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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는 여행'으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피히테의 '자아'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오늘 영화 보러 가자?”
“글쎄. 오늘은 좀 그러네”
“몸이 안 좋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혼자 있고 싶어서”
“야, 너 답지 않게 왜 그러냐?”     


 정은과 예빈은 친구다. 정은은 늘 그랬던 것처럼 예빈에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고, 예빈이는 ‘혼자 있고 싶다’며 거절했다.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는 정은의 이야기는 예빈의 낯선 모습 때문이었을 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빈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다운 게 뭐지? 아니, 나는 누구지?’ 비단 예빈의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은 대단히 철학적이어서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감수성 폭발하던 사춘기 시절에는 떨어지는 낙엽 때문에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 결혼을 하고, 사회인이 되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의미 없는 일상이 반복되거나 삶이 내 맘처럼 풀리지 않을 때, 깊이 눌러놓았던 질문이 불쑥 올라온다.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은 언제나 삶과 붙어 있기에 중요하다.



행복은 알면서도 안 되는 것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 알게 된다. 행복이란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긍정하며 사는 것, 즉 나답게 사는 것이란 걸. 그렇다. 우리가 행복에서 멀어진 이유는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답게 사는 것이 행복이란 건 알지만, 정작 나답다는 것, 즉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니까. 이제야 알겠다.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나겠다는 사람이 왜 그리도 많은지.

      

 세계일주를 떠나고, 산티아고 길을 걷고, 심지어 속세를 떠나 절로 들어가는 것도 모두 여행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그들은 모두 행복해지고 싶은 게다. 행복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나는 누구일까?’에 답하는 일. 삶의 굽이굽이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관계, 사건을 통해 불현듯 엄습해오는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나름의 답을 할 수 있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 


           

‘자아’自我를 찾으려 했던 철학자, 피히테

     

‘피히테’라는 철학자를 만나보자. 피히테라면,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이리 답해줄 것 같다. ‘나는 자아自我다’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흔히 ‘자아’는 ‘나’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까닭이다. 피히테의 대답은 ‘나는 나다’라는, 의미 없는 동어반복처럼 들린다. 하지만 피히테의 ‘자아’는 흔히 사용되는 ‘나’라는 단어와 조금 다른, 복잡한 함의를 갖는다. 피히테의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이해하기 위해 ‘자아’ 개념을 알아보자.


 피히테의 ‘자아’는 다소 복잡한 개념이다. ‘자아’는 직접적으로 경험되지 않고 인식되지도 않지만 주체와 대상을 연관 지어 통일시키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아’가 있기에 밥(대상)은 인간(주체)이 먹는 것이라는, 주체와 대상을 연관 짓고 통일시킬 수 있다. ‘자아’가 없다면 인간(주체)은 밥(대상)을 보고 그것이 먹는 것인 줄 모르게 된다. 말하자면, ‘자아’는 일종의 자기의식인 셈이다. 피히테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그것(자아)은 우리의 경험적 의식 상태 속에서 나타나지 않고 나타날 수도 없는,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모든 의식들의 기초에 놓여 있어서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활동을 표현하는 데 있다.” 「전체 지식론의 기초」

     

 모든 의식들의 기초에 놓여 있어서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그 ‘활동’이 바로 자아이고 자기의식이다. 피히테는 이 자아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자, 모든 것의 기초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지 않은가? 누구든 이 자아(자기의식)를 통해 ‘나’를 규정하게 된다. 밥을 보면 ‘먹는 나’로, 책을 보면 ‘읽는 나’로, 샌드백을 보면 ‘때리는 나’로 정립되는 것은 ‘자아’(자기의식) 때문 아닌가. 자아(자기의식)가 없다면 ‘나’라는 존재 자체를 규정할 수 없게 된다.


     

자아(자기의식)는 어디서 오는가? 

    

우리네 질문으로 돌아오자.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피히테는 ‘나는 자아다’라고 답했다. 이제 이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나는 자기의식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기의식이란 수수께끼만 풀면,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피히테는 이 자기의식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명제 ‘A는 A(A=A)’는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며그것도 그에 대해 최소한의 의심도 갖지 않고 인정하는 것이다. (중략나 안에 항상 같으며 항상 하나이고 동일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 정립된다이 단적으로 정립된 필연적 연관은 다음과 같이 하나로 표현될 수 있다=나는 나다.” 「전체 지식론의 기초

       

 얼핏 난해해 보이지만 내용은 어렵지 않다. A를 밥이라고 해보자. 이제 ‘A는 A다’는 ‘밥은 밥이다’란 말이 된다. 이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누구나 밥을 보고 밥이라고 인정하니까.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밥=밥’이라는 도식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떤 것’을 밥이라고 판단하는 ‘자기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피히테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기서 자기의식(자아)이란 것이 어디서 오는 눈치챌 수 있다. 기억! 각자가 갖고 있는 기억 때문에 ‘A(밥)=A(밥)’일 수 있는 것이다.


     

자아(자기의식)는 기억이다.

     

그렇다. 자기의식은 기억에서 온다. ‘밥=밥’이라는 판단은 ‘나=나’라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과거에 밥을 보았던 기억을 ‘나’가 갖고 있어야 지금 밥을 보고 그것을 밥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자기의식)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로 생각할 수 있는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은 자기의식을 가질 수 없고, 그래서 자아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또 치매 걸려 똥을 밥이라고 먹는 노인에게 자기의식 또는 자아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왜? 나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누구일까?’에 대해 명쾌하게 답할 수 있다. 자기의식은 기억이기에, ‘나’는 내가 갖고 있는 기억의 총합이다. 그게 바로 자아고 ‘나’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멀리 여행 갈 필요 없다. 펜을 들고 한 달 동안 자신의 과거 기억들을 더듬어 정리해나가면 된다. 그게 바로 ‘나’다.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나는 이유를 알겠다. 여행은 바쁜 일상을 벗어나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볼 여유를 주기 때문이고, 동시에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에 있을 때 잊고 있었거나 흐릿했던 자신의 과거 기억이 더 잘 떠오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내가 갖고 있는 기억의 총합이다. 자신과 평생을 살았지만 나를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알겠다. 살면서 기억을 왜곡하고 날조하며 또 어떤 기억은 애써 잊어버리며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했던 일상적 기억의 왜곡, 날조, 은폐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기억’을 믿지 못하게 되었기에, ‘자기의식’이 명료하지 못하고, 그래서 언제나 흔들리고 불안한 ‘자아’를 갖게 된 것은 아닐까?


      

기억을 모두 찾으면 행복해질까?


이제 이런 의문이 든다. 기억을 모두 찾으면 행복해질까? 기억을 모두 찾아,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행복해질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가장 먼저 긴 시간 왜곡, 날조, 은폐되었던 기억을 모두 찾아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까닭이다. 또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행복해질 것 같지는 않다. 과거의 기억을 찾으면 현재의 ‘나’에 대한 이해는 깊고 넓어지겠지만 그것이 행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기억은 ‘과거’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기억에 집착하면 불행해질 가능성이 높다. 불행은 언제나 과거의 집착으로부터 시작되니까.

     

 많은 남자와 연애를 해본 40대의 여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녀는 과거 연애의 기억을 정리하면서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라는 자기이해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자기이해는 역설적이게도 종종 그녀를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새로운 남자가 나타났을 때, 그의 매력에 빠지기보다 ‘예전에 그 남자랑 비슷한데’라며 그를 오해하느라 새로운 사랑을 놓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의 새로운 사랑을 가로막은 것은 다름 아닌, 애써 찾아낸 과거의 기억이다.

     

 기억은 자기이해를 돕지만, 서글프게 과거로 퇴행해 거기에 머무르게 만들기도 한다. 기억을 통해 ‘나(과거)=나(현재)’라는 연속적인 자아(자기의식)를 갖게 된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나(과거)=나(현재)’라는 자기의식은, 기억이 만들어 낸 착시효과다. 엄밀히 말해 ‘나’는 없다. 기억을 통해 이어지는 연속된 자기의식 때문에 고정불변의 ‘나’가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 ‘나’는 많은 사건을 통해 다양하게 변해왔던 수많은 과거 ‘나’의 잠정적이고 일시적 모습이다. ‘나’ 끊임없이 변해왔고, 또 변해갈 것이다. 우리는 그걸 기억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없다.




나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싶다면, ‘기억’을 찾으면 된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고 싶다면 다시 질문해야 한다.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라고 질문해야 한다.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기억해내야 하는 것이 있다. ‘나는 지금껏 끊임없이 변해왔구나!’라는 사실이다. 기억을 통해 퇴행적으로 과거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특정한 사건, 관계를 통해 자신이 끊임없이 다른 사람으로 변해왔었다는 기억을 찾아야 한다.

      

 어린 시절 엄마가 해준 김치찌개를 좋아했었다는 기억은 분명 ‘나’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답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 기억을 통해 계속 김치찌개에 머무르게 되는 것은 어째 좀 서글프지 않은가? 정작 기억해야 할 건, 엄마의 김치찌개만큼, 친구와 먹었던 떡볶이도, 연인과 먹었던 파스타도 좋았었다는 기억이다. 그 기억은 우리가 계속 다른 사람으로 변해왔었다는 자기의식(자아)을 갖게 된다


 이 자기의식은 소중하다. 과거의 특정한 기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기억을 만들 준비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자아(자기의식)는 '고정불변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자아다.


   

기억해내자! 잊기 위해서!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기억’을 통해 충분한 자기이해에 도달한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망각’을 역설한다. 마흔의 그녀는 언제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그건 과거의 기억을 모조리 ‘망각’ 뒤에야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 남자의 흔적에 머무르느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못할 게다. 그녀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다고 해도, 그건 과거의 사랑의 반복이고 변주일 뿐이다. 과거 기억에서 머무를 때 삶은 무겁고 어두워진다. 가볍고 밝은 삶에서 중요한 것은 ‘망각’이다. 이 망각을 위해서 기억이 필요한 것일 테다. ‘고정된 자아는 없었다’는 기억!

        

 니체는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은 낙타에서 사자로, 끝내는 모든 것을 망각하는 아이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우리를 유쾌하고 경쾌하게 해주는 기억은 ‘나는 끊임없이 변해왔다’는 사실의 기억이다. 이 기억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나’에 집착하지 않고 과거를 망각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어차피 고정된 ‘나’는 없으니 어제의 나는 잊어도 좋지 않은가? 그 망각을 통해서만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기억(자아, 자기의식)을 만들 수 있다. 

     

 새로운 기억으로 새로운 ‘자아’를 만나게 되는 것, 어제의 ‘나’를 잊고, 매일 새로운 ‘나’를 만나는 것, 그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해맑은 아이들의 행복함은 어제의 일을 잊고 오늘을 맞이함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망각할 수 있기에 매일 행복하다. 기억은 중요하다. 그것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게 되니까. 하지만 궁극적으로 기억이 중요한 이유는 망각하기 위해서다. ‘나’라는 존재의 기억을 제대로 발견할 때, ‘나’라는 존재를 망각할 수 있다. 기억해내자! 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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