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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왜 내 마음대로 안될까요?

프로이트 '초자아'

저는 왜 비합리적일까요?

“뭐해?”
“짐 정리하지”
“피곤한데, 내일 하면 되잖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정리 안 하면 잠이 안 와”     


 민수와 수연은 긴 여행을 끝내고 밤늦게 집에 도착했다. 민수는 피곤해서 누웠지만 수연은 캐리어에서 짐을 주섬주섬 꺼내며 정리 중이다. 민수는 내일 같이 정리하자고 말했지만 수연은 그럴 수가 없다. 짐을 정리해놓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이 안 오기 때문이다. 이건 수연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늦은 야근 뒤 몸이 천근만근이라, 그냥 쓰러지고 싶지만 샤워를 하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사람도 있다. 또 몸이 힘들어 쉬고 싶지만 막상 쉬면 불안해서 다시 고된 일을 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도 있다.  

    

 생각해보면 참 비합리적이지 않은가. 늦은 밤이니 자고 내일 짐 정리를 하는 게 합리적이다. 몸이 천근만근이면 샤워는 내일 하는 게 합리적이다. 몸이 힘들면 하루 정도 맘 편히 쉬는 게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는 두 부류가 있다. 첫째는 그 비합리성을 정당화하는 경우다. “내가 좋아서 늦은 밤에 짐 정리하는 거야” “아무리 피곤해도 씻고 자는 게 좋아” “몸이 아파도 일하는 게 좋아”라는 식이다. 누가 보아도 비합리적인 행동이지만 자신은 그게 좋다고 자신의 비합리성을 정당화는 경우다.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 때

두 번째 경우는 수연이처럼 “마음이 맘대로 안 돼”라고 말하는 경우다. 자신의 행동이 비합리적이라는 것도 알고, 그 행동이 자신을 힘들게 한다는 것도 알지만, 그 행동을 멈출 수가 없는 경우다. 그네들은 “나도 맘 편하게 자고 짐은 내일 정리하고 싶다” “몸이 천근만근인데, 30분씩 샤워를 해야 하는 내가 나도 싫다” “하루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쉬고 싶다”라고 말한다. 첫 번째 부류보다 두 번째가 더 안쓰럽다. 자신의 비합리성을 정당화하는 사람은 그나마 마음은 편하다. 자신의 비합리성을 고칠 생각 자체가 없으니까. 후자는 자신도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고 싶지 않지만, 그게 마음처럼 안 되어서 힘든 것이다.

      

 우리가 정말 힘들 때는 어떤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 때다.  중요한 시험에 떨어졌을 때 상처받고 힘들지만, 그것은 우리네 영혼을 좀을 정도로 힘든 일은 아니다. 세상 일이 우리 마음처럼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영혼을 좀 먹을 정도로 힘든 일은, 닥쳐올 시험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공부가 하기 싫거나 안 될 때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내 마음처럼 안 되는 것, 그게 정말 우리를 힘들 게 한다.      


 ‘내 마음이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 놀라운 역설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내 마음을 바꾸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다. 사실 첫 번째 부류, 자신의 비합리성을 정당화해버린 사람들은 합리적인 사람들 인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사실을 이미 간파해서 자신의 마음을 바꿀 생각을 애초에 포기해버린 경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번째 부류가 합리적이긴 해도 지혜롭다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정신승리를 한다고 해도, 몸이 고된 삶은 계속 지속될 테니까. 내 마음이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마음을 분석하는 철학자, 프로이트

    

‘프로이트’라는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먼저 프로이트가 '마음'이란 것을 어떻게 파악했는지부터 알아보자. 프로이트는 마음이란 것이 ‘이드-자아-초자아’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드’, ‘자아’ ‘초자아’라는 생소한 세 가지 개념을 먼저 파악해보자. 

       

 먼저 ‘이드’는 쉽게 말해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신체로부터 기원하는 본능의 힘을 상징하는 게 이드다. 예를 들면, 배고프면 먹고 싶고, 졸리면 자고 싶은 그런 본능을 이드라고 말할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드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그런데 다 알다시피,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은 이드만으로는 살 수가 없다. 배고프다고 옆에 있는 사람 빵을 빼앗아 먹을 수도 없고, 졸린다고 길바닥에 드러누워 잘 수도 없다.

      

 이드는 철저하게 신체적 쾌락을 좇는다. 하지만 인간은 쾌락만 좇을 수가 없다. 현실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자아’가 드러난다. 자아는 쉽게 말해, 이드를 타이르고 달래서 현실적인 방법으로 쾌락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이드가 “배고파서 옆에 있는 사람 꺼 뺏어 먹을 거야”라고 말한다면, 자아는 “조금만 참아, 집에 가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한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외부 현실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욕망을 절충해 현실과 타협하게 된다. 바로 그 과정을 통해 ‘자아’가 자리 잡게 된다. ‘자아’가 ‘이드’를 억압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프로이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는 이드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합리적인 방법으로 이드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자아’는 ‘이드’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드'가 원하는 것을 현실적인 방법으로 해소해 주는 것이 '자아'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초자아’

이제 ‘초자아’에 대해서 알아보자. 먼저 프로이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인간 존재로 성장해가는 아이가 부모의 의존하여 사는 긴 유아기의 침전물로 자아 속에서는 하나의 특별한 기관이 형성되는 데여기서 부모의 영향은 지속된다이 기관은 초자아라는 이름을 얻는다이 초자아가 자아와 구별되거나 자아에 대립하는 한에서그것은 자아가 고려할 수밖에 없는 제3의 힘이다자아의 행위는 그것이 이드초자아 및 실재의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킬 때따라서 이들의 요구를 서로 조화시킬 수 있을 때 올바른 것이다.” 「정신분석학 개요」   

  

 ‘초자아’는 쉽게 말해 사회적 질서, 규율, 법 같은 것들이다. 초자아는 기본적으로 자아에 대한 검열자나 재판관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드가 “배고프니까 옆 사람 꺼 뺏어 먹을 거야”라고 외칠 때, 자아는 “일단 조금 참아 보자”라고 달랜다면, 초자아는 “먹지 마!”라고 금지한다. 사회적 질서, 규율, 법에 의해 내면화된 금지의 목소리가 바로 초자아다. 이 초자아는 내 마음속에 울리는 (무언가를 금지하는) ‘부모’의 목소리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사회적 질서, 규칙, 법들은 대부분 ‘부모’라는 존재에 의해서 훈육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아와 초자아 사이 관계의 세부 사항은 보통 아이의 부모에 대한 관계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부모의 영향으로 작용하는 것은 부모의 개인적 존재만 아니다부모에 의해 이어지는 가족인종 및 민족 전통의 영향과 부모가 대변하는 각각의 사회적 환경의 요구도 작용한다" 「정신분석학 개요」

      

 이제 ‘이드-자아-초자아’의 관계를 정리해보자. ‘이드’가 신체적 쾌락에 따라 움직이려 할 때, ‘초자아’는 내면화된 질서, 규율을 통해 이드의 욕망을 금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드와 초자아는 언제나 충돌할 수밖에 없다. 충돌하는 이 둘을 화해시키고 조절하고 균형을 잡는 것이 ‘자아’다. ‘이드’는 ‘졸리니까 길바닥에서 잘 거야!’라고 말하면, ‘초자아’는 ‘하지 마! 그게 인간이 할 짓이야!’라고 말하면서 다툴 때, ‘자아’는 ‘조금 참았다 집에서 가서 자면 되잖아’라고 둘을 화해시키고 절충하고 균형을 잡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발적인 양심의 목소리나 도덕적인 의지 같은 것들도 초자아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우리가 자발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양심적 혹은 도덕적 의지나 행동들도 사회적 금지 혹은 검열에 의해 형성된 초자아의 발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 침을 뱉지 않거나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은 자발적인 의지와 행동이라고 믿지만, 사실 그건 부모나 선생의 훈육으로부터 발생한 초자아의 검열일 수 있다는 말이다.



초자아,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이유

이제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왜 피곤한데도 집안 정리를 해야 하고, 샤워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고된 몸을 쉬게 해주고 싶은데 왜 마음 편히 쉬지 못할까? 이렇게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이유를 프로이트의 ‘초자아’라는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미 내면화되었기에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부모·선생·사회가 훈육했던 목소리가 내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피곤해서 정리하고 싶지 않을 때, 샤워하지 않고 그냥 자고 싶을 때, 몸이 지쳐 하루 정도는 쉬고 싶을 때, 마음처럼 할 수 없는 이유를 이제 알겠다. 초자아의 금지의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집구석을 이렇게 해놓고 잠이 오니?” “안 씻고 침대에 올라가는 건 절대 안 돼!” “대낮에 누워 있는 건 날건달이나 하는 짓이야!”라는 초자아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마음이 마음처럼 안 되는 것이다. 이건 마치 언제 어디에 가더라도 부모와 선생이 우리 옆에 귀신처럼 들러붙어 있는 장면과 흡사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귀신이 우리 마음속에 살기 때문에 그 초자아의 목소리가 마치 내 목소리처럼 들린다는 사실이다. 강박적으로 집 정리를 하고, 하루에 1시간씩 샤워를 하면서도, ‘내가 원해서 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제 이해가 된다. 초자아의 금지의 목소리가 이미 내면화되었기 때문에 마치 자신의 목소리처럼(자신이 원해서 하는 것이라) 느끼는 까닭이다. 초자아 목소리가 강한 사람일수록 이드와 자아를 심하게 압박해서 피곤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내 마음이 내 마음처럼 안 되는 그 피곤한 삶 말이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는 법

어떻게 해야 할까? 자아가 원활히 작동할 수 있게 하면 된다. 이드, 초자아, 자아 중에 가장 합리적인 것은 자아다. 이드는 ‘본능적’이어서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고, 초자아는 ‘사회적’(금지의 목소리)이어서 신체를 구속하기 때문이다. 자아는 본능적이지도 않고, 사회적이지도 않다.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 그래서 합리적이다. 자아가 원활히 작동하면 너무 피곤할 때는 하루 정도는 집안 정리와 샤워를 건너뛸 수도 있고, 몸이 고단할 때는 평일 하루 정도는 마음 편히 쉴 수 있다.

     

 다시 질문해야 한다. 자아는 어떻게 원활히 작동할 수 있을까? 그 답은 ‘초자아’에 있다. ‘자아’는 ‘이드-초자아’ 충돌의 균형이다. 그런데 신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드 자체가 신체에서 기원한 것이니까. 그러니 자아의 변화는 초자아에서 답을 구해야 한다. 초자아의 금지의 목소리가 약해지는 만큼 자아가 잘 작동할 수 있다. 귀신처럼 우리에게 들러붙은 있는, 부모·선생·사회의 목소리는 훈육의 결과일 뿐, 진짜 우리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초자아는 낡은 유물이다. 우리네 삶을 피곤하게 하는 유물. 그 유물이 우리네 마음에서 극복하는 만큼 자아는 변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 집 정리를 하지 않아 불안할 때, 샤워를 하지 않아 잠이 안 올 때, 평일에 쉰다는 이유로 죄책감이 들 때, 먼저 이렇게 뇌 되자. “초자아라는 귀신이 또 내 마음속에서 나를 조종하고 있구나!” 그 불안, 불면, 죄책감은 내 것이 아니라 부모·선생·사회가 남긴 금지의 목소리에서 기원한 것임을 간파하자. 


 그 첫걸음을 뗄 수 있다면, 조금씩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아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그러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임제의 사자후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왜 임제는 부처와 부모를 죽이라고 했을까? 그 둘이 초자아의 원형적 형태라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임제는 우리 내면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초자아를 극복하는 만큼 조금 더 기쁘고 유쾌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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