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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분명 우리를 치유한다.

좋은 글을 쓰고 읽어야 하는 이유

“글을 써보세요” 저마다의 삶의 사연과 곡절 앞에서 지쳐 있는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다. “왜요?” 그들은 묻는다. “글은 우리 삶을 치유하니까요” 내가 되돌리는 답이다. 대부분은 이 즈음에서 대화가 끝난다. 하지만 어느 분이 다시 물었다. “써봤는데 안 되던데요?” 여기저기 글쓰기 수업을 찾아다니며 글 꽤나 써본 분이었다. 때로 경험주의자와의 대화는 힘이 든다. “해봐서 안다”고 말하는 이들과 대화는 본질에 이르지 못하고 겉도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묻자. 글은 우리를 치유하는가? 그렇다. 글은 분명 우리를 치유한다. 과거의 상처도, 지금의 불안도 치유한다. 하지만 그 치유는 세상 사람들이 믿는 치유와는 다르다. 글 씀으로서의 치유는 생채기 주위에 바르는 연고 같은 것이 아니다. 이제 아문 것처럼 보이는 상처를 다시 찢어 곪아 있는 고름을 기어이 짜내는 치유다. 이것이 글을 씀으로서 치유는 얻는 이들이 드문 이유다. 세상 사람들은 상처가 났을 때 대충 약을 발라 봉합하기 바쁘니까. 속이야 곪든 썩든.     


 대부분의 글쓰기는 셀카다. 화장을 하고, 조명을 찾고, 각도를 조절해 가장 행복해 보이는 장면을 연출하는 글쓰기. 자신이 얼마나 긍정적이며 진취적이며 희망적인지를 드러내는 글쓰기. 이런 글쓰기로 치유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건 겉으로 드러난 상처에 연고만 발라대는 글쓰기다. 잠시 치유되는 것처럼 보여도 속은 더 곪아 들어가는 글쓰기. 우리를 치유하는 글쓰기는 그런 셀카 같은 글쓰기가 아니다.      


 우리를 치유하는 글쓰기는 쓰는 것은 고사하고 생각조차 힘든, 그런 아픈 글쓰기다. 나는 스스로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래서 나는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글쓰기가 비로소 자신을 치유한다. 그 고통과 아픔을 견뎌내며 꾸역꾸역 써나가는 글쓰기가 우리를 치유한다. 깊은 곳에 영원히 감춰두려고 했던, 그 지긋지긋한 자기부정과 피해의식, 콤플렉스는 그렇게 우리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자신을 치유하는 그런 글이 좋은 글이다. 그 좋은 글은 쓰는 ‘나’뿐만 아니라 읽는 ‘너’도 치유한다. ‘나’는 그 고통스런 글을 씀으로서 나의 문제에 거리를 두게 되고, ‘너’는 그 고통스러운 글을 읽음으로서 너의 문제에 거리를 두게 된다. 그렇게 쓰는, 그렇게 읽는 시간은 반드시 각자의 성찰의 공간을 마련한다. 그렇게 마련된 성찰의 공간에서 치유가 시작된다. 그래서 좋은 글은 쓰는 ‘나’도, 읽는 ‘너’도 치유하게 마련이다. 이것이 우리가 좋은 글을 쓰고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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