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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요?

칼 맑스의 '역사유물론'

노력이 무색해진 시대

“네가 정말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있어?” 가끔 우리를 주눅 들게 하는 질문이다. 삶이 맘처럼 되지 않을 때, 그래서 주저앉거나 혹은 핑계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누군가 ‘최선을 다해 노력해본 적이 있느냐’고 돌직구를 날리면 뜨끔해서 주눅이 들곤 한다. 하지만 지금 세상 꼴을 보라. 비정규직이 난무하고 그나마 그 비정규직도 없어서 난리인 시대다. 비정규직도 없어서 햄버거 가게에서 알바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 그 햄버거 가게에서 1시간을 눈코 뜰 새 없이 일해도, 그 가게 햄버거 세트 하나 사 먹을 수가 없다. 이게 지금 세상 꼴이다.     


 이런 세상에서 ‘최선을 다한 적 있냐?’ ‘노력을 해봤냐?’는 이야기는 공허함이 아니라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그런 ‘노력’ 드립에 ‘혹시 내가 힘든 이유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주눅이 든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지금은 노력이 무색해진 시대다. 삼성을 세운 ‘이병철’, 현대를 세운 ‘정주영’이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은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가진 것 하나 없이 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던 그들이 지금 태어났다면, 운 좋으면 비정규직이고 무난하면 햄버거 가게 알바생이 되었을 거란 추측은 억측이 아니다.



노력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요?

그래서 영민한 사람들은 묻는다. “노력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요?” 지금은 영민한 사람들이 염세주의에 빠지지 않는 것이 힘든 세상이다.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사회를 바라보면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있는 집 자식은 큰 노력 없이 유학은 물론이고 건물까지 물려받고, 없는 집 자식은 ‘쎄가 빠지게’ 노력해도 비정규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상 아닌가. 이런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서 어찌 염세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노력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요?”라는 질문은 염세적이고, 냉소적이라기보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영민한 질문이다.  

    

 하지만 또 세상은 영민한 그래서 염세주의자가 된 이들에게 따져 묻는다. “그럼 어쩔 건데? 아무 노력도 안 하면 뭐가 달라져?” 노력이 무색해진 시대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이 질문에 뾰족이 답할 말도 없다. 아무리 부조리한 세상일지라도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인정하자. 우리는 부조리하고 불공정한 세상에 산다. 그래서 ‘노력’이라는 문제 앞에서 늘 고민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 강건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노력하면 정말 삶이 달라질까?” 


    

‘칼 맑스’의 ‘역사 유물론’

이 질문에 답해줄 철학자는 「자본론」으로 알려진 ‘칼 맑스’다. ‘노력하면 삶이 달라질까?’라는 질문의 답을 듣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역사 유물론’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역사 유물론’이라는 낯선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유물론’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쉽게 말해, 유물론은 ‘물질을 근본적인 실재’라고 여기는 이론이다. 이는 ‘마음이나 정신 같은 관념을 실재’로 보는 관념론에 반대되는 이론이다. 책상 위에 컵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유물론자는 컵이라는 물질이 실재라고 생각하고, 관념론자는 컵을 보고 우리의 정신에 생긴 관념(컵의 이미지)이 실재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맑스는 유물론자다. 물질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니 당연히 관념론을 비판했다. 하지만 동시에 맑스는 기존의 전통적인 유물론마저도 비판했다. 기존의 전통적인 유물론이 어떠했기에 맑스는 자신이 유물론자임에도 불구하고 유물론을 비판했던 걸까? 기존의 전통적인 유물론을 흔히 ‘기계론적 유물론’이라고 한다. 이 기계론적 유물론은 쉽게 말해, ‘인간이란 자기가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식이다. 대상을 구성하는 물질적인 것이 그 대상을 규정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유럽에는 과거 성城을 조금 개조해서 호텔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기계론적 유물론자에게 과거의 ‘성’과 지금의 ‘호텔’은 같은 대상이다. 미세한 개조와 보수는 이뤄졌을지라도, 그 대상을 이루는 물질적 면이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을 모르는 우리가 봐도 ‘성’과 ‘호텔’은 뭔가 다르지 않은가? ‘성-호텔’이 물질적으로 완전히 같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둘을 같은 대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맑스 역시 이런 기계론적 유물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실천’(Praxis)의 철학자, ‘칼 맑스’

물질적으로는 같은 ‘성-호텔’이지만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 맑스는 그 ‘뭔가’를 무엇일까? 맑스는 그 ‘뭔가’를 ‘실천’(Praxis)이라고 했다. 이 ‘실천’은 영어로 ‘practice’라고 번역되는데, 일반적으로 인간의 의식적, 능동적 활동으로, 이론이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거나 실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이 ‘실천’은 능동적인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맑스는 ‘성-호텔’의 차이가 바로 실천, 즉 능동적인 노력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조금 난해할 수 있으니 처음부터 다시 질문해보자. ‘성’城과 호텔은 분명 다르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다른가? 먼저 ‘성’城은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다. 과거 봉건시대의 ‘성’은 왕이나 귀족 계급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대의 ‘호텔’은 전혀 다르다. 성城과 달리, 호텔은 돈만 있으면 누구든 살 수 있다. 맑스는 바로 이 다름이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같은 실천을 통해 ‘성-호텔’의 차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시민혁명’이라는 실천을 통해 봉건제에서 민주제로 변화했고, ‘산업혁명’이라는 실천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런 역사의 변화를 통해 우리가 ‘성’과 ‘호텔’을 분명 다른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대상(성-호텔)을 규정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실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맑스의 유물론, 즉 ‘역사 유물론’의 관점이다. 개개인의 실천이 만들어내는 역사에 의해서 대상이 규정된다고 보는 것이 바로 맑스의 ‘역사 유물론’이다.  

    

 기계론적 유물론은 대상이 고정되어 있기에 관조하기만 되는 대상이었다면, 역사 유물론에서는 대상은 인간의 생활 과정, 실천 과정 속에서 변화되고 변혁되는 대상이다. 맑스의 저서 「임금노동과 자본」에 등장하는 유명한 이야기를 이제 이해할 수 있다. 흑인은 흑인이다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노예가 된다.” 흑인은 물질적으로는 흑인일지라도, 흑인이 노예가 될지 자유인이 될지는 전적으로 실천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단지 흑인이 노예가 되는 것은 실천이 없었던 시대의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의미다. 

    


‘노력’이 어떤 ‘실천’이었는지를 물어야 할 때

    

다시 우리네 삶으로 돌아오자. ‘노력하면 달라지나요?’라고 맑스에게 묻자. 맑스는 “그렇다. 세상은 수많은 실천(노력)으로 변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답해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답답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들 ‘열심’이라는 단어보다 ‘가혹’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릴만한 실천(노력)을 하고 살지 않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삶은 별반 달라지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맑스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암울하고 답답하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맑스의 ‘역사 유물론’을 가능케 했던 것은 분명 ‘실천’이다. 여기서 잠시 우리의 실천을 되짚어보자.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했던 실천(노력)은 무엇이었을까? 각자의 영어공부, 취업준비, 업무처리, 주식투자 아니었던가. 지금은 우리의 노력이 어떤 ‘실천’이었는지를 물어야 할 때다. 우리의 실천은 개별화되고 파편화된, 그래서 공동체를 와해하는 쪽으로 기능하는 실천이다. 그런데 흑인이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 된 것은 어떤 실천 덕분이었을까? 각자 더 인정받는 노예로, 더 순종적인 노예로, 더 경쟁력 있는 노예가 되기 위한 실천 덕분이었을까? 


     

‘저항’으로서의 실천을 하고 있나요?

   

결코 아니다. 흑인들의 실천은 노예의 삶을 단호하고 강건하고 거부한 실천이었다. 버스의 백인 전용 자리에 일어나지 않았던 어느 흑인 여성의 실천! 흑인이라는 이유로 음식점에서 거부당해서 자신의 금메달을 강물에 던져버렸던 어느 흑인 복서의 실천! 인종차별에 저항했던 수많은 개개인의 흑인들의 그런 ‘실천’ 덕분에 흑인은 자유인이 되었다. 그 치열하고 절절한 능동적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흑인은 여전히 노예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맑스가 말했던 ‘실천’은 더 인정받는, 더 순종적인, 더 경쟁력 있는 노예가 되려는 ‘실천’은 아니었다. 우리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실천’이다. 맑스의 ‘역사 유물론’과 ‘실천’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촛불과 짱돌을 들고 거리로 나가라는 것! 하다못해, 투표장으로라도 가라는 것! 그렇게 악착같이 저항하라는 것이다. 그 저항적 실천이 없다면 역사는 결코 우리 편이 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그 저항적 실천으로 역사는 비정규직과 알바의 편에 서줄 것이다. 맑스가 살아 있다면 분명 우리에게 그리 말해주었을 테다.


     

 칼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 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맑스가 말하고 싶었던 실천은 분명 저항적 ‘실천’이다. 그 저항적 실천은 ‘나’가 아닌 ‘우리’ 위한 공동체적 실천이다. 그래서 저항적 실천의 바닥에는 서로를 돌보며 사랑하는 마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어찌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할 수 있단 말인가. 흑인들의 그 저항적 실천은 서로를 돌보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했을 실천이었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노력한다고 달라지는 게 없는, 더 잃을 것도 없는 세상 아닌가.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필요하다. 노력하면 삶이 달라지는 세상이 필요하다. 그러니 지금은 맑스가 말했던 실천, 각자도생 하는 실천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저항적 실천이 필요한 때다. 그 실천이 하나하나 더해질 때, 분명 ‘노력하면 삶이 달라지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그 ‘실천’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것이다.

      

 공동체적이어서 저항적인 실천을 놓지 않고 버텨나갈 때 새로운 역사가 도래할 것이다. 비정규직과 알바들도 꿈꾸고 노래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 맑스가 말한 ‘실천’이 있다면, 그런 새로운 역사가 곧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나는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맑스를 믿기에, 그의 ‘역사 유물론’과 ‘실천’ 또한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나는 “노력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요?”라는 질문에 분명하게 답할 수 있다. “그렇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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