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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말'해야 하나요?

소쉬르 '랑그'

“넌 생각을 하고 말하는 거니?” 

“넌 생각을 하고 말하는 거니?”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핀잔이다.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를 했을 때 듣게 되는 핀잔이다. 부모나 선생 혹은 직장 상사에게 이런 핀잔을 들을 때면 여지없이 주눅이 든다. 시간이 지나도 그 핀잔이 머릿속을 맴돌아,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쉽사리 내뱉지 못하고 고민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걸까?”라고. 세상은 ‘생각하고 말하라’고 강요하고, 우리는 그 강요를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산다.     


 그 강요는 정당한 것일까? “넌 생각을 하고 말하는 거니?”라는 핀잔이 전제하고 있는 생각이 하나 있다. ‘생각이 말(언어)을 만든다’는 생각이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예쁘다’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꽃이든, 하늘이든, 사람이든 그 대상을 보고 예쁘다는 ‘생각’을 먼저 하고 난 이후에 예쁘다고 ‘말’(언어)하게 된다. 글도 마찬가지다. 최소한의 ‘생각’이 정리되고 난 이후에 ‘글’(언어)을 쓰는 게 가능하니까.



진중함과 소심함 사이에서

‘생각이 언어(말, 글)에 앞선다’는 것은 일반적 상식이다. 알 것도 같다. 말보다 생각이 앞서는 사람은 ‘진중한’ 사람이 되고, 그 반대는 ‘경솔한’ 사람이 되는 이유를. 유사 이래, 상식에 부합하는 자는 미덕의 대상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까? 진중함은 소심함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말하는 ‘진중한’ 사람이 되려다,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사는 ‘소심한’ 사람이 되는 경우는 너무 흔하지 않은가‘먼저 생각하고 나중에 말해야 한다’는 강박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진중함’은 ‘소심함’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진중함이 칭송받는 이유, 경솔함으로 비난받는 이유, 소심함으로 괴로워하는 이유는 모두 같다. ‘생각이 언어(말과 글)에 선행한다’는 진리처럼 떠받들어지는 상식 때문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이 상식은 정말 옳은 것일까? 철학을 한다는 건 너무나 자명해 보이는 진리나 상식을 낯설게 보고 그것에 과감하게 의문을 제기해보는 과정이다. ‘생각-언어’의 관계에 대해 성찰해보는 과정을 통해서 ‘진중함’, ‘경솔함’, ‘소심함’에 대한 조금 다른 관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언어의 달인, 소쉬르

‘생각-언어’ 관계에 대한 답은 ‘소쉬르’에게 듣는 것이 좋겠다, 소쉬르는 대표적 언어학자다.  먼저 소쉬르 이전, 언어에 대한 전통적 사고방식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전통적으로 언어(말, 글)는 어떤 사물을 지시하거나 언어 사용자의 의도를 대신했다. 언어를 통해 어떤 사물을 지시하거나 어떤 의도를 표현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보자. ‘네모’라는 말(언어)은 'ㅁ'의 이름이다. 'ㅁ'를 ‘지시체’라고 하는데, ‘네모’라는 언어는 그 지시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먹는다’라는 말(언어)도 누군가가 먹는 행위를 가리킨다. ‘네모’ 혹은 ‘먹는다’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어떤 사물을 지시하거나 어떤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는 언어(‘네모’라는 말과 글)와 지시체(ㅁ) 간에는 상응, 일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언어는 지시체를 반영한다’는 것이 소쉬르 이전 언어에 대한 전통적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소쉬르는 이런 언어에 관한 전통적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소쉬르는 ‘언어-지시체’ 간에 어떤 유사 관계나 일치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쉽게 말해, ‘네모-ㅁ' 사이에는 어떤 유사 관계나 일치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소쉬르의 주장은 놀랄 만큼 혁명적이다. 쉽게 말해, 'ㅁ'라는 지시체를 가리키기 위해 ‘니모’ ‘네오’라는 언어를 써도 상관없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황당하기까지 한 이야기를 납득하기 위해서는 소쉬르의 언어학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소쉬르의 ‘랑그’

소쉬르는 언어활동에 ‘랑그(langue, 언어)’와 ‘파롤(parole, 화언)’이 있다고 주장했다. 먼저 ‘파롤’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파롤은 화언, 발화로 번역되는데, 이는 어떤 말이 성대를 울려서 나오는 소리를 의미한다. “유미는 아름답다”라고 말했을 때, 성대를 울려서 나오는 억양, 음색, 음량, 음파가 파롤이다. 이 파롤의 특징은 일회성에 있다. “유미는 아름답다”는 문장을 말하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노인인지, 아이인지에 따라 파롤은 모두 달라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 말해도 말할 때마다 파롤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말할 때마다 미세하게 다른 억양, 음색, 음량, 음파를 가질 수밖에 없으니까.

     

 ‘랑그’는 무엇일까? 랑그는 언어를 사용할 때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 전체를 의미한다. 흔히 말하는 문법은 랑그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유미는 아름답다”라는 문장을 500명이 말하면 500개의 ‘파롤’이 생기지만 랑그는 다르다. 500명이 말하더라도 동일한 규칙에 의해서 동일한 동일 순서로 말해진다. 바로 그 언어의 규칙이 ‘랑그’다. 랑그의 특징은 사회성에 있다. 규칙이라는 것은 적어도 그것을 공유하는 대상이 둘 이상일 때 성립하는 것인 까닭이다. 랑그는 사회적인데, 소쉬르는 이 ‘랑그’야 말로 언어학의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일반언어학 강의」를 통해 소쉬르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랑그는 파롤을 통해 동일한 공동체에 속하는 화자들 속에 저장된 보물이며각 뇌리 속에혹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모든 개인의 뇌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문법 체계이다왜냐하면 언어란 그 어느 개인 속에서도 완전할 수가 없고집단 속에서만 완전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어학은 종종 장기로 비유된다. 랑그란 장기의 말들을 움직이는 규칙, 상대의 말을 잡아먹는 게임 규칙 전체를 의미한다. 여기서 랑그가 사회적이란 말의 의미가 드러난다. ‘차’車라는 말을 동전으로 바꿔도 장기를 두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도 랑그는 변하지 않는다. 언어는 내가 사용하든 안 하든 이미 나와 무관하게 '이미-항상' 존재하는 사회적인 것이다. 그래서 소쉬르는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랑그야 말로 언어학이 다루는 대상이며, 랑그는 모든 언어활동의 ‘사회적 규범’이며. 하나의 사회적 제도라고 말했다.

      

 ‘네모’를 ‘니모’ ‘네오’로 사용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도 이제 이해가 된다. ㅁ을 ‘네모’로 발음하기로 한 건 사회적 약속일뿐, 실제로 서로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ㅁ를 ‘니모’나 ‘네오’로 발음해도 랑그는 달라지지 않기에 상관없다는 것이다. 즉 대상과 언어(말, 글)는 언제든 달리 사용될 수 있는 자의적 관계다. 물론 ㅁ를 ‘니모’나 ‘네오’로 부르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사회적 약속이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소쉬르의 언어‘혁명’

  

소쉬르의 언어학은 종종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비유되며 철학적 혁명으로 이야기된다. 무엇이 혁명인가? 소쉬르는 ‘내’가 내뱉는 말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내뱉는 말은 누가 하는 것이란 말인가? 소쉬르는 그 ‘누구’를 랑그라고 했다. 소쉬르의 혁명성은 ‘랑그’라는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랑그는 개인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약속된 규칙 체계다. 우리가 말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적 규칙에 따르고 그 규칙 체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프랑스에서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불어의 규칙을 모르고, 그 규칙 체계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불어의 ‘랑그’를 모르기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랑그라는 개념이 가지는 함의는 혁명적이다. ‘언어(말, 글)의 의미는 개인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언어체계 안에 있는 랑그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개인들은 자유롭게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항상' 정해져 있는 랑그라는 그 사회적 규칙에 따라 의미를 말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네모’라는 말을 들을 때 ㅁ라는 의미를 떠올리는 것은 개인이 정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그 의미를 받아들이고 말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이 있다. 이런 언어적 의미들이 확장되면서 결국 ‘옳다/그르다’ ‘좋다/싫다’라는 가치 판단 역시 언어의 구속에 아래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가치 판단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라 믿지만 이 역시 사실은 이미 항상 정해진 사회적 규칙, 즉 랑그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피해의식’이란 말을 생각해보자. 피해의식은 ‘피해를 받아서 생긴 의식’이다. 여기에는 어떤 가치 판단도 없다. 하지만 누군가 우리에게 “너 피해의식 쩐다”라고 말했을 때 기분이 어떨까? 불쾌하다. 그 이유는 ‘피해의식’이란 말이 이미, 항상 사용되었던 사회적 규칙을 받아들이고 우리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일 테다. 누군가 ‘피해의식’란 말을 ‘그른 것’ ‘싫은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그건 자신의 선택이 아니다. 주어진 기존의 언어체계를 받아들인 결과일 뿐이다.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쉬르의 혁명성은 여기에 있다. 소쉬르에 이르러 사고나 판단은 각각의 개인들이 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의미체계 속에 있는 것이 되었다. 이것은 생각(의미를 찾고, 판단하는 것)이 개인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다. 개인의 생각은 언어구조에 지배받는다는 혁명적 견해가 가능해진 셈이다. 즉 생각이 언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생각을 만드는 말이다. 소쉬르의 이런 견해는 놀랍게도 ‘생각이 말(언어)을 만든다’는 우리의 통념을 뒤엎는다. 소쉬르라면 ‘말(언어)이 생각을 만든다!’고 말할 것이다.


 세상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는 이미 전제부터 틀린 이야기다.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쉬르의 말처럼, 말(언어)이 생각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건 소쉬르가 아니더라도 이미 한 번쯤 경험한 적이 있지 않을까? 정리되지 않았던 생각들이 말을 하고 글을 쓰면서 더 분명해지고 명료해졌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생각이 말을 만드는 게 아니라, 말이 생각을 만든다. 이런 분명한 삶의 진실에도 불구하고 왜 세상 사람들은 왜 그리 집요하게 ‘생각하고 말하라!’고 요구하는 걸까?   

   

 “넌 생각을 하고 말하는 거니?”라고 말했던 사람들의 면면을 떠올려보자. 나이가 많거나, 권위가 있거나, 힘 있는 사람들 아니었던가. 아, 알 것도 같다. 그들은 우리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던 것이다. ‘꼰대’로 대변되는 기득권은 언제나 어리고, 권위 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 했다. 후배가, 학생이, 부하직원이 그네들의 감정과 느낌, 욕망을 자유롭고 이야기할 때 선배, 선생, 상사는 언제나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하고 말하라!’고 우리를 다그쳤던 것이다.   



생각하지 않고 말해도 된다!

“학교가 군대도 아닌데 왜 선배에게 복종해야 하죠?” “등록금 투쟁을 도와주지 않는 교수님이 학생들의 행복을 말하는 건 위선적이지 않나요?” “경기가 좋을 때는 월급 안 올려주면서 경기가 나쁠 때 왜 월급을 깎는 거죠?” 이런 말들은 대체로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로 치부되기 일쑤다. ‘생각하고 말하라’는 논리로 우리의 입을 틀어막았던 게다. 그렇게 우리는 칭찬받는 ‘진중함’을 얻으려다, 가학적인 ‘소심함’을 얻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선배·선생·상사·사장으로 대변되는 기득권들은 아주 영민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기득권자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말(언어)이 생각을 만든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기득권에 도전하려는 ‘생각’ 자체를 못하게 하기 위해, 우리의 ‘말’부터 틀어막은 것은 아닐까? 정말 모를 일이다. 기득권이 원치 않는 말을 자유롭게 마음껏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가 자유롭게 마음껏 내뱉은 말이 곧 우리의 생각이 될 테고, 그런 생각은 필연적으로 기득권을 와해시키는 역할을 하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정시에 퇴근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퇴근 시간에 소심하게 눈치를 보는 걸 테다. 이런 일은 왜 일어났을까? “왜 정해진 퇴근 시간에 퇴근하지 못하나요?”라고 누구도 ‘말’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 ‘말’을 하지 못했기에 정시 퇴근이 정당하다는 ‘생각’을 못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시도 때도 없이 아무나 “왜 퇴근 시간에 퇴근 못하나요?”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생각’이 얼마나 당연한 생각인지를 진정으로 깨닫게 될 테다. 말(언어)이 생각이 만드니까.

     

 생각하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보다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내뱉는 말이 아니라면, 생각 없이 말해도 된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불편하다고, 부당하다고, 부조리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을 자유롭게 마음껏 말하자. 우리 내면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드러내자. ‘생각이 말(언어)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말(언어)이 생각을 지배한다’는 소쉬르의 이야기를 기억하자. 나이 많고, 권위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넌 생각을 하고 말하는 거니?”라고 다그칠 때, 빙긋이 웃으며 말해주자. “말을 해야 생각을 하게 되죠. 제가 말했으니 이제 선생·선배·사장님이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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