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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기다리는 삶

나의 글은 유리병 편지

나는 스마트폰 중독일지도 모르겠다.


"스마트폰 중독이냐?" 대화가 잠시 멈추면 어김없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친구가 한 말이다. 생각보니 그렇다. 나는 늘 상 스마트폰을 끼고 산다. 정말 나는 스마트폰 중독일 걸까?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다. 스마트폰으로 매번 확인하는 건, 주로 메일과 블로그, SNS다. 나는 왜 그리 수시로 메일, 블로그, SNS를 확인하는 걸까? 메일을 확인하는 건, 책 출간 일정이나 강연 요청을 확인하는 것이고, 블로그나 SNS는 내 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찬찬히 생각해보니 참 이상하다. 일에 관한 메일 확인이야 하루에 한 번이면 되고, 블로그나 SNS에 대한 반응은 알림이 올 때만 확인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나는 뭐가 그리 답답한 게 있다고, 수시로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았던 걸까? 알겠다. 외로웠던 게다. 홀로 글 쓰는 삶을 살고 있는 나는 만나야 할 사람이 그다지 없다. 그래서 외로웠던 게다. 그 외로움의 끝에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다. 


  '혹여 누군가를 나를 찾아주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에 매일 같이 그리도 스마트폰에 얼굴을 들이 밀었던 게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 그 ‘누군가’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 그 ‘누군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그 누구인지 모를, 그 '누군가'가 놓치고 싶지 않아서 스마트폰을 뒤적거리고 있었던 게다. 그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을 때, 내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그래서 조금 덜 외로워지게 되니까.


두 가지 기다림

그래, 나는 기다리는 삶을 산다. 그런데 기다리는 삶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첫 번째는 기다리는 사람을 알고 있는 경우다. 이 경우는 엄밀히 말해 기다리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기다리지 않는다. 긴 기다림의 끝에 있어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외롭고 서글프게 하는지. 그래서 누구를 기다리는 알고 있는 사람은 그 기다림에 지치기 전에 먼저 연락을 하게 된다. 그러니 누구를 기다리는지 아는 사람은 기다리는 삶을 살지 못한다.


  생각해보니 직장을 그만두기 전, 내 기다림은 항상 기다리는 사람을 알고 있는 쪽이었다. 직장에서 일을 할 때, 누구에게 연락이 올지 대략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외롭지 않았다. 아니 외로울 겨를이 없었다. 언제나 마음이 급했던 탓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대신 항상 먼저 연락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이 직장 동료였든, 아내였든, 친구였든. 기다리는 대상을 알고 있는 삶은 언제나 그렇게 애초에 기다림을 걷어 낸다. 그 지난한 외로움을 걷어 내기 위해서.


  또 하나의 기다림이 있다. 그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기다림이다. 기다림의 대상을 알지 못하는 기다림, 그래서 언제 그 기다림이 끝이 날지 알지 못하는 기다림. 이 기다림은 한없는 외로움과 고독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당연하다. 외로움과 고독을 걷어 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에게 먼저 연락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 기다림이 진짜 기다림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가 언제 나에게 다가올지도 모른 채 기다리게 되는 기다림.


기다림을 외로움을 감당하는 삶

기다림은 외로움과 고독을 동반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다리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기대처럼 기다리지 않으면 외롭고 고독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았다. 기다림의 시간이 주는 외로움과 고독으로부터 도피하고자 이리저리 먼저 연락하는 삶을 오랜 기간 살았다. 직장인이었을 때 내게 기다림은 없었다. 업무 연락을 계속 받았고, 퇴근 후에는 늘 동료들과 약속이 있었다. 그 사이에 또 만나야 할 사람은 뭐가 그리 많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외로웠고 고독했다. 아니 공허했다. 땅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게 아니라 몸이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직장을 떠나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은 지금은 외롭지 않으냐? 그도 그렇지가 않다. 말했듯이, 나는 스마트폰 중독처럼 보일 정도로 누군가를 기다리며 산다. 한 없이 외롭기 때문이다. 누구를 기다리는지도 모르기에 언제 그 기다림이 끝날지도 모른다. 또 먼저 연락할 수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나는 공허하지는 않다. 가끔 너무 외로워서, 누군가 나를 찾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지만, 두 발은 땅에 꼭 붙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 생각을 한다. 삶이라는 것이 기다림 아닐까? 누구를 기다리는 지도, 그래서 언제 그 기다림이 끝날지 결코 알 수 없는 기다림의 연속이 바로 삶인 것은 아닐까? 기다림을 감당하는 것, 외로움과 고독을 감당하는 것, 그것이 행복한 삶 아닐까? 잠시의 외로움과 고독을 감당하지 못해 이리저리 연락하는 삶, 그 끝에서 행복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잘 모르겠다. 누군가를 만나 행복할 수 있는 건, 그 누군가를 기다렸던 시간에 비례하는 건 아닐까?

 

  ‘파울 첼란’이란 시인은 ‘나의 시는 유리병 편지다’라고 말했다. 나 역시 시를 적어 유리병에 넣어 바다에 떠나보내는 심정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내가 포기 하지 않고 계속 글을 적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누군가의 손에 그 유리병이 들려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나는 오늘도 기다린다. 마치 영화처럼 누군가 내가 떠나보낸 유리병 편지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나주기를. 나는 그렇게 누군가를 기다린다. 나는 그렇게 외로움을 감당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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