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자본주의 너머의 공간, 체육관

강밀한 취미, 복싱

우리시대 거의 모든 아픔의 근원, 자본주의

     

소외, 다툼, 경쟁, 불안. 우리 시대의 아픔들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가정, 학교, 직장 등 사회 곳곳에서 이런 아픔에 신음한다.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소외당하고, 끊임없이 다투고, 경쟁한다. 그 과정에서 끝도 없는 불안에 시달린다. 이런 아픔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 아픔의 원인을 하나로 단정 짓긴 어렵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을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자본주의다.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만드는 자본주의.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가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모든 사람이 돈, 돈, 돈 거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돈보다 소중한 것들이 많다’는 당연한 사실이 순진한 이야기로 들리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더 많이 벌고 더 적게 쓰는 것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 넘쳐나는 시대. 그것이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다. 사람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사람답게 살기란 애초에 요원한 일이다.          


 둘째는 지금은 돈이 곧 신분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제체제가 아니다. 봉건적 신분제에 가깝다. 형식적 민주주의가 갖춰져 문제의 본질을 가리고 있을 뿐, 재벌과 우리가 같은 신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것이 우리 시대 자본주의의 민낯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봉건시대의 천민이 영주를 만날 기회가 없듯, 지금도 그렇다. 경제적 천민이 경제적 영주를 만날 기회가 없다.      


 아니 천민과 영주가 만나게 되는 것이 더 문제다. 천민과 영주가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천민은 머리를 조아리고 영주는 군림한다. 돈이 곧 신분인 지금의 자본주의도 정확히 그렇다. 경제적 천민은 머리를 조아리고, 경제적 영주는 군림한다. 돈 많은 사람과 돈 없는 사람은 만날 기회도 없고, 만나게 되더라도 동등한 인격체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그런 시대다. 신분제로 기능하는 자본주의에서 사람답게 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강밀한 취미를 공유하는 관계에 대하여.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긴 시간 고민했다. 쉬이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돈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한 시대가 되어 버렸고, 돈이 곧 계급인 시대를 이미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병적인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실마리를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았다. 체육관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했다. 땀 흘리며 운동하는 그곳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희망을 보았다.      


 체육관에는 프로 선수가 셋이 있다. 나는 돈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돈을 쓴다. 가끔 맛있는 것을 사주고 이러저런 것들을 챙겨준다. 비단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체육관 회원들은 프로 선수들에게 이런 저런 것들을 베푼다. 또 회원들끼리도 서로 베푼다. 그건 무엇인가를 바라서가 아니다. 그저 사람이 좋아서 그런 것이다. 어찌 보면 참 낯선 광경 아닌가? 10원짜리 한 장도 계산해서 주고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 아닌가.    

  

 체육관에는 돈, 돈, 돈 거리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측면이 있다. 체육관은 사람을 돈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보는 공간이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은 어떻게 일어날까? 복싱이라는 취미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복싱을 누군가도 좋아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단순한 사실 때문에 자본주의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베풀고 싶은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러한 사실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물론 복싱 아니어도 그렇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베풀고 싶어지니까. 하지만 복싱은 더욱 그렇다. 함께 온 몸을 부대끼는 운동이 만들어내는 유대감은 함께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는 관계가 만들어내는 유대감보다 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그 깊은 유대감 때문에 체육관은 가끔 자본주의적 관성을 넘어서는 공간이 된다. 아무런 대가없이 베풀고 싶은 공간.  

   

 그뿐인가? 체육관은 자본주의적 신분제를 넘어선 공간이다. 체육관을 가보라. 앳된 중학생과 중년의 남자가 친구가 된다. 의사와 취준생이 친구가 된다. 기사를 대동하고 다니는 사장과 이삿짐 노동자가 친구가 된다. 성별, 나이, 직업, 빈부를 넘어 서로 동등한 관계 맺음이 가능하다. 체육관 안에서는 체육관 밖에서처럼 모종의 권력관계를 확인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군림하려는 들지 않는다.   

   

 이런 일들은 지금의 자본주의 거센 물살을 생각해보면 기적 같은 일이다. 진심으로 복싱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였기에 가능한 기적. 진심으로 복싱을 좋아하기에 나머지 조건들은 뒤로 물러나게 되기에 가능한 기적. 그렇게 사람을 사람 자체로 보게 되는 기적. 이렇게 체육관은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관성을 무너뜨린다. 이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자본주의를 넘어설 작은 실마리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외침은 공허하다. 지금은 이미 사람보다 돈이 우선인 시대이니까. 차라리 ‘취미가 먼저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겠다. 그 중에서 온 몸을 부대끼며 나눌 수 있는 강밀한 취미. 복싱처럼 그런 강밀한 취미를 공유하는 관계에서만 ‘사람이 먼저’일 테니까 말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나는, 자본주의를 넘을 수 있는 작은 희망을 체육관에서 본다. 이것이 내가 사람들과 함께 온 몸을 부대끼며 땀 흘리고 공부하며 살아가고 싶은 이유다.



매거진의 이전글 복싱은 비언어적 대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