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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성추행을 했을지도

미안합니다. 

서지현 검사의 인터뷰가 연일 화제다. 그 화제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서지현 검사의 이야기에 공감했고, 위로받았던 많은 여성들은 ‘me too'행렬에 동참했다. 정직하게 말하자. 나는 여자를 모른다. 그래서 여성들이 받았던 일상적 폭력들에 대해서 ‘나도 이해해'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한국 사회에서 남자로 태어나 남자로 길러진 사람이 그런 섬세한 감수성을 갖는 일은 좀처럼 드문 일이다. 인간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은 상처받은 이들의 능력이니까. 사회적, 역사적으로 약자가 강자보다 인간에 대한 감수성이 더 섬세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래서다.      


 그래서였을까? 서지현 검사의 인터뷰가 촉발한 성추행 관련 논의가 있는 곳이 불편하다.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 논의로부터 눈을 돌리게 된다. 그 이유를 안다. 나 역시 성추행 혹은 성희롱을 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혹은 불편함 때문이다. 나의 성추행 혹은 성희롱을 돌아보게 된다. 남자다운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기위해 상대의 동의 없이 했던 신체 접촉들, 진보적이고 감정에 정직한 사람이기에 했던 “오늘 같이 잘래요?”라는 말들. 내가 했던 이런 행위들은 성추행 혹은 성희롱을 비껴갈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 비껴갈 수 있다. 성추행, 성희롱은 기본적으로 모종의 권력관계가 성립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범죄 아닌가? 권력을 가진 자가 그 권력으로 상대에게 성적 수치심을 주는 행위를 할 때 성추행, 성희롱이 된다. 그러니 나는 안전하다. 동의 없이 손을 잡고 키스를 하려 했던 썸녀와 나는 아무런 권력 관계도 없었으니까. “오늘 같이 잘래요?”라고 말했던 클럽에서 만난 그녀와 나는 아무런 권력 관계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그런 나의 행위를 상대들이 원치 않을 때는 쿨하게 더 질척대지는 않았으니, 나는 분명 성추행, 성희롱으로부터 안전하다.    

  

 그런데 나는 왜 지금의 성추행 논의들이 이다지도 불안하고 불편한 것일까?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배우는 것은 저주’인가보다. 이래저래 주워 배우는 것이 많아지면서 알게 되었다. 여자와 남자는 특정한 집단과 조직에 속해있지 않더라도 이미 항상 권력관계가 작동 중이라는 걸. 다만 그 ‘여자-남자’의 권력관계가 일상이 되었기에 느끼지 못할 뿐이다. 고백하자. 나는 성추행과 성희롱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내면화된 그래서 구체적이고 명확하지 않은 권력관계로 인한 성추행, 성희롱을 얼마나 했을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인간이 성추행 같은 걸 하냐!”라며 목소리를 높여, 그들을 단죄하는 남자들이 부럽다. 나는 그럴 수가 없는 까닭이다. 나는 그렇게 절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에 서 있지 못하다. 할 수만 있다면, 성추행 논의들이 있는 곳을 피해 달아나가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의 성추행 논의에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할 수 있는 최대치는 반성과 사과다. 나도 모르게, 심지어 상대도 모르게 행했던 그 모호했던 성추행, 성희롱에 대해서 반성하고, 그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는 것이다.  "미안합니다." 그것이 내가 세상의 수많은 ‘서지현’을 위해 할 수 있는 지금 최대치다.      


 시간이 흘러, 나도 당당하게 목소리 높여, 성추행, 성희롱을 일삼는 인간들을 단죄할 수 있는 안전지대로 들어가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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