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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두'가 되어, '한공주'를 사랑할 수 있을까?

'오아시스', 평균 이하 존재들의 평균 이상의 사랑

1.

시작한지 채 5분이 되지 않아 영화를 껐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영화는 남자가 직장을 잃고 생활이 어려워져서 이사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때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온갖 불길한 상상해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첫 장면은 내 머릿속에 있는 불길한 아니 끔찍한 상상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보여주었기에 차마 더 볼 수 없었다. 직장이 없는 나도 영화 속의 그 남자처럼 될까봐.      


 하지만 「오아시스」는 불편했지만 볼만했다. 이유를 안다. 「오아시스」의 ‘홍종두’까지는 차마 떨어지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장애인 아닌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홍종두’의 모습에서 나는 역설적이게 기묘한 안정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홍종두’와 ‘한공주’로부터 적정한 거리를 둘 수 있어서,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아픈 영화였을 그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었다.


  

2.

「오아시스」는 내내 내게 물었다. “이질적인 것들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겠니?” ‘홍종두’도 ‘한공주’도 이질적인 것들이다. 동물적이어서 이질적인 것들. ‘홍종두’는 정신의 동물성으로, ‘한공주’는 육체의 동물성으로 드러난다. 홍종두는 인간의 평균적 육체를 가졌지만, 정신은 평균치를 벗어나서 동물적이다. 홍종두는 본능에 충실하다. 강간, 폭행으로 감옥에 다녀왔고, 사회로 돌아와서도 동물적인 본능을 채우는데 급급하다.     

 

 ‘한공주’는 반대다. 홍경래가 장군인지 반역자인지를 두고 '홍종두'와 논쟁할 만큼 정신적으로는 평균적인 인간이다. 하지만 그녀의 육체의 움직임은 평균적이지 못하다. 그녀의 육체적 움직임은 인간의 평균치를 벗어나 있다. 육체를 통해 나오는 그녀의 말소리는 여느 동물의 울음소리처럼 동물적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오아시스」는 평균을 벗어난 존재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집요하게 내게 물었다.


     

3.

혼자 사는 ‘한공주’는 옆집 부부가 돌봐준다. 옆집은 좁은 집에 많은 식구가 산다. 그래서 옆집 부부 마땅히 섹스를 할 곳이 없다. 옆 집 부부는 혼자 사는 한공주의 집에서 섹스를 한다. 한공주가 그 장면을 보고 있는데도. 그 부부는 ‘한공주’를 인간으로 정확히는 인격체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보고 있는데 어떻게 발가벗고 섹스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한공주의 육체적 이질성이 그녀를 인격체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나는 달랐을까? 평균적이지 않아서 이질적이었던 사람들, 예컨대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 크고 작은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 혹은 동성과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을 나는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그네들을 바라보았던 시선은 발가벗고 섹스를 하며 아무렇지 않게 한공주를 쳐다보았던 옆집 부부 시선과 달랐을까? 달랐다면 무엇이 얼마나 달랐던 걸까?  



4. 

「오아시스」는 누가 뭐래도 사랑 영화다. 그래서 불편하다. 그 불편함은 내적 시선의 분열에서 온다. 영화 초반, 우리가 ‘홍종두’와 ‘한공주’를 이해할 수 없던 때, 그들의 사랑도 이해할 수 없다. ‘한공주’를 겁탈하려는 ‘홍종두’의 마음을 어떻게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조금씩 ‘홍종두’와 ‘한공주’를 이해하게 된다. 


 사랑받지 못해, 사랑하는 법도 몰랐던 순수하고 순진했던 한 남자를 알게 된다. 또 혼자 남겨진 외로움과 두려움에 간절히 누군가를 기다리던 한 여자를 알게 된다. 그렇게 그 남자와 그 여자가 만들어내는, 물고 빨고 다투고 화해하는 이질적 것들의 첫사랑에서 나의 사랑이 겹쳐진다. 이제 나는 이질적인 것에서 ‘나’를 볼 수밖에 없다. 이질적인 것은 나와 다르기에 불편한 것, 없어도 상관없는 것, 아니 없었으면 좋을 것 아니던가. 


 하지만 바로 그 이질적인 것들을 향했던 시선이 ‘나’를 보는 시선이 되어버린다. ‘홍종두’와 ‘한공주’의 로맨스에서 빙긋이 웃음 지을 때 나의 내적 시선은 이미 분열 되기 시작했다.「오아시스」는 내게 선택을 강요했다. 이질적인 것을 ‘나’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나’를 이질적인 것으로 대할 것인가? ‘홍종두’와 ‘한공주’를 그리고 그네들의 사랑을 이해해버린, 아니 그네들 속에서 '나'를 발견해버렸기에, 나는 이 강요된 선택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나를 이질적인 것으로 대할 때 결과는 끔찍하다. 그때는 나 자신을 불편한 것, 없어도 상관없는 것, 없었으면 좋을 것으로 여기게 된다. 나는 그 끔찍한 자기부정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이질적인 것을 ‘나’로 받아들여야겠다. 쉽지 않겠지만. 그렇게 나와 다른, 이질적인 존재들이 사실은 나와 다르지 않았음을 이해하고 싶다. 이질적인 것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싶다. 


 그렇게 나는 ‘홍종두’가 되고 싶다. 그렇게 나는 ‘한공주’와 사랑하고 싶다. 그것이 가능해질 때, 내가 그리도 찾아 헤매던 내 삶의 ‘오아시스’가 펼쳐질 것이란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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