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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까요?

칸트의 ‘아 프리오리(a priori)’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니?

초등학교 시절, 친구가 느닷없이 2층에서 뛰어내렸다. 그 친구는 다리가 부러졌고 한 동안 깁스를 하고 지내야 했다. 선생은 아이에게 ‘왜 그랬냐?’고 물었다. 아이는 천진한 표정으로 “2층에서 뛰어내리면 진짜 아플지 궁금해서요”라고 답했다. 선생은 황당한 표정으로 아이에게 말했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냐?” 철없는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로 끝낼 수 없는 이야기다. 유사한 일들이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자퇴, 사표, 세계일주, 이혼, 귀농 등 무엇이든 상관없다. 세상이 암묵적으로 정해놓은 기준에서 벗어난 시도나 도전을 고민해본 적 있다면 다들 한 번씩 들어봤을 테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야 봐 아니?” 이 말은 학교를 그만두면, 직장을 때려 치면, 세계일주를 떠나면, 시골로 내려가면, ‘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보이지 않느냐?’는 의미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어찌 보면 세속적이기까지 한 이런 이야기는 심오한 철학적 주제 하나를 담고 있다.


 그 대상이 무엇이건, ‘경험해야 알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경험주의자는 ‘그렇다’라고 답할 테고, 합리주의자는 ‘아니다’라고 답할 테다. 어떤 것이 옳은 답일까? 사실 우리는 이미 나름의 답을 갖고 있다. ‘경험’으로 어떤 지식을 알게 된 경우가 많거나 혹은 그런 결정적 사건 있었던 사람은 경험주의자가 된다. 반대로 생각하는 것으로 어떤 지식을 알게 된 경우가 많거나 혹은 그런 결정적 사건이 있었던 사람은 합리주의자가 된다. 



경험주의자도, 합리주의자도 아닌 철학자, 칸트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삶에서 중요한 질문에, 지나온 자신의 한정적이고 협소한 삶을 성급하게 일반화시켜 답한다는 사실이. 철학자가 필요하다. 이 중요한 질문에 보다 분명하게 답해줄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다. ‘경험해야 알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칸트는 기본적으로 ‘아니다’라고 답한다. 참된 지식, 확실한 지식(이것을 철학에서는 ‘진리’라고 한다)이란 것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백조는 하얗다’는 것은 참되고, 확실한 지식인가? 아마 대부분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 지식은 참되고, 확실한 것이 아니다. 아직 검은색 백조를 경험하지 못했을  뿐이다. 실제로 1697년 호주 대륙에서 검은 백조가 발견되면서 ‘백조는 하얗다’는 건 참되지도, 확실하지 않은 지식이 되었다. 칸트는 이처럼 눈, 귀, 코 등의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인 경험으로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생각에 강한 의심을 품었다.


 그렇다면 칸트는 합리주의자인 걸까? 이성으로 생각해서 참되고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을까? 그 또한 아니다. 칸트는 몸을 사용한 경험으로도, 머리를 사용한 이성으로도 참되고 확실한 지식(진리)에 도달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경험도, 이성도 아니라면, 칸트는 어떻게 참되고 확실한 지식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칸트는 이 질문에 답함으로써 서양 철학사에 묵직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흔히 칸트를 ‘서양 철학의 저수지’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칸트의 ‘아 프리오리(a priori)’


‘아 프리오리(a priori)’라는 개념이 있다. 라틴어로 ‘처음부터, 최초의 것으로부터’라는 의미다. 칸트가 말한 ‘아 프리오리’는 ‘선험적’이라는 말로 번역되는데, 이는 ‘경험하기 이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험적’은 ‘경험적’이라는 말의 반대 짝 말이다. 칸트는 참되고 확실한 지식은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선험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선험적 것이라는 개념이 쉽사리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도대체 경험하지 않고 알 수 있는 것이 있긴 한 걸까?

      

 ‘불은 뜨겁다’는 것도 어린 시절 데었던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고, ‘겨울은 춥다’는 것도 한 겨울 매서운 찬바람을 경험했기에 알게 된 것 아닌가? 이처럼 참되고 확실한 지식은 모두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경험은 주관적이고, 한정적이기에 그것으로 참되고 확실한 지식에 도달하기 어렵다. 내가 보기엔 분명 흰 백조이지만, 옆 사람이 보기엔 회색 백조라면, 그 백조는 흰 백조인가? 회색 백조인가? 또 모두가 백조를 희다고 경험해도 ‘백조는 희다’고 확정할 수 없다. 아직 검은 백조를 경험하지 못했을 뿐이니까.

        

 칸트는 '선험적'인 것으로 이 문제를 돌파하려고 한다. 경험하지 않고도 이미 알고 있는 어떤 조건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그렇다면, 참되고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게 된다. 경험은 상황마다,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경험 이전의 선험적인 것은 상황과 사람에 관계없이 동일할 테니까 말이다. 선험적인 것은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경험의 주관성과 한정성으로부터 자유롭다. '선험적'인 것은 누구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확실한 것이기에 참되고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준다. 

     

 칸트는 이런 조건 즉 경험 이전에 이미 주어진 조건, 경험에 좌우되지 않는 확실한 조건을 ‘선험적 조건’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연필, 볼펜, 사인펜 등등 있지만 이것들은 모두 ‘필기구’라는 공통된 형식을 갖고 있다. 바로 이 공통적인 어떤 형식을 ‘선험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이것이 연필이냐 볼펜이냐 사인펜이냐는 경험을 통해야 할 수 있지만, ‘쓸 수 있는 어떤 것’(필기구)이라는 동일한 형식은 경험 이전에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 이전의 동일한 어떤 형식이 칸트의 ‘선험적 조건’이다.


       

칸트의 감성과 지성

     

칸트는 바로 이런 선험적 조건을 발견함으로써 참되고 확실한 지식에 도달하려고 했다. 이 선험적인 것을 조금 더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칸트의 ‘감성’과 ‘지성’이라는 개념을 파악해야 한다. ‘감성’(Sinnlichkeit)은 대상을 받아들이는 기관을 말한다. 어떤 지식이든 그것은 보고, 듣고, 만지는 감성을 통해 받아들인 인식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지성’(Verstand)은 감성을 통해 받아들인 인식으로 대상을 분별해내고 대상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을 하는 기관이다.


“감성이 없으면 대상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성이 없으면 대상은 절대로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지성 없는 감성은 맹목적이고, 감성 없는 지성은 공허하다.” 「순수 이성 비판」    

 

 칸트는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감성과 지성이 모두 필요하다고 보았다. “지성 없는 감성은 맹목적이고, 감성 없는 지성은 공허하다”라는 칸트의 유명한 이야기도 이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칸트는 감성과 지성이 결합해야지만 제대로 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혹자들은 칸트를 경험주의(감성)와 합리주의(지성)를 종합했다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 역시 ‘감성’과 ‘지성’을 종합해낸 위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선험적 감성형식’ = 공간, 시간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감성이든 지성이든 그것은 인식에 관한 것이지, 참되고 올바른 지식에 관한 것은 아니다. 참되고 올바른 지식을 도달하기 위해서는 선험적인 것이 필요하다. 칸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험적 감성형식’과 ‘선험적 지성형식’을 찾아 나선다. ‘선험적 감성형식’은 감성을 통해 대상을 받아들이는 데 필수적이며 모든 인간이 경험보다 앞서 가지고 있는 형식이다. 즉 감성을 가능케 하는 경험 이전(선험적)의 조건이다.


 20대의 여성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런데 한 남자는 그 여성을 보고 ‘예쁘다’고 말하고, 다른 남자는 ‘별로다’라고 말할 수 있다. 동일한 대상을 보고 ‘감성’이 다르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왜 두 남자는 다르게 인식했을까? 그건 둘이 갖고 있는 서로 다른 경험 때문이다. 그 여성이 예쁘다고 말한 사람은 그 여성과 닮은 사람과 사랑에 빠졌던 경험 때문에, 별로라고 말한 사람은 그 여성과 닮은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랬을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개인의 경험 차이는 같은 대상의 다른 인식을 가능케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동일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는 ‘선험적 감성형식’은 없을까? 있다. 바로 ‘공간’과 ‘시간’이다. 어떤 여자가 아름다운지 그렇지 않은지의 인식은 다 다를 수 있지만, 그 여자가 카페라는 ‘공간’에, 1시라는 ‘시간’에 존재했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다르게 인식할 수 없다. 이것은 분명 경험 이전의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는 젖병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없지만(경험이 없기에) 지금(시간) 여기(공간)에 어떤 것(젖병)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칸트는 인간이라면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험적 감성형식’을 발견했다.


    

‘선험적 지성형식’ = 범주

   

칸트의 말처럼 ‘지성 없는 감성은 공허’하기에 ‘지성’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 ‘선험적 지성형식’은 인간이 공통된 분별, 판단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분별이나 판단은 경험에 의존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어떤 물체가 약인지 독인지는 직접적(먹어보든)이든 간접적(공부하든)이든 경험을 통해 분별하고 판단 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칸트는 경험하지 않아도 분별하고 판단 내릴 수 있는 ‘선험적 지성형식’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칸트가 말한 ‘선험적 지성형식’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그건 ‘범주’다. ‘크다-작다’ ‘하나-다수’ 등의 ‘범주’는 경험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다. ‘트럭이 자전거보다 크다’라는 지성의 분별·판단은 분명 경험적이다. 하지만 이 분별·판단이 가능하려면 먼저 ‘크다-작다’ 등의 ‘범주’는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범주’는 분명 선험적이다. 갓난아기는 트럭이 큰지, 자전거가 큰지는 알 수 없지만 ‘크다-작다’라는 범주는 이미 갖고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트럭이 한 대냐? 네 대냐?’라는 판단은 경험적이지만, ‘하나-다수’라는 ‘범주’는 선험적이다.

      

 칸트는 이 ‘선험적 지성형식’ 즉 ‘범주’를 통해 어떤 법칙을 인식하고 사물에 대한 분별과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선험적 지성형식’은 사람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변화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통된 것이다. 공통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공통된 판단, 분별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래서 참되고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주관적이고 한정적인 경험에 근거해서는 참되고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지만, 선험적인 지성·감성형식을 기초로 하면 참되고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사이

     

칸트에게 “경험해야 알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면, 칸트는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할 게다. 선험적인 것들, ‘시간’, ‘공간’, ‘범주’ 같은 것들은 분명 경험하기 전 알 수 있는 것들이기에 ‘그렇다’라고 답할 테다. 하지만 동시에 선험적인 것만으로 참되고 분명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시간’, ‘공간’, ‘범주’라는 선험적 조건에 몸을 움직여하는 경험을 통해 특정한 인식(정보)들이 더 해지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트럭이 자전거보다 크다’는 참되고 분명한 지식은 아침 9시에(시간), 집 앞에서(공간), 큰 것과 작은 것(범주)이 부딪히는 장면을 경험해야지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결국 참되고 확실한 지식은 시간, 공간, 범주라는 ‘선험적’ 형식에 어떤 ‘경험적’ 내용이 들어가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경험해야 알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칸트는 다시 ‘아니다’라고 답할 테다. 결국 경험이 없다면 참되고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으니까.

      

 젠장! “경험해야 알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칸트라는 큰 산맥을 겨우 넘어왔는데, 결국 우리가 얻은 답은 ‘모르겠다’ 아닌가.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밀고 가보자.


     

칸트의 선험적인 것은 허구다.

칸트는 분명 위대한 철학자이지만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 한계를 통해 “경험해야 알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다시 답해보자. 칸트가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말한 이유는 선험적 것들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칸트가 말한 선험적인 것은 존재하는 걸까? 먼저 선험적 감성 형식인 ‘공간’과 ‘시간’부터 살펴보자. 칸트의 철학은 뉴턴의 물리학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칸트가 ‘공간’과 ‘시간’은 경험 이전의 것이고 누구에게나 공통된 조건이라고 주장한 데는 뉴턴의 영향이 컸다.

     

 뉴턴 물리학에서 시간과 공간은 불변적이고 절대적이다. 마치 세상의 많은 물체들의 크기를 가늠하는 줄자의 눈금처럼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고, 불변적이다. 물체들의 변화를 가늠하는 기준이 바로 ‘시간’과 ‘공간’인 셈이다. 이는 누군가의 경험에 의해 달라지거나 변화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시간’과 ‘공간’에서 선험적 조건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라는 걸출한 천재의 등장으로 뉴턴의 물리학은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된다. 뉴턴의 물리학 앞에 ‘고전’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그것이다. 상대성이론은 간단히 말해, 빛의 속도로 빨리 운동하는 공간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간다는 이론이다. SF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우주선을 타고 오래 여행한 아버지는 아들보다 젊은 모습으로 우주선에서 내리는 장면. 영화 속 이 장면은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이 상대성이론은 뉴턴뿐만 아니라 칸트마저도 해체시킨다. 정확히 칸트의 ‘선험적 감성형식’인 ‘공간’과 ‘시간’ 개념을 해체시킨다.

     


 아인슈타인에 이르러 ‘시간’은 조건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는 것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즉, ‘시간은 선험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선험적 감성형식’인 ‘공간’도 마찬가지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공간은 균질적으로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중력이 강한 곳에는 구부러져 있다고 한다. 이는 ‘공간’은 중력장에 의해 다르게 경험된다는 의미다. 즉 칸트가 선험적이라고 했던 공간마저도 결국 상황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기에 전혀 선험적이지 않은 게 되어버린다.


 선험적 지성형식인 ‘범주’도 조금만 꼼꼼히 살펴보면 해체 가능하다. 이 ‘범주’라는 것도 철학자마다 다르게 설정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실제로 칸트가 제시한 12개의 범주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10개의 범주를 변용한 것이다. 결국 범주라는 것은 그 범주 이전에 범주를 나누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사람(철학자)마다 다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이 범주라는 것도 불변하고 모두에게 공통적인 선험적 조건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칸트의 선험은 허구다! 이 말은 결국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있는 건 없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칸트가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말한 선험적 조건이 모두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경험해야 알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조금 더 분명하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있는 건 없다. 물론 안다. 경험하지 않아도 어떤 것을 알 수 있다는 걸. 하지만 경험하지 않고 아는 것과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앎이다. 자동차를 책으로 배운 앎과 실제 운전을 하면서 배운 앎은 질적으로 다르다.

   

 조금 단정적으로 말해도 좋다면,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무엇인가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결국 온몸을 움직여 부대끼며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게 진짜 앎이다. 굳이 경험주의와 합리주의 중 하나만을 택하고 살아야 한다면, 경험주의자가 되는 게 낫다. 경험주의가 옳아서 아니라 경험주의가 우리네 삶을 더 풍성하고 유쾌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사랑에 관해서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사랑과 연애에 관한 책과 강연들이 넘쳐난다. 물론 그 책과 강연을 통해 사랑과 연애에 대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앎은 진짜 앎이 아니다. 창피하지만 고백하고, 아낌없이 사랑해주고, 아프게 이별하며 했던 연애, 그 온몸을 던져 경험했던 연애를 통해 얻은 사랑에 관한 앎은 깊고 찐하다. 그 깊고 찐한 앎만이 진짜 앎이다. 그리고 진짜 앎이 우리네 삶을 더 풍성하고 유쾌하게 만든다. 어쩌면 머리를 이용해 이성으로 앎에 도달할 수 있다고, 또 그러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가고 싶지만 그 미지의 곳이 두렵고 걱정스러워 책상머리에 앉아 인터넷으로 여행을 하려는 사람처럼.


    

칸트는 무시하고, 온몸을 던져 미지의 세계로 떠나자.

미지의 세계로 떠나자. 자퇴, 사표, 연애, 여행, 결혼, 이혼, 귀농, 뭐든 좋다. 온몸을 던져 경험하자. 위험할 수도 때로 상처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괜찮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건 ‘위험’과 ‘상처’가 아니다. ‘불안’과 ‘권태’다. 합리적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위험과 상처로부터는 달아날 수 있겠지만 결국 만나게 되는 건, 불안과 권태다. 경험적으로 살려고 하면 위험과 상처를 감당해야 하지만 불안과 권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어떤 삶을 원하는가? 아니 어떤 삶이 더 풍성하고 유쾌한 삶일까?

      

 이제 선택해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안전하고 안정된 그래서 동시에 불안과 권태에 잠식당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위험과 상처를 감당하면서 풍성하고 유쾌한 삶을 살 것인가? 방안의 책상에서 일어나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삶을 살고 싶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연애 책을 읽는 대신 매혹적인 사람에게 고백하는 삶을 살고 싶다. 나는 그렇게 끝끝내 경험주의자로 살고 싶다. 그것이 옳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아보니 그 삶이 행복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누군가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니?”라고 묻는다면, 단호하고 강건하게 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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