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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이 난다는 것

복싱의 가장 큰 난제, 겁

복싱의 가장 큰 난제, 겁

복싱은 독특한 스포츠다. 거의 모든 스포츠에서 육체적 능력은 가장 중요하다. 축구장, 농구장, 수영장에서는 육체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그 운동을 빨리 배워서 잘하게 된다. 하지만 복싱 체육관은 좀 다르다. 복싱 체육관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에는 탁월한 운동신경을 가진 사람도 많았다. 그들 중 대부분은 당황하거나 좌절했다.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하는 운동은 늘 빨리 배우고 잘했는데 복싱만은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당황했다. 그 당황이 길어져서 좌절하는 사람을 많이도 보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던 걸까? 겁이다. 겁나서 그런 것이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서로 치고 받아야 하는 상황은 누구라도 겁이 난다. 겁이 나면 신체는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온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호흡은 멈춰지거나 가빠지고, 움직임은 둔탁해진다. 겁이 나면 아무리 신체적 능력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몸치가 되어버린다. 다른 운동은 한 달만 배워도 곧 잘했던 사람이 복싱은 1년을 배워도 제자리걸음을 하게 되는 것은 그래서다.  

    

 “복싱은 나랑 안 맞는 운동이야”라는 말을 남기고 체육관을 떠나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건 정확히 말해 “겁이 나서 못 하겠어”라는 말이다. 겁이 남긴 그 당황과 좌절을 감당하지 못하고 체육관을 떠나는 것이다. 프로선수나 지도자들은 이런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체육관에서 겁먹은 사람들에게 답답한 심정으로 늘 말한다. “겁먹지 마세요!” 아, 이 말보다 공허한 말이 있을까? 누군들 겁을 먹고 싶어서 먹겠나. 부지불식간에 겁이 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모욕적인 말, “겁먹었어?”

      

“겁먹었어?”는 사람들에게 특히 수컷들의 세계에서는 모욕적인 말이다. 복싱 체육관에서 “겁 먹지마세요”라는 친절한 말에도 발끈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겁이 난다’는 것은 모욕을 느낄 정도로 부정적인 것일까?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해야 할 질문이 있다. 겁은 도대체 왜 먹게 되는 걸까? 겁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겁을 많이 내고 또 어떤 이는 겁을 적게 낸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학창시절에 혈우병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혈우병은 상처가 나면 피가 잘 응고되지 않는 병이다. 같은 반 아이들은 그 친구를 겁쟁이라고 놀렸다. 왜 안 그랬을까? 체육 시간에 축구하는 것도 겁을 냈고 심지어 책장을 넘기는 것마저 겁을 냈으니까. 그렇다. 겁은 상처에 대한 기억이다. 상처를 입었던 기억이 많은 사람은 겁이 많고, 그런 기억이 적은 사람은 겁이 적을 수밖에 없다. 혈우병이 있었던 친구가 유독 겁이 많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는 얼마나 많은 상처의 기억을 갖고 있었을까. 작은 상처에도 피가 멈추지 않아 아파했던 기억 말이다. 그 친구가 겁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겁에 대한 개인차도 이제 설명할 수 있다. 겁의 개인차는 육체의 문제다. 튼튼한 육체를 갖고 살았던 이들은 겁이 적다. 마찬가지로 유약한 육체를 갖고 살았던 이들은 겁이 많다. 튼튼한 육체에는 상처에 대한 기억 적게 각인되었을 테고, 유약한 육체에는 상처에 대한 기억이 많이 각인되어 있을 테니까.



겁은 일종의 ‘자기보호 장치’다.

겁은 일종의 자기보호 장치다. 겁을 통해 자신을 보존하고 보호할 수 있다. 혈우병에 걸린 친구가 겁 없이 생활하게 되면 자신을 보존하거나 보호할 수 없다. 약한 육체를 가진 사람이 겁이 많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겁을 통해 자신을 지켜나가고 싶은 것이다. 겁은 수치스럽거나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겁이 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기를 보호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


 체육관에는 ‘겁먹지 마’라고 다그치는 사람이 꼭 한 명씩 있다. 그들은 둘 중 하나다. 튼튼한 육체를 갖고 있었던 사람이거나,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없는 사람. 튼튼한 육체 덕분에 상처에 대한 기억이 적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겁먹은 사람들에게 쉽게 말한다. 겁먹지 말라고. 자신의 고통에는 한 없이 민감하면서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둔감한 사람이 있다, 그들 역시 쉽게 말한다. 겁먹지 말라고.

    

 ‘겁먹지 마’라는 말은 공허할 뿐만 아니라 폭력이다. ‘겁먹지 마!’는 말은 결국 ‘자신을 보호하지 마!’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공허하고 또 폭력적인가. 세상에 자신을 보호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니 ‘자신을 보호하지 말라’는 말은 불가능하기에 공허하고,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낼 수 있기에 폭력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겁을 먹은 채로 복싱을 계속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겁을 먹게 하는 복싱은 하지 말아야 할까?

      


‘자기감옥’으로서의 겁

     

겁은 자기보호 장치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겁이 문제가 될 때가 있다. ‘스피노자’라는 철학자는 ‘두려움’, 즉 겁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두려움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는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변덕스러운 슬픔이다.” 복싱 스파링을 할 때 겁이 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다칠 것 같다는 미래를 어느 정도 의심하기 때문 아닌가. 그래서 위축되는 감정이 겁의 정체다. 여기까지는 겁은 자기보호 장치로서 기능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겁이 변덕스럽다고 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스파링이 겁나는 이유는 어린 시절 싸우다 코피가 난 기억 때문이다. 하지만 코 보호 헤드기어를 끼고 14온스 글러브를 끼면 스파링하다 코피가 날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겁이 난다. 겁은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스파링은 해도 다치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는 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겁은 우리를 자꾸만 어린 시절 코피 났던 기억으로 데려다놓는다.

       

 겁이 변덕스러워질 때, 겁은 ‘자기보호’가 아니라 ‘자기감옥’으로 기능한다. 자기보호 장치로서의 공간은 어디일까? 집이다. 집은 익숙하고 안전해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겁은 집으로 상징된다. 그래서 겁이 나면 집에 가고 싶은 것이다. 겁이 나면 집에 가야 한다.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집에 가는 이유는 다시 집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다. 집에 영원히 머무르기 위해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변덕스러운 겁을 잠재우는 법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집은 감옥이다. 마찬가지로 계속 겁에 머무르게 하는 겁은 감옥이다. 집이 감옥으로 변하게 되는 순간은, 겁이 변덕스러워질 때다. 겁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서 겁이 계속 확대 재생산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변덕스럽게 확대 재생산 되는 겁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집 밖으로 영원히 나오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에 갇혀버린 자폐증 환자들처럼 말이다. 

     

 겁을 수치스럽게 여길 필요 없다. 겁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변덕스럽게 확대 재생산될 때 부정적인 것이 될 뿐이다. 겁이 확대 재생산되는 것을 막는 방법은 간명하다. 매일 한 발자국씩 집 밖으로 나서면 된다. 우리는 오직 경험하지 않는 것만 과도하게 겁내니까 말이다. 집을 나서 체육관 문을 여는 한 걸음이면 된다. 문을 열고 들어와 링으로 올라서는 한 걸음이면 된다.

      

 그 작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여서 변덕스러운 겁을 잠재울 수 있다. 겁은 나지만 그 겁이 제멋대로 날 뛰는 것을 제어할 수 있을 때 보이지 않았던 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 때 링 위에서 여유가 생긴다. 그렇게 상대의 움직임과 표정까지 보면서 상대와 치고받을 수 있다. 변덕스러운 겁을 잠재우고, 집 밖으로 한 걸음 나서 여행을 떠날 때 인생의 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링 위로 한 걸음을 나섰을 때 복싱의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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