(선, 도덕, 윤리)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명료하게 답할 수 있다. ‘착함’은 ‘동정심’이다. 착함은 타인의 감정(고통)을 나의 유사한 경험을 매개로 공유하는 동정심에 기반해야 한다. 즉,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착함이다.
앞의 커플 이야기로 돌아가자. 여자와 남자 중 누가 착한 사람인가? 이 질문의 답은 그 여자와 그 남자 자신만이 할 수 있다. ‘동정심’은 한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만 원짜리 한 장을 깡통에 넣었던 행위가 내면에 일었던 ‘동정심’ 때문이었다면 그건 착함이다. 하지만 여자가 걸인에게 돈을 주었던 행동이 어떠한 감정적 공유(고통의 공감) 없이, 부모나 학교에서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어야 한다’는 학습의 결과였다면 그것은 선한 것도 윤리적인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남자가 돈을 주지 말라고 했던 것도 ‘착함’ 일 수 있다. 남자가 그 걸인의 고통을 절절하게 공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걸인의 자립을 위해서 돈을 주지 않았다면, 그 행동은 선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동이다. 반면 남자가 돈을 주지 않았던 행위가 동정심의 결과가 아니라, 그저 부모, 학교, 사회에서 ‘일하지 않고 구걸하는 사람은 도와주는 게 아니다’라는 학습의 결과였다면, 그건 선하지도 도덕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어떤 행위 자체만 놓고 선함과 윤리성을 예단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동정심’, 즉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냐는 것이다. 이것이 착함의 시작이고 끝이다. 우리의 믿음과 다르게, 겉으로 드러난 행동 자체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걸인을 폭행하는 것도 착한 행동일 수 있다.
‘한 남자가 서 있다. 한 걸인이 남자에게 모자를 내밀었다. 남자는 그 걸인의 눈빛을 잠시 응시했다. 그리곤 갑자기 걸인에게 달려들어 그 걸인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주먹으로 얼굴을 때려 이가 부러졌고, 무자비하게 목을 잡아 머리를 벽에 찧었다.’
이 남자보다 악하고 비도적이며 비윤리적인 인간도 없다. 이 남자는 ‘보들레르’라는 시인이 쓴 「파리의 우울」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노래했던 보들레르는 왜 그처럼 악하고 비윤리적인 인물을 그렸던 걸까? 그 남자는 걸인의 눈빛에서 고통을 느꼈고 진심으로 그를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다. 오해가 더 커지기 전에, 「파리의 우울」을 잠시 읽자.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 늙어빠진 불한당은 나에게 ‘좋은 징조’로 생각되는 증오에 타는 시선을 보내며 나에게 달려들어 내 눈을 멍들게 하고 이를 네 개나 부러뜨렸다. (…) 나는 그에게 말했다. “선생, 당신은 나와 동등하오! 나와 나의 돈주머니를 나누는 영광을 베풀어주시오. 그리고 당신이 진정한 박애주의자라면 당신의 동료들에게도, 그들이 당신에게 동냥을 구걸하거든, 방금 내가 마음 아프게도 당신의 등에 시도한 ‘수고’를 낳게 했던 이론을 적용시킬 것을 기억하시오.”
그 걸인은 남자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분노했고, 그 분노로 남자를 공격했다. 남자의 눈을 멍들게 했고, 이를 네 개나 부러뜨렸다. 그 남자는 걸인에게 한 인간으로서의 자긍심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여자처럼 돈을 주는 것도, 그 남자처럼 외면하는 것도 그 걸인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앞의 연인보다 이 남자가 더 착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자긍심이 깨어난 걸인은 더 이상 걸인이 아닌 사람이 될 테니까.
착함은 외면적으로 보이는 행위, 행동이 아니다.
착함에서 중요한 것은 외면적으로 보이는 행위, 행동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행동이 전혀 착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세상 사람들이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행동이 무엇보다 착한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선거철에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을 안아주는 국회의원보다,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아이들의 종아리를 때리는 수녀가 더 선하며,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라는 걸.
착함이란 것은 결국 흄이 말한 ‘동정심’에 달려 있다. ‘타인의 상처, 아픔, 고통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느냐?’가 선함, 윤리성을 가늠하는 유일한 기준인 셈이다. 전장에서 부상을 당해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전우의 숨을 끊어주는 건, 선한 행동이다. 살아날 가능성 없이,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연인의 숨을 끊어주는 건 윤리적인 행동이다. 그 전우와 연인에 대한 애절한 ‘동정심’만 있다면 말이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흄의 이 말을 기억하자. ‘이성은 정념(감정)들의 노예여만 한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선하고 윤리적인 것이 무엇인지, 또 그런 행동과 실천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잠시 멈추어야 한다. 그 이성의 작용의 멈추고, 감정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얼마나 타인의 상처와 고통에 공감하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런 ‘동정심’ 없이 하는 어떠한 행동, 설사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착하다고 칭송하는 행동도 선하거나 윤리적이지 않다. 반대로 그런 동정심이 있다면, 어떠한 행동, 설사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쁘다고 비난하는 행동도 선하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이다.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