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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현실에서 고민하고 있나요?

헤겔의 '변증법'

꿈 때문에 상처받는 이유

     

프로복서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 그는 꽤 좋은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이고, 두 아이를 둔 가장이다. 어린 시절부터 간절히 원했던 꿈이었기에, 종종 넌지시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실 내 꿈은 프로복서야. 언젠가는 꼭 이루고 싶어” 주위 사람들이 어떤 답을 했는지는 쉽게 예상된다. 친구들은 “야! 너 나이가 몇 갠지 아냐?”, 동료들은 “쓸데없는 생각 하다 내년 승진 누락되면 어쩌려고?”, 아내는 “정신 차려! 복싱이 밥 먹여 주니?” 부모는 “애비야, 딴생각 말고 열심히 일하거라”라고 말했다.


 프로복서를 꿈꾸는 직장인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그림을 너무 좋아하는 아이에게 선생은 “네가 아직 현실을 몰라서 그래. 지금은 영어 공부를 해야 해”라고 말한다. 세계일주가 꿈인 친구에게 부모는 “현실이 어떤지 모르니까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꿈꾸는 사람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상처받는다. 그리고 그 상처는 결국 ‘현실’의 문제로 귀결된다. 세상 사람들은 소망스런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정신 차리고 현실을 보라!”는 말로 상처를 준다.

     


'꿈'꾸는 사람은 '현실'적이지 않을까?

꿈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폭력적인 이분법을 강요받는다. “꿈이냐? 현실이냐?” 이 이분법은 ‘꿈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현실을 모르기에 꿈을 꿀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의 소망스런 꿈이 질식해가는 이유는 이 폭력적 이분법 때문이다. 우리의 꿈이 왜 켜켜이 먼지 쌓인 서랍 제일 밑 칸으로 밀려났을까? ‘꿈은 현실적이지 않다’, ‘현실을 모르기에 꿈을 꿀 수 있다’는 세상 사람들의 믿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소망스런 그래서 소중한 꿈을 지키기 위해서는 ‘현실’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꿈을 집요하게 가로막고 질식케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현실’의 문제인 까닭이다. “꿈꾸는 사람은 현실적이지 않아!” “현실을 모르니까 꿈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이야기는 정말 옳은 것일까?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 질문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꿈꾸는 사람은 현실적이지 않을까?”

     


변증법의 철학자, 헤겔

이 질문에 답해줄 철학자는 ‘헤겔’이다. 헤겔 철학의 대표 격인 ‘변증법’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다. 흔히 헤겔의 ‘변증법’을 ‘정(正)→반(反)→합(合)’이라는 도식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변증법을, ‘흰 것’(정)이 있고, ‘검은 것’(반)이 있을 때, 둘이 합해지면 ‘회색’(합)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식의 '변증법' 설명을 완전히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자.

  

 원시인이 한 명이 있다. 동굴에서만 살던 그가 머릿속으로 ‘편하게 살 수 있는 어떤 공간’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대로 움막을 지었다. 세월이 흘러 누군가 그 움막을 보고 ‘조금 더 안락한 어떤 집’을 생각했고, 기와집을 지어서 현실화했다. 또 세월이 흘러 누군가 그 기와집을 보고 ‘왕이 살 어떤 집’을 생각했고, 궁궐을 지어서 현실화했다. 마찬가지 과정을 통해 누군가 아파트와 초고층 빌딩을 구상하고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이 과정을 통해 헤겔의 변증법을 조금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변증법 : ‘정신(정)→대상(반)→정신(합)’


헤겔의 변증법 도식은 ‘정신(정)→대상(반)→정신(합)’의 반복으로 설명할 수 있다. 움막에서 아파트까지 변화하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애초에 원시인이 ‘정신’(정)으로 원시 형태의 주거 공간을 구상하고, 그것을 ‘대상’(반)인 움막으로 현실화했다. 그 ‘대상’(움막)은 다시 조금 더 안락한 집을 구상을 할 수 있는 ‘정신’(합)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다시 그 ‘정신’은 기와집이라는 ‘대상’으로 현실화되고 그 ‘대상’(기와집)은 다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 큰 집이라는 ‘정신’을 만들고, 그 ‘정신’이 아파트라는 ‘대상’으로 다시 현실화되는 것이다. 

     

 도식화하자면, ‘정신(움막의 구상)→대상(실제 움막)→정신(기와집의 구상)→대상(실제 기와집)→정신(아파트 구상)→대상(실제 아파트)’로 반복된다. ‘정’(정신)이 ‘반’(대상)을 만들어 내고, 그 ‘반’(대상)이 다시 발전된 ‘정’(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운동이 반복된다. 달리 말하자면, 생각했던 것이 현실화되고, 그 현실화된 것이 다시 그 현실적인 것을 극복할 새로운 생각을 불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헤겔의 변증법이다. 어떤 ‘정신’이 ‘대상’을 만들고, 그 ‘대상’이 다시 조금 더 높은 단계의 ‘정신’을 만드는 원환 운동이 변증법이기에, 헤겔의 변증법은 ‘정신’과 ‘대상’의 변증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이제 난해한 헤겔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헤겔은「법철학 강요」라는 저서를 통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 말 역시 이해할 수 있다. 머릿속(정신)으로 생각했던 것은 현실화되며, 그렇게 현실화된 것은 그 현실화된 것을 넘어설 수 있는 좀 더 진보적인 생각(정신)을 만든다는 의미다. 움막부터 아파까지의 역사적 흐름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모두 ‘동굴’(현실)에서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 ‘움막’(이성)은 그저 누군가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한낱 꿈일 뿐이다. 시간이 흘러 다들 ‘움막’(현실)에서 사는 것이 당연한(현실적) 것이라 믿을 때, ‘기와집, 궁궐, 아파트’(이성)를 생각하는 것은 그저 몽상가들의 꿈이었을 테다. 헤겔이 말한 ‘이성적인 것’을 '꿈'으로, ‘현실적인 것’을 '현실'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이제 눈을 돌려 움막부터 아파까지의 역사적 흐름이 아니라 그 속에 존재했던 한 개인들의 삶에 주목해보자.

  

 다들 ‘동굴’(현실)에서 사는 것에 익숙해하던 시대에 ‘움막’(꿈)을 구상했던 원시인은 어떤 존재였을까? 다들 ‘움막’(현실)에서 사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믿던 시기에 ‘기와집’(꿈)을 구상했던 사람은 어떤 존재였을까? 존재하지 않았던 궁궐, 아파트를 처음 구상했던 사람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들은 분명 모두 이상주의자였을 것이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세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움막, 기와집, 궁궐, 아파트라는 존재하지 않았던 '꿈'같은 일을 '현실화'시킨 사람은 모두 이상주의자라는 사실!


     

“꿈꾸는 자만이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이 꿈이 된다”    

  

이제 헤겔의 논의로부터 우리네 삶으로 돌아올 시간이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헤겔의 말을 이렇게 바꿔도 좋지 않을까? “꿈꾸는 자만이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이 꿈이 된다” 꿈꾸는 이상주의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집요하게 공격받는다. “꿈은 현실적이지 않아!” “네가 현실을 몰라서 꿈에 빠져 있는 거야!”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인 이런 충고에 헤겔은 이리 답해줄 것이다. “꿈꾸는 자만이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이 꿈이 된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동굴에 안주해서 사는 사람에게 동굴에서 사는 것(현실)이 얼마나 불편한지 보일 리가 없다. 오직 새로운 형태의 집을 꿈꾸는 사람에게만 동굴에서 사는 것(현실)이 얼마나 춥고 불편한 것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동시에 그 벗어나고 싶은 현실(동굴에서의 삶)이 바로 꿈(움막, 기와집, 아파트)을 가능케 하지 않는가!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라는 헤겔의 말은 옳다. 오직 꿈꾸는 사람에게만 현실이 보이며, 그 현실이 바로 꿈이 되니까 말이다.      




‘현실적’이라는 두 가지 의미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일주를 떠나겠다’는 꿈을 가진 사람을 알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그에게 쏟아낸, 조언과 충고를 가장한 비난을 알고 있다. “네 꿈은 현실적이지 않아” “현실을 모르니까 그런 꿈을 꾸는 거야” 누가 ‘현실’을 모르는 걸까? 영혼을 질식케 하는 직장의 ‘현실’을 모른 척하고 외면하고 있는 건 세계일주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다. 바로 아무런 꿈도 없이 하루하루를 때우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 ‘현실’에 직면할 용기가 없기에 그 현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세계일주를 꿈꾸는 사람이야말로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정확히 받아들였다는 측면에서 현실적이었다. 돈을 버는 것 이외에 어떤 의미도 없는 직장을 다니는 '현실'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정확히 받아들였다. 꿈을 꾸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보이기 마련이다. 이 얼마나 현실적인가. 둘째, 그 드러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더욱 현실적이다. 퇴직금을 계산하고, 보험과 적금을 깼지만 돈이 모자랐다. 그는 직장을 6개월 더 다니기로 했다. 세계일주를 떠나기 위해서. 이보다 더 현실적인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꿈꾸는 사람은 현실적이기에 이상주의자다.

그렇다. 꿈꾸는 사람은 현실주의자다. 꿈꾸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현실주의자가 된다. 우리는 허황된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을 현실주의자라고 믿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역설적이게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주의자는 현실을 보지 못한다. 정확히는 극복해야 할 ‘현실’은 외면하고 은폐하고, 순응하고 받아들여야 할 ‘현실’만을 인정한다. 이것이 정말 현실적인 걸까? “동굴에서 사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직접 집을 만든다고? 그건 너무 이상적이야”라고 말하는 원시인은 현실적인가?

      

 그 원시인이 받아들인 ‘현실’은 어리석음이나 비겁함의 발로일 뿐이다. 동굴 이외의 어떤 주거 공간을 이성적으로 상상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어리석음이고, 익숙하고 안정적인 동굴 밖으로 나가 새로운 주거 공간을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비겁함이다. 자칭, 현실주의자들이 꿈을 이루려는 사람들에게 조언과 충고를 하려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얼핏 드러나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내면 깊숙한 곳의 비겁함을 정당화하고 싶어서는 아닐까? “세계일주? 그건 현실적이 않아. 네가 현실을 몰라서 그래”라는 말은, 사실 “내가 세계일주를 가지 않는 건 어리석고 비겁하기 때문이 아니야!”라는 외침인 것은 아닐까?     


 

진짜 꿈 VS 가짜 꿈

     

여기에서 우리는 덤으로 ‘진짜 꿈’과 ‘가짜 꿈’을 판별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얻게 된다.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 꿈은 진짜 꿈이 아니다. 진짜 꿈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받아들여야 할’ 현실뿐만 아니라 ‘극복해야 할’ 현실도 드러낸다. 그래서 진짜 꿈을 꾸는 사람은 언제나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처음으로 움막, 기와집, 아파트를 꿈꿨던 사람이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었듯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현실’적인 것 너머를 꿈을 꾸는 사람은 언제나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계일주’, ‘영화감독’, ‘시인’, ‘프로복서’라는 꿈은 언제나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아니 그래서 그게 진짜 꿈이다. ‘먹고사는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라는 지금의 현실을 넘어서려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임원’, ‘건물주’ ‘투자고수’ 같은 꿈은 가짜 꿈이다. 그건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격려받는 꿈인 까닭이다. 그들은 순응하고 받아들여야 할 현실을 만을 인정할 뿐, 넘어서고 극복해야 할 현실은 외면하고 은폐하고 있는 까닭이다.   

  

 가짜 꿈을 꾸는 사람은 비현실적이고, 진짜 꿈을 꾸는 사람은 현실적이다. ‘임원’, ‘건물주’, ‘투자고수’를 꿈꾸는 사람은 돈이면 모든 것이 되는, ‘받아들여야 할’ 현실은 직시하고 있지만, ‘극복해야 할’ 현실은 외면하고 은폐하며 산다. 말하자면, 절반의 현실만 받아들이는 셈이다. 그래서 가짜 꿈을 꾸는 사람은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진짜 꿈을 이루려는 사람은 ‘받아들여할’ 현실뿐만 아니라,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극복해야 할’ 현실까지 모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진짜 꿈을 가진 사람은 현실적이다.  

     


꿈이냐? 현실이냐?’ 폭력적 이분법 너머

‘꿈이냐? 현실이냐?’라는 폭력적 이분법에 매몰될 때, ‘현실’은 ‘꿈’에 두 가지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첫째, 현실이 꿈을 교살시킨다. 소망스럽게 간직해온 꿈으로 한 발 내디디려고 할 때 우리를 주저하고 망설이게 만들었던 이야기가 바로 “넌 왜 그리 현실적이지 못하니?”아니었던가. 둘째, 현실은 꿈을 왜곡시킨다. 집요하게 우리에게 들러붙은 현실은 ‘하고 싶은’ 꿈을 ‘해야만 하는’ 목표로 왜곡시킨다. ‘임원’ ‘건물주’ ‘투자고수’라는 왜곡된 꿈은 그리 탄생했을 게다. 그러니 꿈과 현실에서 고민하고 있다면 헤겔의 말을 되새겨 볼 일이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다” 꿈과 현실은 양자택일해야 하는 모순적인 것이 아니다. 꿈을 꾸었을 때 비로소 현실이 보이고, 그 현실적인 것이 바로 우리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드러내게 된다. 움막을 꿈꾸었던 그 원시인처럼 우리 역시 각자만의 소망스러운 꿈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을 때, 두 가지 현실, ‘받아들여할’, ‘극복해야 할’ 현실을 모두 직면할 수 있는 현실주의자가 될 수 있을 테다. 그렇게 우리 모두 기어이 자신만의 소망스런 꿈을 이뤄내는 현실적인 이상주의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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