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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니체 '힘의 의지'

세상에 휘둘릴 때, 삶은 불안하고 우울해진다.
   

평일 아침 7시, 강남역에 가본 적이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있다. 가방을 둘러맨 학생들,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이 넘쳐 난다. 학생은 그 새벽에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분주하고, 직장인들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서둘러 회사에 가느라 정신이 없다. 그들을 세밀히 관찰해보면 보이는 게 있다. 다들 분주하지만, 그 인파 속에서 ‘유쾌함’ ‘즐거움’ ‘활기’라는 단어에 어울릴만한 모습은 찾기 힘들다. 그들의 표정에는 우울함과 불안함, 다급함이 묻어날 뿐이다.  

   

 비단 평일 아침 강남역의 모습이기만 할까? 우리는 대체로 유쾌하고 즐겁고 활기 넘치는 삶보다는 우울하고 불안하고 다급한 삶에 익숙해져 있다. 유쾌하고 즐겁고 활기 넘치는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하는 삶에서 멀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말처럼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일까? 그런 것도 같다. 새벽부터 일어나 공부하고 일하지 않으면, 요즘 같이 먹고살기 힘든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은 피상적인 이유일 뿐이지 본질적인 이유는 아니다.    



 본질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유쾌함, 즐거움으로부터 멀어지고 우울함, 불안함에 휩싸였던 본질적인 이유. 그건 우리가 세상에 휘둘리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그렇다. 외국어 공부, 자격증 공부를 유쾌하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직장 일이 즐거워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공부와 일을 하면서 점점 더 우울해지고 불안해진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이유가 ‘먹고살기 위해서’인 것은 아니다. 부모, 선배, 친구가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고 하니까 의심 없이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우울해지고 불행해졌던 근본 원인은 세상에 휘둘리며 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의 ‘이렇게 사는 게 정답이야!’라는 말에 휘둘렸기에 우울하고 불안하고 다급해졌던 것이다. 여유를 갖고 세상을 돌아보면 알게 된다. 똑같이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지만,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걸. 또 그런 사람들은 유쾌하고 즐겁고 활기 넘치는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유쾌하고 즐거운 삶을 원한다면 해야 할 질문은 ‘어떻게 먹고살 수 있을까?’가 아니다. ‘어떻게 세상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다. 

    


‘꿍꿍이’의 철학자, 니체

이 질문에 답해줄 철학자를 만나보자. 프리드리히 니체다. 니체에 관해서 알고자 한다면, 먼저 그의 ‘질문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니체 이전 철학의 주된 질문 방식은 ‘본질이 무엇이냐?’에 관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강함이란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고 가정해보자. 이에 대해 ‘힘이 센 것, 많은 지식,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답할 수 있다. 이런 답에 대해 니체 이전의 많은 철학자들은 “좋네, 그 모든 것이 강함이라면, 그것에는 공통점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다시 질문한다. 

     

 즉, 이 말은 강함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다. ‘힘이 센 것’, ‘많은 지식’,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이 모두 강함이라면,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바로 강함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이처럼 니체 이전의 서구 철학의 주된 질문 방식은 본질을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니체는 집요하게 본질을 묻는 이런 전통적인 ‘질문 방식’을 바꾸어 버린다.   


   

 니체는 ‘강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을 묻는 전통적 질문을 ‘강한 것이 무엇인지 왜 알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꿔버린다. 서구의 전통 철학은 진리에 집착했다. 확실하고 분명한 진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했다. 그래서 본질을 집요하게 물었던 것이다. 본질을 알 수 있다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니체는 진리 그 자체를 묻는 대신 진리를 사로잡고 있는 힘 혹은 의지가 어떤 것인지 묻는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니체는 꿍꿍이를 묻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강함의 본질을 알기 위해 질문한다면, 니체는 강함이라는 것을 알려는 꿍꿍이가 무엇인지 묻는 식이다. 

      

 니체 철학의 핵심은 진리라는 것 속에 어떤 것이 표현되거나 혹은 숨어 있는 것이 없는지 묻는 것이다. 쉽게 말해, 니체는 누군가 진리(이것은 무엇인가?)를 물을 때, ‘그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고 다시는 묻는 것이다. 니체는 진리 중심의 전통 철학에 ‘의미’와 ‘가치’를 끌어들이고 있는 셈이다. 이는 혁명적이다. 주어진 질문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대신 그 질문을 왜 하게 된 것인지, 즉 그 질문의 ‘의미’나 ‘가치’가 무엇인지 파악하게 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니체의 태도는 「유고」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본질이나 본성은 관점적인 것이며, 이미 다양성을 전제한다. 언제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그것은 나에게 무엇인가?’ (우리에게, 혹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등.....)이다........ 모든 사물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관계와 관점을 가지고 있는 존재자가 하나라도 빠져 있다고 해보자 : 그 사물은 여전히 정의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유고」

 


니체의 ‘힘의 의지’

이 지점에서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인 ‘힘의 의지’를 논의할 수 있다. 질문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건, 그 질문을 왜 하는지 안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해 그 질문에 관계된 ‘힘’을 안다는 말이다. ‘돈을 어떻게 벌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생각해보자. 이 질문 안에 매몰되면 할 수 있는 답은 ‘사업’, ‘취업’, ‘도둑질’ 같은 답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질문의 ‘의미’를 발견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니체 식으로 질문을 바꿔보자. “‘돈을 어떻게 벌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왜 할까?”  

   

 이렇게 질문을 바꿔버리면 그 질문을 한 ‘힘’을 알게 된다. 어떤 힘이 사람들에게 ‘돈을 어떻게 벌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불러일으켰는지 알 수 있다. 그 힘이 어린 시절 돈이 없어서 느껴야 했던 모멸감 같은 개인적인 상처일 수도 있고, 자본이 인간보다 높은 가치를 가지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일 수도 있다는 걸 그제 서야 파악하게 된다. 이제 ‘힘의 의지’를 조금 분명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의미’를 발견한다는 건, 주어진 대상을 점령하고 있는 ‘힘’을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것이든 거기에는 지배적인(명령 내리는) 힘과 피지배적인(복종하는) 힘이 결합되어 있다. 이 힘 중 어떤 힘이 지배적인 것인가 아닌가를 구별해주는 것을 ‘의지’라고 한다. 반대로 이러한 ‘의지’는 힘들 간의 관계에 의해서 정의되는 셈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바로 이 ‘의지’가 힘들 간의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니체는 바로 이 의지를 ‘힘의 의지’라고 말한다.


 조금 난해할 수 있으니 예를 들어보자. 교실에 선생과 학생이 있다. 선생은 선생의 힘이 있고, 학생은 학생의 힘이 있다. 대체로 교실에서 선생의 힘은 지배적인 힘이고, 학생의 힘은 피지배적인 힘이다. 교실 안의 ‘선생-학생’의 관계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은 어떤 ‘의지’가 이미 있다. 그 ‘의지’가 선생의 힘을 지배적인 힘으로 만들고, 학생의 힘을 피지배적인 힘으로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 의지가 ‘힘의 의지’인 셈이다. 니체는 「유고」를 통해서 힘에의 의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세계는 힘의 의지다.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 역시 이 힘의 의지다.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유고」

 


세상은 ‘힘 싸움으로서의 관계 맺음’이다.

니체는 세계는 ‘힘의 의지’라고 말했다. 또한 우리 역시 ‘힘의 의지’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세상 전체가 바로 ‘힘의 의지’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세상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실마리가 숨어 있다. 우리는 당연하고 자명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어진 삶을 그저 받아들인다. 그러니 ‘토익 점수를 어떻게 올리지?’ ‘자격증은 어떻게 따지?’ ‘돈은 어떻게 벌지?’라는 질문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다. 

   

 니체에게 세상은 자명한 것이 아니었다. 니체가 보기에는 세상은 지배적인 힘과 피지배적인 힘의 투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을 게다. 세상은 ‘힘 싸움 Machtkampf으로서의 관계 맺음’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었으니까. 정말 그렇지 않은가? 사장이 직원에게 무례하게 굴고, 이일 저일 함부로 시키는 것은 당연하고 자명한 것이 아니다. 사장은 자본이라는 힘이 있고, 월급쟁이에게는 그런 힘이 없으니, 그 ‘힘 싸움으로서의 관계 맺음’이 지금 같은 부조리한 ‘사장-직원’의 관계를 만든 것일 뿐이다. 

     

 그 ‘힘 싸움으로서의 관계 맺음’의 결과로 어떤 ‘힘의 의지’가 존재한다. 그래서 ‘힘의 의지’가 바로 세계인 것이다. 세상 자체가 이런 ‘힘 싸움으로서의 관계 맺음’으로 이뤄지니까. ‘부모-자식’, ‘선생-학생’, ‘사장-직원’, ‘남자-여자’ ‘대통령-국민’ 등 세상의 모든 관계는 결국 ‘힘의 의지’로 이뤄진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휘둘리며 사는 이유는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그것에 순응하며 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달리 말해 세계로서의 ‘힘의 의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지배적인 힘과 피지배적인 힘 간의 싸움을 외면하고 은폐한 결과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법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 어떻게 하면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세계로서의 ‘힘의 의지’를 폭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니체의 질문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진리를 묻는 대신, 그 진리를 묻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그것을 왜 묻는지,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그것을 묻는지, 질문의 의미와 힘을 드러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취업은 무엇인가?’를 묻는 대신, ‘취업은 무엇인가?’를 왜 묻는지, 그것을 묻는 꿍꿍이가 무엇인지 다시 물어야 한다. 그때 취업을 하지 않으며 생존조차 할 수 없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힘의 의지’가 사회 도처에 깔려 있다는 사실을 다시 보게 된다.

       

 니체의 업적은 분명하다. ‘힘의 의지’라는 개념을 철학에 끌어들임으로써, 이미 길들여진 세상을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평가할 수 있는 ‘비판철학’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니체는 새로운 질문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날 선 비판을 의식을 선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니체의 철학을 따라가다 보면 날 선 비판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비판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삐딱하냐?’ ‘왜 그리 부정적이야?’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세상에 휘둘리며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누군가에게는 부정적이고 삐딱해 보이는 그 날 선 비판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니체는 세계도 ‘힘의 의지’이지만, 우리 역시 ‘힘에의 의지’라고 했다. 나는 니체의 이 말을, 세상의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향한 날 선 비판 의식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의 소망스런 ‘힘의 의지’로, 세계를 구성한 ‘힘의 의지’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있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법? 그것은 세상의 ‘힘의 의지’를 드러낼 수 있는 다른 질문 방식의 날 선 시선 놓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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