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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복싱과 철학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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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황진규의 철학흥신소 Feb 18. 2019

'앞 손'이 중요하다.

링과 삶의 앞 손을 위하여.

앞 손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앞 손을 내셔야 되요.” 숨이 넘어갈 듯한 스파링을 끝내고 들은 핀잔이었다. “앞 손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복싱 격언 중 하나다. 이 말은 앞 손을 잘 사용하는 사람이 이긴다는 의미다. 의아하다. 앞 손은 뒤 손보다 위력이 약하다. 앞 손은 체중을 실어서 때린다기보다 가볍게 던진다. 반면 뒤 손은 체중을 실어서 때리기 때문에 더 위력적이다. 그런데 왜 앞 손을 지배하는 사람이 세계를 지배하는 걸까?

가벼운 스파링이라도 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앞 손이 주는 이점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해볼 수 있다. 거리조절, 리듬, 시합주도. 먼저, 거리조절부터 이야기해보자. 앞 손을 쉴 새 없이 던지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쉴 틈 없이 내는 앞 손이 상대와의 거리를 재는 줄자 같은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점은 리듬이다. 맞든 안 맞든 앞 손을 계속 던지면 시합의 리듬을 자신의 쪽으로 가져올 수 있다. 앞 손을 내는 움직임에 맞춰 자연스럽게 몸도 따라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점은 시합주도다. 가볍게 내는 앞 손이 상대에게 적중되면 큰 충격은 없더라도, 상대는 초조해지거나 혹은 흥분하게 된다. 그때 상대는 위축되거나 혹은 크고 작은 실수를 하게 된다. 그렇게 시합의 주도권이 앞 손을 던지는 사람 쪽으로 넘어오게 된다.

내가 앞 손을 내지 않았던 이유

앞 손이 중요하다는 것 즈음은 다 알고 있다. 이론은 이미 세계 챔피언이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스파링에서는 앞 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지난 스파링들을 복기해보았다. 어느 스파링에서 상대가 거리를 좁혀오는데도 속수무책 가만히 있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상대가 내 움직임을 모두 알고 있을 것 같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 때문에 가볍게 던지는 앞 손조차 낼 수 없었다.

스파링에 익숙해져갈 무렵 어느 스파링이었다. 두렵지 않았다. 다들 크고 작은 두려움을 안고 링에 올라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도 앞 손을 내지 못했다. 뒤 손을 크게 휘두르느라 앞 손을 내지 못했다. 욕심이었다. 두려움의 자리에 욕심이 자리 잡았다. 그 욕심 때문에 큰 한 방을 노리느라 앞 손을 내지 못했다. 좌충우돌하던 스파링을 지나왔다. 두려움도 없고, 욕심도 없었다. 그때가 되어서도 여전히 나는 앞 손을 내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체력이었다. 초반에는 부지런히 앞 손을 냈다. 두렵지도 않고, 욕심을 내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숨이 턱까지 차고 어깨는 천근만근이었다. ‘앞 손을 내야한다’ 머리로 생각할 뿐 몸은 달랐다. 좀처럼 앞 손이 나가지 않았다. 관장이 선수들에게 꼭 시키는 마무리 훈련이 있다. 3분 동안 쉬지 않고 앞 손을 내는 연습이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은 그 훈련이 왜 필요한지 그제 서야 알게 되었다. 두려움과 욕심 너머 체력 문제에 도달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작가와 복서

작가와 복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 여겼다. 쓴다는 것과 치고받는 것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복싱을 하면서 작가와 복서는 참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전업 작가는 희귀생물이다. 나는 한국에 몇 안 남은 희귀생물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종종 나를 구경하러 온다. 구경하러 오는 이들은 희귀생물에 대한 동경이 있는 이들이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이들. 그들은 글을 잘 쓰고 싶어 한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직감한다. 그들은 좋은 글을 쓰지 못할 거라는 걸. 그들은 세 가지 암초를 넘어서지 못했다. 두려움, 욕심, 체력.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내보이는 행위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다. 마치 내밀한 이야기를 잔뜩 써놓은 일기장을 세상 사람들 앞에 열어젖히는 일이다. 그 두려움을 넘어서지 못하면 늘 웅크리고 있느라 첫 ‘앞 줄’을 시작할 수도 없다. 내가 두려움에 가벼운 ‘앞 손’을 낼 수 없었던 것처럼.

그 두려움을 극복해도 다시 암초가 기다린다. 욕심. 글 꽤나 썼다는 사람은 욕심이 가득하다. 세상 사람들은 휘어잡는 매혹적인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 멋진 글을 써내야 한다는 그 욕심 때문에 가벼운 ‘앞 줄’을 시작하지 못한다. 내가 멋진 K.O 욕심에 사로잡혀 가벼운 ‘앞 손’을 낼 수 없었던 것처럼. 두려움도 없고, 욕심을 내지도 않지만 좋은 글을 써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만나게 되는 마지막 암초 때문이다.

체력이다. 글을 머리로 쓴다고 말하는 이들은 진지하게 글을 써본 적 없는 이들이다. 글은 체력으로 쓴다. ‘살아낼 체력’과 ‘글 쓰는 체력’ 좋은 글은 삶이기에 삶을 잘 ‘살아낼 체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매일 새로운 ‘첫 날’을 잘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첫 날’을 ‘살아낼 체력’이 없다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숨이 턱까지 차서 ‘앞 손’을 낼 수 없었던 것처럼.

좋은 글을 쓰려면 ‘글 쓰는 체력’이 있어야 한다. 첫 줄을 시작할 체력. 첫 줄이 두 번째 줄을 밀어낼 체력. 그것이 ‘글 쓰는 체력’이다. 좋은 글은 영감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엉덩이 붙이고 책상에 앉아 어깨가 아플 때까지 써야 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첫 줄’을 써내려갈 ‘글 쓰는 체력’이 없다면 좋은 글은 쓸 수 없다. 어깨가 천근만근이어서 ‘앞 손’을 낼 수 없었던 것처럼.

일상의 ‘앞 손’을 위하여.

비단 작가만 그럴까. 일상을 사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네 삶이 꼬여 버리는 순간들이 언제였을까? 그건 두려움과 욕심에 빠져 있을 때 아니었던가. 또 체력이 없어서 아니었던가. 신입사원 시절 갖가지 두려움에 삶이 힘들어졌고, 시간이 지나 직장에 익숙해졌을 때는 과도하게 욕심을 내느라 삶이 힘들어지지 않았던가. 그리고 결국은 더 이상 일을 잘 해낼 체력이 없어서 삶이 힘들어지지 않았던가.

사랑도 그렇지 않은가. 사랑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다시 상처받을 것 같은 두려움.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네 삶을 빛나게 해줄 사랑을 시작하지 못한다. 그 두려움을 지나오면 누군가를 겨우 사랑하게 되면 이제 욕심을 만나게 된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욕심을 내게 된다. 너무 사랑하기에 그를 내 곁에만 묶어두려는 욕심. 그 욕심 때문에 사랑이 폭력이 되어버리는 경우는 너무 흔하지 않은가. 그리고 결국은 더 이상 사랑할 체력이 없어서 사랑이 끝나버리게 된다.

이런 일상의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고 있다. ‘앞 손’이면 된다. 일상의 ‘앞 손’ 두려움이 찾아들 때면 두 눈을 질끈 감고 가볍게 ‘앞 손’부터 던지면 된다. 새로운 일이 두려울 때 할 수 있는 일들부터 시작하는 것, 그것이 일상의 ‘앞 손’이다. 욕심일 날 때도 앞 손이다. ‘인생 한방이다’는 허황된 거짓말이다. 인생은 앞 손이다. 부지런히 차근히 내는 앞 손으로 삶은 자기 모습을 찾아간다. 한 번에 잘 될 것 같다는 욕심이 들 때 사소해 보이는 일들로부터 시작하는 것, 그것이 일상의 ‘앞 손’이다.

그리고 일상의 ‘앞 손’을 끊임없이 낼 수 있도록 ‘삶의 체력’을 길러야 한다. 삶에 지쳐버리면 앞 손을 뻗기는 커녕 들고 있을 힘도 없으니까.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결국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이다. 삶은 머리로 사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사는 것이니까. 그렇게 두려움, 욕심, 체력의 문제를 넘어 일상의 ‘앞 손’을 낼 수 있다면 삶을 달라진다. 삶에 닥쳐오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부터 적절하게 거리조절할 수 있고, 삶의 리듬을 탈 수 있을 테다. 그렇게 삶이라는 시합의 주도권을 내가 쥘 게 될 테다. 링에서도, 삶에서도 ‘앞 손’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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