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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은 비언어적 대화

비언어적 대화의 기쁨


일상의 대화, 연애의 대화


사랑하는 이와의 대화는 우리를 살아있게 한다. 아직도 기억난다. 취업이 되지 않아 가뜩이나 불안했던 시기였다. “취업은 어떻게 되었어?”로 시작된 가족, 친구, 선배들의 ‘일상의 대화’는 나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무척이나 사랑해주었던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걱정과 불안 가득한 나의 이야기를 아무 말 없이 들어주었다. 한 참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카페모카 한잔 마셔. 그거 좋아하잖아.” 그 말이 뭐라고, 눈물이 터져 나오려 했다. 그 짧은 말에 ‘나’라는 존재가 이해받았고, 위로받았다고 느꼈다. 그 북받쳐 오르는 감정 때문에 눈물이 터져 나오려 했다. 그런데 ‘일상의 대화’ 속에서 같은 말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힘들어 죽겠다는데 카페모카를 마시라니, 분명 짜증나고 공허하고 답답했을 테다. 하지만 나는 그 대화를 통해 분명 치유되었다. 왜였을까?     


 ‘일상의 대화’가 언어로 점철되어 있다면, ‘연애의 대화’는 비언어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연애의 대화’는 언어 너머에 있는 까닭이다. 대화는 언어로만 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영혼을 돌보는 진정한 대화는 더욱 그렇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대화를 생각해보자. “영화 볼까?” “아니, 좀 걷고 싶어” 이 대화는 언어의 기능적 의미만 담고 있을까? 그러니까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이 ‘영화 보고 싶지 않음’ ‘걷고 싶음’ 뿐일까?     

 

 아니다. 이 짧은 언어적 대화는 긴 비언어적 대화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의 표정, 호흡, 눈짓, 몸짓과 같은 언어 너머에 있는 것들로 이미 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비언어적이기에 오직 둘만이 느낄 수 있는 대화. ‘연애의 대화’가 우리의 존재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다수에게 열려 있는 언어적 대화 너머 오직 두 사람에게만 열려 있는 비언어적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비언어적 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손잡고 포옹하고 키스하고 섹스 함으로 가능하다. 사랑하는 이들은 몸과 몸을 부대끼면서 서로를 느낀다. 그 사이에 언어로 나눌 수 없는 비언어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 섹스라는 것은 몸으로 대화함으로써, 비언어적 대화의 공간을 더욱 크게 여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언어로는 도저히 풀 수 없었던 오해가 온 몸을 부대끼는 섹스를 통해 해소될 때가 있지 않은가.       


 ‘카페모카를 마시라’는 말에 가슴이 먹먹했던 이유는, 그 언어적 대화가 비언어적 대화의 공간에서 이뤄진 덕분이었다. 언어로 점철된 ‘일상의 대화’에 지쳤을 때, 사랑하는 이를 찾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비언어적인 대화야말로 우리를 치유하는 진정한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도 사랑하고 싶은 게다. 진정한 대화를 하고 싶어서.           



비언어적 대화가 이뤄지는 공간, 체육관


이런 비언적인 대화가 꼭 연인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가끔 체육관에서도 이런 대화가 일어난다. 간혹 근심, 걱정, 짜증, 불안 등과 같은 온갖 부정적 감정에 찌든 표정으로 체육관에 들어서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말이 없다. 운동할 때도 그렇다. 하지만 운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전혀 다른 얼굴이다.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체육관을 나선다. 말 없는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이런 극적인 변화를 ‘운동은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라는 단순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다른 운동으로는 해소되지 않았던 감정들이 복싱으로 해소되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차이를 알고 있다. 운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혼자 하는 운동과 함께하는 운동. 혼자 하는 운동 예컨대, 수영, 조깅, 헬스 등은 타인과의 대화가 자체가 불가능하다. 함께하는 운동은 예컨대, 야구, 축구, 농구 등은 타인과의 대화가 가능하다. 가능할 뿐만 아니라 중요하다.      


 복싱은 함께 하는 운동에 속한다. 그래서 타인과의 대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여타 함께하는 운동과 다른 지점이 있다. 여타 다른 함께 하는 운동이 언어적 대화가 가능하다면, 복싱은 비언어적 대화가 가능하다. 글러브를 끼고 링에 올라가면 상대와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와 누구보다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조금 다른 결이기는 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읽어내기 위해 오감을 곤두세워 비언어적 대화를 하려는 것처럼 링 위에서도 마찬가지다. 오감을 곤두세워 상대와 비언어적 대화를 하려고 애를 써야 한다.



비언어적 대화는 몸의 대화


왜 안 그럴까? 링 위는 언제 어디서 주먹이 날아올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의 연속 아닌가. 그러니 오감을 곤두세워 말 없는 상대를 읽어내려 애를 쓸 수밖에. 그런 절박한 노력은 서로의 몸과 몸이 부대낄 때 명료해진다. 그때 링 위에 마주선 둘은 서로를 다 느낀다. 미묘한 표정, 호흡, 눈짓, 몸짓 변화에서 상대의 내면을 읽어낼 수 있다. 찰나의 순간에 집중이 흐트러진 것도, 안 아픈 척해도 방금 맞은 주먹이 꽤나 아프다는 것도, 오늘은 평소보다 컨디션이 안 좋다는 것도 다 느낄 수 있다.     


 몸으로 하는 비언어적 대화를 나누면 이런 것들을 다 알게 된다. 몸과 몸이 부딪히고, 주먹과 주먹이 교차되는 상황이 만들어내는 비언어적 대화가 있다. 이는 오직 둘만이 느낄 수 있는 밀도 높은 대화다. 어두운 표정으로 체육관으로 들어섰던 사람이 밝은 표정으로 체육관을 나섰던 이유는 상쾌하게 땀을 흘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마주한 상대와 몸을 부대끼며 나눴던 비언어적 대화, 즉 몸의 대화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밀도 높은 대화는 언제나 영혼을 치유하는 법이다.      


 비언어적 대화가 주는 기쁨이 있다. 언어적 대화가 난무하는 삶에 지쳐버린 이들에게 그 기쁨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이는 스파링이든 섹스는 같다. 좋은 파트너와 한바탕 치고 받는 스파링을 끝내고 서로를 안아줄 때의 기쁨이 있다. 소중한 연인과 섹스가 끝나고 상대를 안아줄 때의 기쁨이 있다. 이 두 기쁨은 분명 결의 다름과 밀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두 기쁨은 근본적 같은 감정이다. 누군가와 비언어적으로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에 대한 기쁨 말이다. 비언어적 대화가 주는 존재론적 기쁨 말이다.      


 사랑이라는 어렵고 두려운 감정을 우회하고도, 복싱은 그런 비언어적 대화의 공간을 열어준다. 삶을 더 큰 기쁨으로 채워주는 것은 복싱보다 사랑이다. 하지만 사랑이 어디 쉽던가. 사랑할 용기가 없다면, 복싱을 할 용기라도 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누군가와 언어 너머로 이야기를 나누는 그 기쁨을 느껴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 기쁨으로 사랑할 용기까지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온 몸으로 나누는 모든 대화는 존재 자체를 풍요롭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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