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멘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매번 기분에 지는 이들에게

기분에 지는 삶


“오늘은 공부할 기분이 아니야” “오늘은 밖에 나갈 기분이 아니야.”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핑계라고 한다. 아니다. 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이건, ‘하고 싶지 않음’과는 분명 다른 문제다. ‘할 수 없음’의 문제다. 달리 말해, 공부가 하고 싶지 않아서 ‘공부할 기분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공부를 하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오늘은 공부할 기분이 아니야’라고 말하게 된다.


그럼 이제 묻게 된다. ‘왜 도저히 그럴 수 없는가?’ 왜 도저히 공부할 수 없게 되고, 왜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는가?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글 쓰는 삶을 살기 위해 직장마저 그만두었다. 글을 쓰고 싶었고, 또 써야만 한다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동안 그러지 못했다. 글 한 줄 쓸 수 없었고, 어떤 날은 문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은 어느 날 아침 불쑥 찾아온 기분 때문이었다. 해도 안 될 것 같은, 해도 의미 없을 것 같은 기분.


“글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그 기분은 언제나 이 질문으로 찾아왔다. 도저히 ◯◯할 기분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을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어제까지는 분명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눈을 뜨니 ◯◯해도 아무것도 달라질 것 같지 않고, 그래서 아무 의미도 없을 것 같은 기분에 잠식당한 것이다. 그들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분에 지는 것이다. 기분에 지는 삶. 그것이 “도저히 ◯◯할 기분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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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멘탈


흔히 말하는 ‘유리멘탈’은 핑계 대는 삶의 자세를 의미하지 않는다. 핑계 대는 사람은 유리멘탈이 아니다. 유리멘탈은 무기력한 정신이기 때문이다. 기막히게 핑계 대는 사람들을 보라. 적극적으로 도망갈 핑계를 찾는다. 그들은 놀랍도록 적극적이다. 물론 그 적극성이 불행한 삶으로 돌진하는 적극성이라는 치명적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찌되었거나 그들은 무기력하지는 않다.


‘유리멘탈’은 무기력하기에, 너무 쉽게 기분에 지는 정신을 말한다. 부지불식간에 찾아드는 부정적인 기분에 너무 쉽게 잠식 되는 정신. 그것이 ‘유리멘탈’이다. 그래서 유리멘탈을 가진 이들은 부자유를 원한다.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방식으로 기분에 지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면, 유리멘탈을 가진 이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 밖에 없는 걸까? 기분에 지는 삶을 유지하던지, 스스로를 부자유한 감옥에 가두던지. 너무 섣불리 결론 내지 말고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유리멘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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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정신'은 어떻게 생겨날까?


"유리멘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스피노자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줄까? 먼저 스피노자의 '정신'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어찌되었거나 ‘유리멘탈’은 정신에 관련된 문제니까.


“인간 정신의 현실적 유有를 구성하는 최초의 것은 단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개물의 관념일 뿐이다.” (제 2부, 정리 11)


여기서 말하는 관념은 ‘정신이 형성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동물’, ‘집’, ‘식기류’ ‘필기구’ 등이 관념이다. ‘동물’, ‘집’, ‘식기류’, ‘필기구’는 정신이 형성한 개념이니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최초의 것은 관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이 있다.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최초의 관념은 하늘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필기구’라는 관념을 생각해보자. 필기구는 관념이다. 그 관념은 연필, 볼펜, 지우개, 노트북 등등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개물(개체)”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즉,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개물”들 때문에 생긴 어떤 관념이 바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최초의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 아이가 처음으로 연필, 볼펜, 지우개 등을 보고 만진다. 그때 그 아이에게 ‘필기구’라는 관념이 최초로 생성된다. 그렇게 생성된 ‘필기구’라는 관념은 노트북 또한 일종의 ‘필기구’임을 파악할 수 있는 정신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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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심신평행론’


스피노자는 정신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에서 정신과 신체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 이런 논리적 추론은 당연하다. 인간 정신의 기원은 관념이다. 그리고 그 관념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개물들에 의해 생긴다. 그렇다면 개물(연필, 볼펜, 지우개, 노트북)은 어떻게 관념화(필기구)될까? 그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질 수 있는 신체를 통해서다. 신체가 없다면 관념은 형성될 수 없다. 달리 말해, 신체화를 통해서 관념화가 이루어진다.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이며, 그것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신체이다.” (에티카, 제 2부, 정리13, 증명)


이제 스피노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 구성되는 도식은 다음과 같다. ‘개체(연필·볼펜·지우개)→개념화(필기구)→관념→정신’ 즉, 개체들의 개념화를 통해 관념이 형성되고 이런 관념들이 정신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필기구라는 관념도 그로인해 형성된 정신도, 애초에 신체가 없다면 형성불가능하다. 눈으로 연필을 보고, 손으로 볼펜을 써보지 않는다면 필기구라는 관념이나 그로 인한 정신도 형성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라는 말은 이런 의미다.


관념은 머릿속(정신)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신체와 상관없는 일인 것 같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황금산’을 생각해보자. ‘황금산’에 대한 선천적 시각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념은 다르다. 태어나서 한 번도 ‘황금’ 혹은 ‘산’이라는 개물을 볼 수 없었던 신체와 그것들을 볼 수 있었던 신체를 갖고 있는 이들의 관념은 다를 수밖에 없다. 비장애인이라고 다를 건 없다. 사람마다 신체가 다르기에 관념도 미묘하게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겁이라는 관념을 생각해보자. 겁은 사람마다 다르게 관념화 되어 있다. 어떤 이는 과도하게, 어떤 이는 적게 겁을 낸다. 왜 그럴까? 겁은 일종의 자기보호 장치다. 정신이 다쳤던 기억을 상기해 자신의 신체를 보호하려는 심리적 작동이 겁이다. 그러니 강한 신체를 가진 이와 약한 신체를 가진 이의 겁에 대한 관념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강한 신체를 가진 이는 다친 적이 별로 없을 테고, 약한 신체를 가진 이는 다친 적이 많을 테니까 말이다. 이처럼 정신과 신체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심신평행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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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멘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유리멘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해보자. 스피노자의 심신평행론을 통해 답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우리는 인간의 정신 신체와 하나로 결합되어 있음을 알 뿐만 아니라, 정신과 신체의 합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그러나 누구든지 먼저 우리의 신체의 본성을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 합을 충분하게 또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에티카, 제 2부, 정리 13, 주석)


스피노자는 먼저 “정신과 신체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심신평행론을 말한다. 그리고 “신체의 본성을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 합(정신+신체)을 충분하게 또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정신과 신체는 평행하지만, 둘 중 더욱 중요한 것은 신체라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유리멘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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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멘탈은 매번 기분에 진다. 하지만 계속 기분에 지는 원인이 유리멘탈인 것은 아니다. 본질적인 원인은 기분, 즉 정신에 집착이다. 우울한 기분이 찾아들면 온통 머릿속은 그 생각뿐이다. 사소한 작은 일에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정신이 마비된다. ‘이거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라는 정신상태가 바로 그 정신적 마비다. 그때 우리는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답은 간단하다. 신체에 충분히 집중해야 한다. 신체에 집중할 때, 정신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이든 좋다. 정신을 멈추고, 신체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기분에 지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어떻게 유리멘탈에서 벗어났을까? 정직하게 말해,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면 글 써봐야 삶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글 쓰는 게 아무 의미 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 기분은 여전히 나를 찾아오지만 나는 기분에 지지 않는다. 바로 복싱 체육관으로 달려간다. ‘정신’없이 샌드백을 두들기고, 상대와 ‘정신’없이 치고받는다. 그렇게 신체에 오롯이 집중함으로써 정신이 마비상태에 이르는 것을 막는다. 아니, 그렇게 흠뻑 땀을 흘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글을 쓰면 무엇이든 될 것 같고, 글 쓰는 삶의 의미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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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멘탈을 갖는 법


“유리멘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라는 소극적 질문 대신, “어떻게 강철멘탈을 가질 수 있을까요?”라는 적극적인 질문에 답해보자. 강철멘탈은 강한 정신을 의미한다. 즉, 더 유능한 정신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신체가 동시에 많은 방식으로 작용을 하거나 또는 작용을 받는 데에 다른 신체들보다 더 유능할수록, 그것의 정신도 동시에 많은 것을 지각하는 데 다른 정신들보다 그만큼 더 유능하다.” (에티카, 제 2부, 정리 13, 계)


스피노자에 따르면, 어떤 신체가 많은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또는 작용을 받는 데에 다른 신체들보다 더 유능할수록 그것의 정신도 동시에 더 유능하다. 신체가 많은 대상들과 만나 작용하고 작용을 받아 유능해지면 정신 또한 유능해진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A는 태어나서 한 거라고는 책상에 앉아서 공부밖에 없다. B는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직장도 다니고, 장사도 한 사람이다. 둘 중 누가 더 강한 정신을 갖고 있을까? 어렵지 않다. B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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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작은 변화나 시련에도 크게 흔들리는 덜 유능한 정신을 가질 수밖에 없다. A의 신체가 작용하고 작용 받는 대상이 적었기 때문이다. B는 다르다. 온 몸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B의 신체는 많은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작용 받아서 더 유능하다. 그래서 그에 걸 맞는 유능한 정신을 갖게 된다. 정신과 신체는 서로 결합되어 있기에 누구든지 신체의 유능함만큼의 정신의 유능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강철멘탈을 갖는 법은 분명해졌다. 첫째, 신체에 오롯이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정신으로 과도하게 쏠리려는 에너지를 신체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때 불시에 찾아오는 부정적 기분에 지지 않고 오히려 그 기분을 통제할 수 있다. 둘째, 온 몸을 부딪쳐 겪는 대상들이 늘려가야 한다. 그때 유능해지는 신체만큼 유능한 정신을 갖게 된다.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방법을 몰라서 유리멘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첫째 방법도, 둘째 방법도도 이미 다 아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유리멘탈인 이유는 비겁함 때문일 테다. 어떤 일이든 신체로 겪어내려 하지 않고, 정신으로 퉁 치려는 그 오래된 비겁함 말이다. 정신으로 대충 때우며 살아가려는 그 나약함과 비겁함을 응시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훌륭하고 구체적인 방법론에도 강철멘탈은 이미 요원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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